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협의회 (2)
집으로 돌아온 민우는 오랜만에 윤아의 공부를 도와주었다.
“그림 보는 거야?”
“응!”
윤아는 이탈리아에서 직접 공수한 화보를 보고 있었다.
온통 이탈리아어로 설명이 적혀 있었지만 윤아는 글씨는 관심도 두지 않고 그림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은 손으로 슥슥 문질러보기도 했다.
“뭐 묻었어?”
“아니. 여기 뭔가 툭 튀어나온 것 같은데. 근데 맨질맨질해.”
“그건 사진이니까 그래. 진짜 그림을 만져보면 질감이 느껴질 거야. 한 번 그린 부분에 덧대서 그린 부분이니까 뭔가 울퉁불퉁한 부분이 있겠지.”
“그렇구나.”
윤아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럴 때 아이들의 호기심을 풀어줘야 교육적으로 좋은 거긴 하지만, 원작을 구해다 줄 수 없으니 민우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글에 관심이 많더니, 요즘은 부쩍 그림에 관심이 많아졌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데 윤아는 그 단계를 훌쩍 넘어서 사진이나 그림이 실린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우는 윤아가 읽을 수 있는 책들을 구해주었다.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해외에 있는 학자들에게 부탁해 따로 구했다. 그래서 윤아의 방에는 사진과 그림이 들어간 커다란 책이 많았다.
“그래도 미술관 같은 데 가서 그림 만지면 안 돼. 알았지?”
민우가 웃으며 윤아의 등을 토닥였다. 윤아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왜 만지면 안 돼?”
“그림은 눈으로 보는 거라서 그래. 손으로 만지게 되면 그림이 망가질 수도 있거든.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잖아?”
“맞아 맞아.”
윤아가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하면 대부분 납득해 준다는 것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것에 비해 상당히 조숙한 편이었다.
그래서 떼를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해서 그런 거라고 칭찬하지만, 민우나 이수빈은 딸에게 독서를 강요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집에서 논문이나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딸이 옆으로 와서 책을 같이 읽기 시작했을 뿐이다.
자연스럽게 습관이 된 것이다.
어느새 윤아의 독서능력은 중학생 수준을 넘어섰다. 그것을 본 민우와 이수빈은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말을 실감했었다.
인문학을 하는 두 사람에게 있어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했으니까.
“그림 그리고 싶진 않아?”
“그리고 싶어.”
“아빠가 아는 사람 중에 그림 잘 그리는 언니가 있거든. 나중에 놀러 가 볼까?”
“응!”
윤아가 반색했다. 그러다 귀엽게 고개를 갸웃하더니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아빠는 아는 언니들이 많은 거 같아.”
“뭐?”
“주변에 예쁜 언니들이 많다구.”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여섯 살짜리 아이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때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수빈이 간식을 챙겨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윤아는 똑똑하다니까? 아빠의 바람기를 벌써 눈치채다니.”
“누가 바람기야? 애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오빠 주변에 예쁜 여자들 많은 거야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 아니었어요? 러브레터도 받고 말이지.”
“러브레터는 또 뭔데?”
이수빈이 연분홍빛 편지봉투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아까 타치카와 유지가 전해준 편지였다. 꺼내 놓는다는 것을 깜박했다.
“시오리라는 이름이면 일본인인가 봐요? 이제는 아주 글로벌하게 바람기를 발산하고 계시네. 이번에 일본 가서 새로 만난 사람인가요?”
“만난 사람은 아니고 건너건너 아는 사람.”
“응? 누군데요?”
“타치카와 선생 딸이야. 이번에 근처 학교에 입학하게 됐다고 해서 고맙다고 편지를 쓴 거 같더라. 아직 읽어보진 못했네.”
그제야 이수빈이 빙긋 웃었다.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도 없이 이런 물건이 나오면 기분이 묘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왜 남의 옷 뒤지고 그래?”
“우리가 남인가? 그리고 내가 언제 주머니 검사하고 그랬어요? 너무 튀어나와 있어서 뭔가 싶었지.”
“한번 읽어보자.”
민우가 편지를 뜯었다. 안에는 두 장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한글로 썼네요.”
“그러게. 글씨 잘 쓰네.”
“섭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오히려 글씨는 외국인들이 더 잘 쓴다고.”
시오리는 한글로 정성껏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새로운 학교에 가게 되어서 너무 기쁘고 즐겁다는 내용이었다. 다음에 볼 기회가 있다면 제대로 인사드리겠다고 하며 편지가 마무리되었다.
한국어는 따로 공부한 것이라고 했다. 또래들도 그렇고 본인도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공부하고 있다고 적었다.
다행히 이수빈이 오해할 만한 문장은 없었다.
“마음씨가 이쁘네요. 나중에 집으로 초대해서 맛있는 거 먹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 마음씨도 이쁘네.”
“어머, 안 하던 칭찬을 다 하고. 찔리는 게 있긴 했나 보네?”
“들켰네.”
화기애애한 부모의 모습을 보던 윤아도 싱글벙글 웃었다.
하지만 곧 윤아의 시선은 다시 화보로 내려갔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의 눈처럼, 윤아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 *
노크와 함께 연구실 문이 열렸다.
서강일이 명인대 강사로 초빙된 이후 노크의 새로운 패턴이 생겼다. 그는 들어오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문을 열어버렸다.
옆에서 논문을 읽던 차민재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이다. 논문은 잘되어가나?”
“그럭저럭요. 이게 한 번 파고 들어가니까 끝이 없네요.”
차민재는 석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보통 3학기를 마칠 무렵에 논문 준비에 들어가지만, 차민재는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준비를 시작했다.
“잘하고 있다는 신호야.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라. 저 돌팔이한테 물어보지 말고.”
“그래도 돌팔이는 좀……”
“뭐 어때. 박사는 이수빈 선생한테 한다면서. 그럼 그냥 제껴.”
“석사논문에 도장은 받고 제껴야죠.”
“아, 그렇구나. 고생해라.”
피식 웃은 서강일이 차민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민우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바쁘냐?”
“돌팔이가 뭐가 바쁘겠어. 그냥 공부하는 척하는 거지.”
“사내자식이 삐치고 그래.”
“뭔 일 있냐?”
“이거 실망인데. 내가 왜 명인대에서 강사 노릇을 하고 있는지 벌써 잊은 건 아니지?”
그제야 민우가 일어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전 서강일은 명인대 내에서 ‘시간강사조합’을 출범시켰다.
일종의 노조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근무 환경을 비롯해 시간강사들이 대학으로부터 제대로 대우를 받고 있는지 모니터링하고 대표자들이 협상에 나서는 일종의 협의체였다.
며칠 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당연히 대표자는 서강일이었다.
만약 백성웅 총장이 연임에 성공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시간강사 연구실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아. 명인대에 남는 연구실 많다며? 그거 좀 열어주면 안 되나?”
“그거 지금 협의 중이야. 3인 1실 정도로 이야기하고 있어.”
“언제쯤 결정되는데?”
“내가 유럽 나가기 전에는 끝내 놓을 테니까 걱정 마.”
이어 서강일은 조합원들의 고충을 전달했다. 민우는 설명할 부분은 설명하고, 경청할 부분은 경청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대화는 친구가 아니라 관리자와 노조의 협상처럼 사무적으로 되어버렸다.
그것은 민우가 의도하던 것이었다.
친한 친구라고 해서 편하게 이야기한다면 자리의 무게와 권위가 깃털처럼 가벼워질 테니까.
“좋아. 이 정도면 됐어. 정해진 것들은 내가 바로 조합원들한테 공지할게.”
민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합니다. 조합장님!”
“우리 젊은 처장이 싹싹하게 잘하는데? 하하하. 명인대로 오길 잘했단 말이지. 의외로 꿀잼이야.”
“칭찬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배고파서 그래. 잘 챙겨 먹고 다녀라.”
한차례 너스레를 떤 서강일이 연구실을 나갔다.
* * *
서지훈 총장이 고급 세단에 몸을 실었다. 곧 차가 중후한 엔진음을 내며 출발했다.
오늘은 총장협의회 임시 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참석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서지훈 총장은 민우의 의견을 수용했다.
만약 민우가 참석하지 말라고 했다면 지금 타고 있는 차는 집으로 향했을 터였다.
그만큼 이번 일은 리스크가 큰 일이었다.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괜히 상대를 자극해서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민우의 이름이 액정에 찍혔다. 서지훈 총장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 지금 출발하셨습니까? 총장실에 갔었는데 없으셔서요.
“한발 늦었어. 지금 막 학교 나서는 길이다. 뭔 일 있냐?”
― 몇 가지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급한가 보네. 전화까지 다 하고.”
―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고요. 겸사겸사 드릴 말씀도 있어서. 일단 타치카와 선생과 다음 달에 유럽 쪽 순방 가기로 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포부가 큰 분이더군요.”
민우는 타치카와와 저녁 식사를 하며 나눴던 이야기를 서지훈 총장에게 전해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서지훈 총장이 말했다.
“정 이사장이 탐내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야. 겉으로 보면 순둥이지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끝내주니까. 듣자 하니 하루 차이였다면서?”
― 맞아요. 이번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잘 알고 있구나. 운이 좋았다는 걸. 네 공이라고 했으면 한소리 하려고 했는데. 아무튼 타치카와 선생 초빙은 시작에 불과해. 앞으로 계속 청문대와 경쟁하게 될 거다.
― 예. 분발하겠습니다.
“뭐 그런 일 때문에 전화를 한 건 아닐 테고.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 조언이라고 해야 하나. 도움이 될 말씀 좀 드리려고 전화했어요. 그때 연구실에서 너무 무성의하게 대답한 거 같아서요.”
“찔렸구만?”
― 하하하. 그렇게 말씀하심 할 말 없구요.
서지훈 총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이어질 민우의 말을 기다렸다.
―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가서 옳은 소리를 하는 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 오해는 마세요. 구경하는 제가 재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럼 어떻게 했으면 하는데?”
― 어차피 새로 협회를 만드실 거라면 욕심을 보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욕심이라…….”
서지훈 총장의 눈이 깊어져 갔다. 서지훈 총장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풍경이 보였다.
― 이익을 위해 모인 집단이지 않습니까. 그럼 그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죠.
“어떤 식으로?”
― 이제 사립대들은 생존 경쟁에 들어가야 합니다. 엄청난 출혈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 거죠. 이 상황에서 총장협의회보다는, 선생님이 만드시려는 새로운 협회가 훨씬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을 강조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살고 싶으면 도망쳐라 이거군.”
― 침몰하는 배를 끝까지 잡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옆에 근사한 크루즈가 왔는데 말이죠.
그럴듯한 비유에 서지훈 총장이 씨익 웃었다.
“조언 고맙다. 네 말대로 하지.”
― 어차피 선생님도 그렇게 하실 거였잖아요.
“아니. 전혀. 그렇다면 그때 널 찾아가서 어떻게 할지 묻지 않았겠지.”
― 갑자기 그렇게 약한 척을 하신다고요?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떠넘길 사람이 필요하잖아? 네 말대로 했는데 잘 안 되면 네가 책임지면 되겠지.”
― 하아…….
껄껄 웃은 서지훈 총장은 통화를 종료했다.
곧 차가 총장협의회가 위치한 빌딩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서지훈 총장의 입가엔 어느새 웃음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