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협의회 (3)
겉으로 보기에 서지훈 총장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입은 굳게 닫혀 있었고, 눈매는 날카로워져 있었으니까.
마치 웅크린 고슴도치처럼, 그는 누군가 손을 댄다면 날카로운 가시로 되돌려 줄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면은 평온했다.
“저…… 혹시 서지훈 총장님 아니십니까?”
한 층 위에서 엘리베이터에 합승한 남자가 인사를 해 왔다. 머리카락이 희끗하고 반쯤 벗겨진 남자였다.
인상이 썩 좋았다. 총장이 아니라면 교장이라도 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서지훈 총장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서지훈입니다. 실례지만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필승입니다. 한수대학교 총장입니다.”
“아아. 한수대학교에서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총장님.”
서지훈이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한수대학교는 지방에 소재를 둔 작은 전문대였다. 협회 내에서의 권력을 따지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서지훈은 그를 조금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깍듯이 대했다.
서지훈은 민우의 말대로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찾아온 거다. 적진이라고 해서 굳이 날카롭게 쏘아붙일 필요는 없다.
마음을 돌릴 첫 상대가 이필승 총장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총장님께서는 알아봐 주셨는데 저는 알아보지 못했네요. 실례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서지훈 총장님은 유명한 분 아닙니까. 총장 후보자 토론회는 저도 생중계로 봤습니다. 참, 대단하시더군요.”
이필승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한 표정이었다. 왠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다른 분들에 비해 어리고 내공도 부족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벼이 보실까 걱정이군요.”
“전혀요. 그건 가벼운 게 아니라 용기 아니겠습니까? 그 토론회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슴이 뜨거워졌을 겁니다. 특히 대학을 이끄는 사람들은 말이죠.”
“이렇게 칭찬만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다음에는 질책도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하하하. 질책은 제가 받아야지요. 한수대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작은 대학이니 말이지요.”
서지훈 총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대학의 크기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떤 선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가 중요한 거지요. 요즘은 온라인 시대라 오히려 작은 대학들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봅니다.”
“역시 그렇게 보시는군요. 하지만 여러모로 쉽지 않습니다. 파벌이 워낙 강해서 말이지요.”
“파벌이 없는 집단은 없지요.”
서지훈 총장이 조심스레 충고했다.
파벌이라 하는 것은 바로 ‘교수협의회’다. 모든 대학 내에는 전임교수들만 모이는 단체가 있다.
당연히 교수들이 모인 자리이기 때문에 대학본부에 끼치는 입김이 상당하다. 각종 정책은 물론 재단에서 진행하는 사업까지도 관여하곤 한다.
명인대는 워낙 교수들도 많고 출신도 다양해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압도하는 경향은 없지만, 규모가 작은 대학일수록 파벌이 분명하게 나뉘는 경향이 있다.
한수대학교는 소규모 대학으로, 그 파벌이 분명한 대학 중 하나였다.
“그런 곳일수록 지도자가 용기를 내야 합니다. 빠르게 결단하고 소신을 보여야지요. 쉽진 않겠지만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아. 말씀만으로도 정말 든든하군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말만 하는 거 아닙니다. 진짜 도와드릴 수 있어요. 실은 재미있는 사업을 하나 준비하고 있거든요.”
“사업 말씀입니까?”
“예.”
서지훈 총장은 씨익 웃었다.
그는 이미 계획한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소규모 대학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위해 맞춤형 프로젝트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지방대학은 학생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강의 인력도 부족하다. 유능한 강사들은 수도권으로 몰리고 상대적으로 역량이 떨어지는 강사들이 지방으로 밀려나는 추세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지방에 있는 대학들은 경쟁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해 기준 미달의 학생들이 계속 유입되고, 기준 미달의 강사들을 채용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혹시 어떤 사업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건 말이죠.”
띵!
서지훈 총장이 말을 이을 찰나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필승 총장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는데, 이미 몇몇 총장들이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서지훈 총장이 있었기 때문에 표정들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호기심을 보인 사람도 있었고, 걱정과 우려를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천천히 하시죠. 어차피 시간은 많지 않습니까?”
“오늘은 서울에 머물 것 같은데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선약이 있어서 식사는 좀 어렵지만 커피 한 잔은 좋습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이필승 총장은 급하게 품에서 명함을 꺼내 다른 사람 몰래 서지훈 총장에게 찔러주었다.
명함을 챙긴 서지훈 총장이 당당히 앞으로 나아갔다. 몇몇 총장들이 인사를 해왔다.
“얼굴 보기 힘든 분이 오셨구려.”
“인사가 늦었습니다. 서지훈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오늘 참석하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지요.”
서지훈 총장도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서울 주요 사립대 총장들이 끼리끼리 모여 쑥덕거리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서지훈 총장을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 같았다.
보수적인 모임에서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재앙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만약 서지훈 총장이 제명된다면 협회의 근간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인대 총장께서 불참하시면 곤란하지요. 듣자 하니 이런저런 소문이 많던데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는 자주 나오십시오.”
“맞습니다. 서로 모여야 논의도 할 수 있고, 학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학계를 위한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서지훈 총장이 던진 일침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근처에 있던 총장들이 이쪽을 돌아볼 정도로 압도적인 한마디였다.
서지훈 총장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좀 회의적인 생각이 들더군요. 학계는 점점 어려워져가고 있는데 거북이처럼 몸을 숨기고 꿈쩍도 하지 않으려는 수동적인 태도가 말이죠.”
“그 무슨…….”
“으음. 그건 다 나름의 사정이…….”
“사정을 챙기면 평생 아무 일도 못 할 겁니다. 우리들이 한창 학교를 다닐 때야 시간이 충분했지만, 지금은 달라요. 일 년만 지나도 새로운 기술이 나오는 시대입니다.”
서지훈 교수는 살짝 톤을 낮췄다. 말을 하다 보니 너무 훈계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래서는 같은 편을 만들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는 의미에서 저는 협회에서 쓴소리를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학계를 위한 일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고 어여삐 봐주셨으면 좋겠군요.”
“역시. 젊은 분이라 그런지 패기가 넘치는군요.”
“글쎄요? 단순히 패기로만 본다면 나중에 큰코다치지 않을까요?”
그때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돌아서니 어떤 여자가 서 있었다. 스마트한 느낌의 단발에 안경을 쓰고 있다.
서지훈 총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청문대의 신임 총장, 유서희였다.
“이 자리에서 이렇게 보니 어색한데요? 유 총장님.”
“그런가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피식 웃은 유서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이곳에 모인 총장 중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전혀 밀리는 것 없이 그들을 압도했다.
그녀는 청문대의 첫 여성 총장이기도 했다.
명인대에서 학부를 마치고 MIT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청문대에 자리를 잡은 인재였다. 이 과정에서 정연주 이사장의 눈에 들어와 총장 출마를 결심했다.
그리고 압도적인 표차로 총장에 선임되었다.
‘젊음’과 ‘능력’이라는 키워드로만 본다면, 이번 명인대 총장 선거와 굉장히 흡사한 부분이 있었다.
반면 전통의 강자 한일대는 전임 총장이 재선에 성공해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한일대에서도 젊은 피가 출사표를 던졌지만 보수층 공략에 실패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한일대는 혁신보다는 안정을 택했고 자연스레 대학의 평판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 영향은 곧바로 대학 순위에까지 이어졌다.
이제 한일대는 저무는 해가 되었고, 명인대와 청문대가 자웅을 겨루는 시대가 왔다.
“그런데 큰코다친다는 건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까?”
서지훈 총장이 물었다. 알면서 무슨 질문을 하시나, 이런 표정으로 유서희 총장이 대꾸했다.
“말 그대로예요. 쓴소리만 듣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죠.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뒤처질 거라는 말입니다. 으음, 다들 경험도 없는 제가 뭘 알겠냐 이런 표정이신데…….”
팔짱을 끼고 돌아선 유서희 총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우리 청문대는 명인대보다 3개월 정도 늦게 새로운 정책을 도입했어요. 그 결과가 어땠을 거 같나요? 고작 3개월 정도일 뿐인데 격차는 3년 이상 벌어지고 말았죠. 우수한 강사들이 명인대로 몰리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 결과는? 명인대에서 선발하고 남은 강사들이 청문대로 오겠죠. 그리고 여러분들은 점점 싱거운 강사들만 받게 될 거고.”
총장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유서희의 한마디 한마디는 귀에 쏙쏙 박혀 들었다.
“그러니까 서 총장님 걱정할 시간에 본인 대학으로 돌아가 빨리 정책이나 수정하시란 거예요. 직원들이야 영양가 없는 것에 시간을 들여도 상관없지만, 리더는 곤란하지 않겠어요?”
씨익 웃은 유서희 총장이 돌아서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고, 서지훈 총장도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는 유서희 총장과 몇몇 이름 모를 총장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유 총장님.”
서지훈 총장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유서희 총장은 고개만 살짝 돌렸다.
“왜 그러시죠?”
“굳이 그렇게 모나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한배를 탔는데 말이죠.”
“아, 그거요.”
이미 서지훈 총장은 정연주와 새로운 협회를 만들기로 결정한 상황이다. 정연주는 유서희 총장을 임명한 사람이다. 즉 유서희는 이사장의 말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지금 태도를 보면, 왠지 적대시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뭐 이사장님이 그러라고 하시니 따라야겠지요.”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어머. 제가 생각한 총장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네요. 이렇게 소심한 분이셨나?”
서지훈 총장은 그저 웃어 보였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한 것 같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딱 하나예요. 우리 청문대가 아니라 명인대가 협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이죠.”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정연주 이사장님도 발기인에 포함됩니다. 그러니 명인대와 청문대가 같이 만든 거라고 할 수 있지요.”
“발기인이 뭐가 중요한가요? 먼저 전화 주신 분이 총장님이라고 들었어요. 조금만 시간이 있었더라면 전화를 드리는 쪽은 총장님이 아니라 저였을 텐데. 그게 아쉽다는 겁니다.”
“그렇군요.”
서지훈 총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
유서희는 더 할 말이 남았냐는 듯 등을 의자에 기댄 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여자, 보통내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