총장협의회 (5)
“무슨 조건입니까?”
어디선가 질문이 날아들었다.
범영민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 서지훈 총장의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데, 어느새 장내의 분위기는 명인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거기에 침묵하던 총장들이 하나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곤란했다.
“지금 우리가 모인 이 협회에서는 제가 구상한 안을 실행에 옮길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말이죠.”
“실행할 수 없다니요?”
“여기는 사립대 총장분들만 계시지 않습니까? 국립대와 기타 교육단체 등 다양한 집단을 포용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협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닥치시오!”
보다 못한 범영민 회장이 벌떡 일어났다. 이미 분위기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범영민 회장이 삿대질하며 윽박질렀다.
“보자 보자 하니 선을 넘는군!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오? 당신의 발언은 협회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배신행위요!”
“회장님. 일단 진정하시고…… 배신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곳에 협력하지 않았으니까요. 같은 편이었던 사람이 뒤통수를 쳐야 배신인 거 아닙니까?”
“뭐라고?”
“회장님 논리라면 저는 애초에 적입니다. 그쪽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범영민 회장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장 나가시오! 당신 같은 사람은 우리 협회에 필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성공적으로 빌드업을 끝낸 서지훈 총장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우리 명인대는 청문대와 함께 새로운 판을 짜려고 합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지만 굳이 이 말을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 고생보단 즐거움과 보람이 있을 거고, 그 결실은 무엇보다도 달콤할 테니까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총장들의 시선이 유서희 총장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총회가 끝나면 추궁에 시달릴 테니까.
서지훈 총장은 미소를 지었다. 아까 자신을 몰아붙였던 것에 대한 소소한 답례였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분들은 편하게 연락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대학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새로운 협회에서는 조금도 소홀히 대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럼 이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서지훈 총장이 회의실을 나섰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목석처럼 자리에 앉아 있던 일부 총장들이 서지훈 총장의 뒤를 따라 나온 것이다.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총장님!”
선두엔 이필승 총장이 있었다. 대여섯 명의 총장들도 그 뒤를 따랐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멀리서 서울까지 올라온 사람들인 듯했다.
“아니, 이 총장님. 이렇게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시면 곤란하실 텐데요. 미움을 사는 건 저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서지훈 총장이 걱정스럽게 충고했지만 이필승은 고개를 홰홰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말씀을 듣고 있자니 제가 왜 협회에 나오기만 하면 찜찜한 기분이 들었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음, 그러셨습니까.”
서지훈 총장은 굳이 어떤 기분인지 묻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했던 말에 힌트가 있었다. 이들은 주류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판을 짠다는 것도 혹한 일이었지만, 그들의 심금을 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협회에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준 것은 서지훈 총장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협회의 들러리 노릇만 해 왔다.
권력에 굴종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대한민국 최고 대학의 수장이 판을 뒤엎겠다고 나섰으니까.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총장께서 말씀하신 그 새로운 협회에 말이죠.”
“이렇게 빨리 답을 주실 줄은 몰랐군요. 감격스럽습니다.”
“서 총장님. 저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밖으로 따라 나온 모든 총장들이 협력 의사를 밝혔다. 서지훈 총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여러분들의 성원 잊지 않겠습니다. 자,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궁금한 것들도 많으실 것 같은데 말이죠.”
“오늘 밤을 새워도 모자를 겁니다.”
“하하하. 숙소를 잡아드려야겠군요.”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서니 유서희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멈칫한 서지훈 총장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았다.
구두굽 소리를 내며 당당히 다가온 그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톡 쐈다.
“하아, 소심하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네요. 총장협의회에서 그런 발언을 할 줄이야…… 뭐, 축하해요. 협회 사상 첫 제명자가 되겠네요.”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하고 싶은 걸 해도 모자라는 게 인생이지요.”
“총장님이야 한 번 살다 가는 거지만 대학은 영원히 존속해야 하니까요. 다음부터는 조금 신중해 주셨으면 하네요. 총장이라는 직책이 그렇게 가벼운 건 아니잖아요?”
“알겠습니다. 새겨듣지요. 충고는 다 하셨습니까? 그럼 기왕 나오신 김에 같이 가시죠.”
유서희는 대답하지 않고 앞장서 걸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근처에 좋은 장소를 알고 있어요. 그쪽에서 말씀들 나누시죠.”
* * *
총장협의회 총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사이, 민우는 연구실에서 국제전화를 걸었다.
가디언지의 시니어 기자로 활약하고 있는 조슈아에게 거는 전화였다.
일전에 한국에서 비공식적으로 만났을 때 그가 부탁했었다. 박민우 문학상이 보다 확장되어 해외 인사들에게도 수상 기회가 돌아간다면 누구보다 빨리 알려달라고 말이다.
민우는 그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지금까지 조슈아에게 신세 진 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
‘게다가 국내 언론사에서도 냄새를 맡은 것 같고 말이지.’
지음사에서도 충분히 준비한 뒤 보도자료를 배포하려고 했지만 센트럴 북스와의 협업 계획이 사전에 흘러나간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가 대뜸 연락해서 제발 한 번만 만나 달라고 하진 않았을 터다.
박윤지 기자는 정말 절실하게 부탁해 왔다.
민우는 그녀가 눈치를 챈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윤지 씨와 인터뷰하기 전에 약속을 지키는 게 맞지.’
그렇게 통화연결음이 들려왔고, 조슈아는 잠결에 전화를 받았는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마 아직 자고 있었어요? 지금쯤 출근했을 것 같아서 전화했는데.」
「하아아암…… 안타깝게도 오늘 휴가거든요. 이런, 아직 9시밖에 안 됐잖아!」
「아, 이런. 쉬는 날 전화해서 미안해요. 다음에 전화할게요.」
「잠깐!」
핸드폰 너머에서 심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마치 눈앞에서 조슈아를 보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가 아는 프로페서는 그냥 한가해서 안부 차 전화하는 사람은 아니죠. 맞죠?」
「하하하. 그건 미안하게 됐어요. 앞으로는 안부 전화 열심히 할게요.」
「무슨 일입니까?」
조슈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민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약속 지키려고 전화했습니다. 전에 한국 와서 만났을 때 부탁한 거 있었잖아요.」
「오, 맙소사. 진짜입니까?」
「저는 한가하게 안부 전화하는 사람 아니잖아요.」
「으하하하하!」
조슈아가 유쾌하게 웃었고, 민우는 ‘박민우 문학상’이 올겨울 새롭게 리뉴얼된다는 사실을 전했다. 조슈아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척됐군요. 저도 센트럴 북스가 참여할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사장이 호락호락한 분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전 약속 지켰습니다. 더 부탁하실 건 없죠?」
「있죠. 이거 기사로 내보내도 됩니까? 알다시피 영국에서는 민우 씨의 행보에 관심이 많거든요.」
민우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이후로도 꾸준히 번역서를 발표했다. 이제 작가 이름이 아니라 번역가 이름으로 책을 선택할 정도로 네임밸류가 생겼다.
민우의 번역서를 읽은 독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이 번역된 거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읽힌다고.
그랬기에 책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팬이 되어 민우의 행보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지음사에서 허락받았으니 보도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아직 정해진 것도 많지 않은데 기사로 내보낼 만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기자들은 기사를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간 민우 씨의 행적을 나열하고, 이 대단한 사람이 더욱 대단한 도전을 한다고 적어 넣으면 훌륭한 기사가 되겠죠.」
「그건 기사가 아니라 소설 같은데…….」
「하하하. 절대다수가 믿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지요. 아무튼 고마워요! 조만간 한국에 들어가면 술 한잔 살게요.」
전화가 끊겼다.
그래도 민우는 조슈아가 조금 더 편히 기사를 쓸 수 있도록 추가 내용을 메일로 전달해 주었다.
‘박민우 문학상’은 올겨울부터 ‘박민우상’으로 개정된다.
그리고 노벨상처럼 각 분야를 정해 수상자를 선정한다. 물리, 화학, 의학, 문학, 수학 등이며 수상자는 한 명이 될 수도 있고 공동수상이 될 수도 있다.
기존에 수상하던 번역 부문은 따로 분리되어 ‘지음번역상’으로 개정된다.
당초에는 ‘박민우 번역상’으로 하겠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민우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은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그래서 주최사인 지음사의 이름을 따 ‘지음번역상’으로 개정되었다.
‘이쯤이면 됐겠지?’
민우는 조슈아의 메일로 파일을 보냈다. 그리고 기지개를 켰다.
곧 톡이 왔다.
총장협의회에 나갔던 서지훈 총장이 보낸 톡이었다. SNS를 확인해 보라는 톡이었다.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 민우는 바로 SNS에 접속했다.
최근 타임라인에 서지훈 총장이 올린 사진이 한 장 보였다.
“뭐야 이게?”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이었다. 그중 얼굴을 아는 건 청문대 총장인 유서희뿐이었다. 예전에 청문대에 방문했을 때 한번 인사한 적이 있었다.
사진을 이해하지 못한 민우는 사진 밑에 적힌 글을 읽었다.
“새로운 협회 발족. 그리고 첫 모임……?”
그 사진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총장들과 모여 찍은 인증샷이었다. 저번 총장 선거에서 SNS로 재미를 본 서지훈 총장은 이번에도 SNS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한 민우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니까.”
여전히 배울 게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박윤지 기자가 뛰어 들어왔다.
“교수님!”
“깜짝이야. 뭐가 그리 급하세요? 노크도 안 하시고.”
“아, 죄송해요. 혹시 다른 기자들이 선수를 치지 않았나 싶어서.”
“아직 아무도 안 왔습니다. 그런데 약속은 내일이었잖아요?”
“앗! 오늘 목요일 아니에요?”
“오늘 수요일이에요.”
박윤지 기자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머! 이걸 어쩌지? 저 목요일인 줄 알고 엄청 뛰어왔는데!”
“아닌 거 같은데요. 연기하시는 거 다 보입니다. 어색해요.”
“아니에요! 진짜 착각했어요!”
“기자도 참 쉬운 일이 아닌 거 같네요. 뭐, 기왕 오셨으니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시죠.”
민우는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