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31화 (431/500)

총장협의회 (1)

― 고생은 무슨요. 민우 씨가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부담스러웠을 텐데 잘해줬네요.

“어차피 제임스 씨 성미라면 기다리다 못해 한국으로 바로 날아와서 협상했을 겁니다.”

핸드폰 너머로 송승현 이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네.

“언론 보도는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세요?”

노벨상을 잇는 국제적인 학술상이 생겼으니 이제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을 초대해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초청 규모는 아마 역대 최대가 될 거다.

― 음…… 지금 상황으로는 10월 중으로 보고 있어요. 다음 달까지는 센트럴 북스와 실무 협의를 해야 해서 정신이 없을 거 같네요. 재단법인 설립도 해야 하고요.

“그렇군요. 그럼 그전까지는 엠바고입니까?”

― 그러고 싶긴 한데 제임스 씨가 입이 무거운 사람은 아니잖아요? 아마 소문이 퍼질 거고 취재 요청이 쇄도할 거 같네요. 한창 준비 중에 인터뷰하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당겨서 해야죠.

“내일 당장 인터뷰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네요.”

― 맞아요.

아마 이번 달을 넘기기 전에 기자들이 몰려올 것 같다. 제임스는 SNS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려야 할 일이 있다면 부담 없이 말씀해 주세요.

― 당연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우 씨 이름을 딴 학술상인데요. 너무 부려먹는다고 투덜거리지나 말아요.

“하하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 참, 재단 이름은 지음미래재단으로 결정됐어요. 참고해요.

“네.”

전화가 끊겼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들어오라고 말하곤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바쁘냐?”

깜짝 놀란 민우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서지훈 총장이었다. 총장이 된 이후로 연구실로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뭔가 좀 어색하네요. 여기에서 뵈니까.”

“오랜만에 오긴 했지.”

“어쩐 일이세요? 전화로 부르시지 않고선.”

“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상의요?”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지훈 총장은 오히려 자신이 어떤 일을 할지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상의라는 말은 좀 어색했다.

“제가 조언을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앉으세요. 방금 송 이사님하고 통화하던 중이었어요.”

“잘 지낸대?”

“아니 그걸 저한테 여쭤보심 어떡합니까?”

“요즘 서로 너무 바빠서 잘 못 보거든. 지음사는 네 덕분에 아주 난리가 났고. 직원들이 숙직실에서 밤새우는 경우도 허다하던데 말이지.”

“이렇게 제 탓이 되는 거군요.”

“잘난 게 죄야. 잘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거든.”

씨익 웃은 서지훈이 자리에 앉았다. 민우는 간단히 마실 것을 챙겨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왠지 걱정되는데…….”

“뭐 사고가 터진 건 아니고, 총장협의회에서 연락 왔거든. 이번 총회에 참석할지 말지 확답을 달라는군.”

“그건 이미 답이 정해진 거잖아요? 안 나가신다면서요.”

“안 나간다고 한 적 없다. 제명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

민우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도무지 서지훈 총장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가지 않는 게 왠지 도망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나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가 네 생각을 들으러 온 거야.”

“마음 같아서는 참석하라고 하고 싶죠. 아무래도 제명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잖아요.”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은 것이, 만약 서지훈 총장이 협의회에 출석하게 된다면 온갖 비난을 다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존경하는 제자로서 그런 일을 권유할 수는 없었다.

민우도 그러한 걱정을 말로 전했다.

서지훈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그것뿐인가? 내가 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가.”

“그렇긴 하죠. 협의회가 국회도 아니고 법을 바꾸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엄밀히 보면 총장끼리의 친목 단체니까요.”

“내 생각엔, 협의회의 범영민 회장이 소문을 들은 것 같다.”

“어떤 소문이요?”

“새교육협의회.”

민우가 깜짝 놀랐다. 반면 서지훈 총장은 만사태평했다.

“그러지 않고서 출석 여부까지 확인하지는 않았겠지. 공문을 보냈는데 따로 체크한다는 건 뭔가에 쫓기고 있다는 이야기거든.”

“설마 소문내셨어요?”

“당연하지. 그쪽 사무장이 들을 수 있는 경로로 슬쩍 흘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상부에 보고가 됐을 거야. 한바탕 뒤집혔겠지. 범영민 회장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거든.”

서지훈 총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학문의 길을 추구하는 학자가 아닌 전쟁에 뛰어든 지략가 같은 새로운 면모였다.

“참 무서운 사람이에요. 선생님은.”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나를 적으로 돌리지 않은 걸 말이다.”

“안 그래도 그러는 중입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제 의견이 중요한 거 같진 않은데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잖아요?”

서지훈 총장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민우가 이어 말했다.

“만약 총회에 참석하지 않으셨을 거라면 이렇게 오셔서 물어보지도 않으셨겠죠. 제명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참석했을 때 뭔가 메이드할 수 있는 게 있으니 물어보러 오신 거 아닌가요?”

“역시 박민우! 내 수제자답군.”

“그런데 참석해서 뭘 어쩌시려고 그러는 거예요?”

“파티원 모집.”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게임에서나 쓰던 말을 이런 데 갖다 붙이다니.

“선생님 혹시 저 몰래 게임에 복귀하신 건 아니죠?”

“설마 그러겠냐. 이젠 하고 싶어도 못 해. 손이 안 따라가서. 추억은 아제로스에 남겨놔야지.”

“그럼 대체 무슨 속셈입니까.”

“말 그대로야. 총회에 나가서 새로운 협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찾아볼 생각이다. 탱커는 풀이니 딜러와 힐러를 모셔야지.”

딜러와 힐러.

그것도 적진 한복판에서 동료를 구한다는 말에 민우는 앞이 캄캄해졌다. 과연 마음을 돌리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표정이 영 아니올시다네.”

“솔직히 선생님이 아니셨으면 한소리 했을 거예요. 말 같은 소리를 좀 하라고요.”

“그래? 그럼 하지 말까?”

“아뇨. 하십쇼.”

의외로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민우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전 팝콘 사다 놓고 구경하고 있을 테니 실시간으로 중계해 주세요. 야, 신난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네?”

“짜식이.”

볼일을 마친 서지훈 총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타치카와 선생 임용 서류에 도장 찍고 오는 길이다. 이제 우리 학교 사람이 된 거야. 참고해라.”

“알겠습니다.”

“또 데려올 사람 있냐?”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 외국에 나갈 일이 좀 있으니 그때 알아볼 계획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청문대엔 지지 마.”

부담스러운 한마디와 함께 문이 닫혔다.

청문대에 지지 말라는 건 정연주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라는 말이었다. 시간강사 처우 개선안을 시작으로 정면승부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자얀 얼굴 좀 보러 가야겠어.’

하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다. 자리로 돌아온 민우는 즉시 핸드폰으로 타치카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그날 저녁, 민우는 타치카와가 묵고 있는 고급 호텔에 들어섰다. 그리고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타치카와와 만났다.

「좋은 소식이 있다기에 축하드리러 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전화를 주셨네요.」

타치카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일전에 일본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여유가 생겼고, 더 이상 협박에 시달릴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 보였다.

「딸애도 이제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참, 이걸 선생께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타치카와가 전한 것은 연한 분홍색으로 된 편지봉투였다. 겉에는 직접 그린 것 같은 귀여운 캐릭터들이 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이름이 쓰여 있었다.

당장 열어보기는 좀 그래서, 일단 편지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사 준비는 어떠십니까?」

「순조롭습니다. 집에 넣을 가전들도 모두 구입했습니다. 레아 씨 덕분에 편히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네요. 이제 몸만 가면 될 것 같습니다.」

「나중에 꼭 초대해 주세요. 와이프와 같이 가겠습니다.」

「하하하. 물론이지요.」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두 사람은 근황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역사학과 교수님들과는 좀 교류가 있었습니까?」

「예. 학과장께서 자리를 두어 번 마련해 주셨습니다. 다들 학식도 인품도 훌륭하신 분이더군요. 배울 게 많았습니다. 그리고 들으셨겠지만 연구소 설립에 대한 이야기도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연구소라면, 독도 연구소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맞습니다.」

타치카와 유지는 수십 년간 독도 문제에 관해 연구한 사람이었다. 그의 독보적인 연구물은 정부 기관 및 단체에서 인용할 정도로 공신력이 있다.

그런 그가 연구소장을 맡게 된다면 그가 지금까지 저술한 논문과 수집한 자료는 자연스럽게 명인대 연구소의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연구소에서 어떤 연구를 진행하실 계획입니까?」

「지금은 무엇을 연구하는가가 중요한 상황이 아닙니다.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지요. 여전히 독도에 대한 세계의 인식은 부족합니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까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나 어플리케이션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또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는 사례가 줄지 않고 있다. 방송가에서는 심심찮게 독도가 지워진 지도를 써서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많다.

타치카와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냐고 합니다만,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의 문제이지요. 저는 연구소가 설립되면 연구원들을 모아 좀 더 체계적으로 국제학술지에 연구 성과를 발표할 생각입니다.」

「한국이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활동하신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민우는 감탄했다.

타치카와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지만, 다르게 본다면 명인대와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일석이조’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상황이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일본이나 한국에서만 주로 활동하다 보니 인맥이 좀 부족합니다.」

「학회 인맥 말씀이지요?」

타치카와는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 부탁입니다만 기회가 된다면 좀 소개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학회 가실 일이 있다면 따라가서 분위기도 익혀보고 싶군요.」

순간 민우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샘솟았다.

「그거라면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네요. 조만간 유럽에 다녀올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한번 같이 나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좋습니다. 어차피 2학기에는 강의가 없으니 시기가 딱 좋군요.」

타치카와 유지는 해맑게 웃었다.

민우는 즉시 핸드폰을 꺼내 한정현 감독에게 톡을 보냈다. 이번 해외 순방에 일행을 한 명 더해도 되냐고. 회신은 금방 왔다.

「준비하는 쪽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습니다. 몸만 오시면 되겠네요.」

「예? 이렇게 빨리 말입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다고요. 자자, 식기 전에 마저 드시죠.」

민우는 웃으며 식사를 권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