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발표회 (3)
민감한 이름이 나오고야 말았다.
역시나 주예린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솔직한 마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은사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것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는 뜻이다.
“네. 물론 다른 선생님들도 도움을 주셨지만 작품에 큰 영향을 주신 분은 한수영 작가님이 맞아요.”
“학부 시절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거군요.”
주예린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카메라가 없었더라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없을 거다.
아무튼, 수익금 모두를 장학금으로 쓴다는 엄청난 소식은 제작발표회가 끝나면 모든 언론사에서 속보로 내보낼 것이다.
고작 영화 하나에 설레발 치는 게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한정현 감독과 주예린이 각각의 분야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왜 언론에서 호들갑을 떠는 건지 납득할 것이다.
“제가 그때 꿈꿨던 것처럼, 후배들의 꿈을 작게나마 도와줄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에 이번 일을 계획하게 됐어요.”
“일이 잘 풀리면 좋겠습니다.”
“그건 감독님께서 열심히 해주셔야 하는 부분 아닌가요? 적자가 나면 곤란해요.”
“하하하. 맞습니다. 제가 열심히 해야지요!”
주예린과 함께 하는 작은 코너가 끝났다. 한정현 감독은 쇼맨십도 갖춘 엔터테이너형 감독이었다. 그래서 딱히 사회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몸과 시선이 다시 무대를 향했다.
“저는 이번 영화를 잘 만들어서 꿈을 한번 이뤄보고 싶습니다. 그 꿈이 뭔지는 다들 아시죠?”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칸 영화제’라는 표현이 얼핏얼핏 들렸다.
한정현 감독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몇 년 전 봉준후 감독님이 <기생벌레>로 세계 영화제를 휩쓸었습니다. 이 작품이야말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제가 만들려는 작품이 너무 예술영화라고 걱정하지 말고 좋은 소식을 기다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한 방 아닙니까?”
한정현 감독이 칸 영화제를 꿈꾸고 있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었었다. 하지만 주예린의 <방랑자들>로 도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만약 칸에서 성과를 거둔다면 예린이도 한 선생님도 좋게 풀릴 수밖에 없겠네.’
봉준후 감독의 <기생벌레>와는 달리, <방랑자들>은 원작이 있는 영화다. 영화가 대성공을 거둔다면 자연스레 원작에 대해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주예린은 이미 앞선 자리에서 한수영 교수를 은사로 지칭한 상황.
만약 칸 영화제에서 성과를 거둔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주예린과 한수영 교수에게 향할 것이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한 듯했다.
‘힘내라. 주예린.’
아직 질의응답 코너가 남았지만, 민우는 자리를 떠났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주인공이 아니었으니까.
* * *
고풍스러운 집무실 안에서 노년의 남자가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성능 좋은 컴퓨터 대신 종이로 된 신문을 읽는 중이다.
무거웠던 그의 표정이 갑자기 험악하게 변했다.
― 명인대에 이어 청문대도 ‘강사법’에 칼질
― 청문대 정연주 이사장 ‘앞으로 강의 및 연구 분야에서 시간강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 밝혀……
― 사립대발 ‘양적 완화’ 대학들 무한 경쟁 시대 도래하나?
남자가 관심 있게 읽던 것은 바로 명인대와 청문대가 내세운 새로운 정책에 관한 기사였다.
청문대도 명인대처럼 시간강사 처우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전격 시행했다.
굴지의 글로벌 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청문대는 명인대의 세 배 이상 되는 자금을 투입했다. 명인대에서 단계적으로 시행하려고 했던 연구 지원 사업까지 한 번에 시작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교육계는 마치 유카탄반도에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갑작스러우면서도 엄청난 충격을 감내해야 했다.
상위 두 대학에서 강사를 확보하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거기에 민우는 얼마 전 인터뷰에서 ‘대학 간의 경쟁’이라는 표현을 썼다.
덕분에 서울 소재 대학은 물론이고 수도권 소재 대학에서도 강사 처우에 대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간강사들에겐 오아시스만큼 달콤한 소식이었다.
언론은 물론이고 여론은 명인대와 청문대가 일으킨 변화를 지지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또 이런 칼럼을 남겼다.
― 대한민국 대학이 ‘진짜 대학’이 되려 하고 있다. 명인대발 쇼크로 대학 간 경쟁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궁극적으로 고등교육계는 질적으로 향상될 것이다.
― 5G 및 AI 시대가 도래한 지금 청문대는 비메모리 반도체 개발 연구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번 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신규 정책에서 반도체 분야 연구자에게 혜택을 몰아주는 부분이 보인다. 거기에 모기업인 대한전자와의 산학협력으로 시너지가 발휘될 것으로 전망된다. 적어도 IT분야에서는 명인대보다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신문을 보던 남자가 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범영민.
바로 총장협의회의 협회장이었다.
모든 일이 너무 급격히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고 말이다.
“애송이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동업자 정신이 이리도 없단 말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다른 대학들이 새로운 강사 지원책을 놓고 경쟁을 준비하는 한편, 뒷길로는 범영민에게 찾아와 재정 부담에 대해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한마디로 명인대와 청문대가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더라면 돈을 더 벌 수 있을 텐데 왜 출혈 경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그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고 있었고, 총장협의회는 창립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다.
이런 문제를 중재하지 못한다면 협의회의 존립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냥 찍어 누르기엔 명인대와 청문대의 덩치가 너무 컸다.
그래서 협회 내부에서도 범영민에 대한 불신론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삐익!
범영민이 손을 뻗어 내선을 눌렀다.
“좀 들어와 봐.”
― 예. 협회장님.
곧 커다란 문이 열리고 협회 사무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감색 정장을 입은 중년의 사내였는데, 특유의 무표정이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정중히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명인대 총장실에 보낸 공문은 어떻게 됐나?”
“명인대 총장실에 공문이 접수된 것은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회신이 없었습니다.”
“참석 여부도 알리지 않았나?”
“예.”
“한마디로 무시당한 거로군.”
사무장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범영민이 혀를 찼다.
“송구합니다. 서지훈 총장이 이렇게 강수를 둘 줄은 몰랐습니다. 보통이라면 제명 언급이 나오면 몸을 사릴 텐데 말입니다.”
“서지훈 그자가 평범하진 않지. 이렇게 무소불위로 칼을 휘두르는 걸 보면 난 놈이긴 해. 총장 선거 때부터 유명했잖나?”
총장 선거, 특히 총장 후보 토론회가 열렸을 때 날렸던 사이다 발언들은 이미 사람들의 손에 재편집돼 소위 말하는 ‘짤’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때는 이모티콘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기업에서 제안이 오기도 했었다. 서지훈 총장을 메신저톡에 사용되는 이모티콘으로 제작하고 싶다고.
당연히 수익과 관계된 일이라 서지훈 총장은 정중히 거절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나니 대학과 관계없는 사람들도 서지훈이라는 세 글자 이름을 잘 알게 되었다.
범영민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인정하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혁신의 아이콘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서지훈 총장을 제명시킬 생각이신 겁니까?”
사무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 대신 툭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범영민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진 않았다.
“자충수를 둔 건가? 제명할 수도 없고, 또 제명하지 않을 수도 없게 됐으니…….”
“말씀드리기 좀 조심스럽지만 최근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무슨 소문?”
사무장이 끝까지 머뭇거리자 범영민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결국 겁을 먹은 사무장이 입을 열었다.
“서지훈 총장이 새로운 협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만…….”
“새로운 협회? 무슨?”
“새 교육을 위한 협의회라고 합니다. 우리 협의회는 사립대학 총장들이 모인 곳이지만, 소문의 그 협회는 별다른 자격 없이 모든 교육자들이 가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허허…….”
우려하고 있던 일이 현실이 되려 하고 있었다. 당연히 범영민의 표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구성원은?”
“청문대의 정연주 이사장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발기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손대기 어려운 사람과 손을 잡았구만.”
범영민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연주는 규격 외의 인물이다. 아무리 총장협의회를 주름잡는다고 해도, 애초에 글로벌 기업의 일원인 정연주와 상대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굴리는 자본의 크기가 차원이 다르니까.
“그 정도로 정보가 디테일하다면 소문이 아닌 게 아닌가?”
“확실하진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게 없어서…….”
“흥.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저 들리는 소문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서지훈 총장, 거기에 그의 수족인 민우를 더한다면 허황된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좋아. 마음을 정했네. 이번 총회에서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면 당초 계획했던 대로 제명하는 것으로 하지. 명인대에는 다시 참석 여부를 알려달라고 연락을 해 봐.”
“알겠습니다.”
사무장이 복종의 뜻을 표했다. 그가 물러나자 범영민은 다시 홀로 남겨졌다.
다시 신문을 손에 쥔 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겠다고.
* * *
민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와 과제 출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반가운 전화가 왔다. 민우는 바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오랜만이네요. 전화 언제 주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나름 의외였어요. 중간에 연락이 와서 채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사님이 알아서 잘하실 텐데 굳이 채근할 필요가 있나요?”
전화를 건 사람은 지음사의 송승현 이사였다.
민우는 타치카와 유지를 영입한 이후, 그를 ‘박민우 문학상’의 첫 번째 외국인 수상자로 선정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센트럴 북스의 제임스 사장이 함께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지음사와 센트럴 북스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마 오늘 그 결과가 나와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 전화를 한 것 같다.
― 바쁠 테니 용건만 간단히 전할게요. 우리 지음사는 센트럴 북스와 공동 기금 조성에 합의했고, 앞으로 ‘박민우 문학상’을 공동으로 운영하게 되었어요.
“결국 그렇게 됐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지음사는 센트럴 북스와 손을 잡았다.
어떻게 보면 ‘박민우 문학상’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데, 송승현 이사가 잘 해결한 모양이다.
사실 글로벌 시상 프로그램이 되기 위해서는 자본 투자는 물론 국가 간 이해관계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 점에 있어서 미국에 본사를 둔 센트럴 북스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있기에 지음사 경영진에서 용단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