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협의회 (4)
곧 범영민 회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서지훈 총장이 총회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그는 주변을 돌아볼 것도 없이 바로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자리에 앉은 범영민 회장은 힐끗 서지훈 총장을 쳐다보았다.
순간 눈매가 좁혀지며 적대심이 끓어 넘쳤다.
하지만 끝내 미소가 걸린다.
기분이 좋았다. 결국 이 자리에 서지훈 총장이 참석했다는 것은 자신의 협박이 통했다고 확신했다.
‘후후후. 역시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겁이 많아. 앞으로 적절히 몰아붙이면 다룰 만하겠어.’
범영민 회장은 엄청난 오판을 하고 있었다.
설마 서지훈 총장이 다른 마음을 품고 총회에 참석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음, 다들 오랜만입니다. 다행히 모두 참석해 주셨군요. 바쁘신 줄은 알지만, 긴히 논의해야 하는 안건이 있어서 모셨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범영민 회장의 말투는 정중했다.
여기가 무슨 중소기업 팀장급 회의도 아니고, 대한민국 사립대학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다. 아무리 협회장이라고 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했다.
범영민 회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요즘 몇몇 대학에서 시간강사 관련 정책을 손봐서 시행하고 있다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학계는 물론 언론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지요. 그만큼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서지훈 총장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한일대 총장이었다.
“발언권을 신청하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군요. 말씀하시죠. 곽 총장.”
“충격적인 일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정책 자체도 물론이고, 그 정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불협화음을 생각한다면 마음이 좋지 않아요.”
비판하는 듯한 어조였다.
곽상민의 시선은 서지훈 총장을 향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회의실 안에 있는 마흔 명이 넘는 대표자들도 서지훈 교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게 다 네 책임이 아니냐,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서지훈 총장은 피식 웃었다.
“마치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 같군요?”
“그렇게 들리셨다면 그런 거겠지요. 강사법에 관한 접근은 신중했어야 합니다. 가뜩이나 입학자 감소로 대학 재정이 말라가고 있는데, 여기에서 엉뚱한 곳에 투자를 늘려야 하겠습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다른 대학도 아니고 한일대에서 입학자 감소를 언급하시니 생소하네요. 확실히 시대가 변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명문대인 한일대라면 입학 정원엔 별문제 없지 않습니까? 지원 미달은 다른 동네 이야기일 텐데.”
능청스럽게 비꼬자 곽상민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가뜩이나 청문대가 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양자구도에서 밀려버렸다. 대학 이사회에서도 제대로 하라는 압박이 상당하다.
“서 총장. 내가 하려는 말의 본질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엉뚱한 곳에 투자를 늘려야겠냐는 식의 말씀은 앞으로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요. 시간 낭비입니다. 얼마 전 한민당사에서 있었던 인터뷰를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그 자리에서 우리 대학의 박민우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학 간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됐다고.”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서지훈 총장은 책상을 짚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경쟁을 시작했으면 투자를 해야죠. 시간강사들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은 정당한 투자입니다. 여기가 유럽 축구 리그도 아니고 재정적 페어플레이 룰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곽상민은 본전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잔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문제인 겁니다! 경쟁, 좋지요. 하지만 우리 총장협의회가 설립된 목적이 뭡니까? 학계의 발전을 위해 안건을 먼저 협의하고 시행하자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명인대는 그렇지 않았지요. 총회에 매번 불참했고 이곳에서 논의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끼리 모여 다 해 먹자. 이런 이야기로 들렸다. 당연히 서지훈 총장은 비웃고 말았다.
“왠지 어떤 종교 생각이 나는데요.”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요?”
“기도나 예배를 드리려면 다니는 곳에 꼭 가야 한다는 이상한 신념 말입니다. 신은 한 분일 텐데, 마치 예배당마다 각각 다른 신을 모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서지훈 총장!”
주변이 웅성거리자 서지훈 총장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거 실례했군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가끔 제가 지나치게 비유하는 버릇이 있어서.”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유일하게 중립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이필승 총장과 유서희 총장 정도였다.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꼭 협회에 나와서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협회는 말 그대로 협의회지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기어이 당신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 대학은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 여러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렸습니다. 여러분들이 몰랐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만.”
“아직도 이해를 못 하셨군! 당신은 총장협의회 회원이라고!”
“회원이면 다 그래야 합니까?”
너무 당돌하게 물어서인지 곽상민은 몸을 움찔했다. 서지훈 총장은 뚫어질 것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시간강사 처우 문제는 전문대를 포함한 대한민국 모든 대학의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사립대학 총장들만 모인 곳 아닙니까? 오히려 국립대 총장이나 교육행정가들이 함께 모여 토론할 수 있는 무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틀렸습니까?”
“이이…….”
“왜 사립대 총장협의회에서 모여서 논의를 해야 하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곽상민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결국 서지훈의 논리를 꺾지 못했다.
이제 주도권은 완전히 서지훈 총장에게 넘어왔다.
그가 말을 이었다.
“사립대학은 국립대학보다 시간강사 시급이 무척 쌉니다. 심하면 서너 배 차이까지 나지요. 표준화도 되어 있지 않고요. 오히려 강사 시급을 표준화하고, 외지에 위치해 강사를 구하기 힘든 사립대에 정책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을 논의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에 대해 협회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으음…… 뭐 저도 서 총장님의 의견에 동의는 합니다. 정론에 가까운 말씀을 해주셨군요. 하지만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기본의 문제입니다. 기본이요.”
깍지 낀 손을 차분히 테이블에 올려놓은 범영민 회장이 씨익 웃었다.
“아까 서 총장께서는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협회에는 정관과 규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회원은 마땅히 그 정관과 규칙에 따라야 하지요. 하지만 서지훈 총장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임시 총회 안건에 포함된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정해둔 안건만 논의하는 건 효율적이지 못하지요. 이 부분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 지금까지 협회의 출석 요구를 거절하셨습니까? 솔직히 대답해 주세요.”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회의가 아니라 마치 상벌위원회가 열린 것처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서지훈 총장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제가 참석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히 밝혔을 텐데요. 공무가 많아서 참석하지 못했는데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 겁니까?”
“일부러 회피하신 건 아닌지?”
몇몇 총장들이 웃음을 흘렸다. 조소였다. 그들은 범영민 회장에 편에 선 총장들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서지훈 총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막상 와보니 생각보다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적어도 서지훈 총장에게 기대하는 게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일부러 회피했다면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출석했을까요?”
“그야 공문을 받으셨으니까 나오신 게 아닙니까. 오늘 나오지 않으면 제명 처분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제명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뭐라고요?”
범영민 회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지훈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한번 강조했다.
“총장협의회에서 제명되어도 상관없다고요. 정관에 그런 규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내쫓는 협회에는 볼일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나가고 싶어지네요.”
“말조심하시오!”
“이곳은 신성한 회의장입니다!”
몇몇 총장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서지훈 총장은 그들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신성한 회의장? 재미있네요. 제가 이곳에 나온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협회에서 소외된 회원분들이 많을 겁니다. 소규모 대학이거나 멀리 떨어진 외지에 기반을 두신 분들은 더더욱 그렇겠지요.”
이필승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몇몇 총장들이 관심을 보였다.
“저는 이런 비난에 시달릴 걸 뻔히 알면서도 여러분들께 제안을 하려고 나왔습니다. 지금 이곳, 총장협의회에서는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결코 내어주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본인들이 손해를 보지 않을까 그런 궁리만 하겠지요.”
“그만두시오!”
“대체 무슨 말을 그리합니까? 무슨 근거로?”
“졸렬하군!”
주류파 총장들이 벌떡 일어났고, 그때 얌전히 있던 소수파 총장들이 나섰다.
“왜 제지하십니까? 서지훈 총장은 발언권을 신청하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 총회 안건에서 벗어난 이야기도 아니고요.”
“발언을 허가해야 합니다.”
“서지훈 총장께서는 계속 말씀하십시오!”
서로가 팽팽히 대립한 상황.
서지훈 총장은 중립을 지키고 있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청문대의 유서희 총장은 도도하게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 끼어들지 않을 것 같았다.
“명인대와 청문대에서 주도하고 있는 강사 처우에 대한 정책은 소규모 대학들이 따라 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인데요. 거기에 강사들이 수도권 대학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으니 웃돈을 주고 모셔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소수파 총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굳이 강사법에 관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수십 년 전부터 경험한 고민거리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 학생들은 학점교류 시스템을 이용해 다른 대학의 학풍을 경험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굳이 강의실에 가지 않아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축복받은 세대들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학생 외에는 교류가 꽉 막혀 있습니다. 강사나 교수자원들도 교류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소수파 총장들이 깜짝 놀랐다. 그중 이필승 총장이 손을 들었다.
“말씀하시죠.”
“그 말씀은…… 명인대에서 강사를 지방대학으로 파견해 주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희망하는 대학과 협약을 맺고 우수한 강사를 파견할 겁니다. 그렇다면 명인대는 강사들에게 더 많은 보수를 줄 수 있고 학생들은 양질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서로 좋은 일이죠.”
“오오. 눈이 확 뜨이는 느낌입니다. 정말로요!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었는데…….”
이필승 총장이 감탄했다.
서지훈 총장은 주변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총장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 사람과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서지훈 총장은 이제 때가 무르익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