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발표회 (2)
금요일 저녁이 찾아왔다. 민우는 일찍 퇴근해 강남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은 영화 <방랑자들>의 제작발표회가 열린다.
초대장이 없으면 입장할 수 없다는 주예린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에, 민우는 출발하기 전에 초대장을 잘 챙겨 품 안에 넣었다.
한정현 감독 성격상 뒤풀이를 하겠지만 오늘은 식장에 참석해 가볍게 인사나 하고 올 생각이었다.
‘조만간 해외 순방을 나가야 하니 윤아하고 미리 잘 놀아줘야지.’
아마 한 달 정도는 자리를 비우게 될 것이다. 타치카와 유지의 임용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출국할 계획이었다.
해외 순방 스케줄은 <프로페서> 드라마 때문에 잡힌 것이었다.
곧 촬영에 들어갈 시즌 2는 해외 촬영이 많다. 시즌 1이 대학원생으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이야기라면, 시즌 2는 번역가이자 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쌓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메인 각본가인 소민정에 의하면 시즌 3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까지를 다룬다고 한다.
시즌 1 최종화 시청률은 11.4%.
만약 시청률이 지금처럼만 나와준다면 시즌 4 제작도 꿈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온 상황이었다.
‘잘되면 좋겠다.’
드라마 속에서 허윤이 열연을 펼쳐준 덕에 민우의 인기는 날로 좋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거품이 낄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모니 곧 제작발표회가 열리는 곳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 민우는 바로 식장으로 올라갔다.
고급스러운 레드 카펫이 깔린 공간이 나타났다. 카펫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리셉션 데스크에 서 있었다.
민우는 그들에게 초청장을 보여준 뒤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일찍 도착했지만 식장 안은 수백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기자들은 물론 영화에 캐스팅된 주조연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박민우 교수님!”
누군가 민우를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사람은 한정현 감독이었다.
민우는 반갑게 악수했다.
“오랜만이네요. 요즘 소식이 없으셔서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습니다.”
민우의 뼈 있는 한마디에 한정현 감독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하! 저야 뭐 시나리오 다듬고 촬영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죠. 별일은 없었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잘 지내셨습니까?”
“저도 좀 바빴어요. 주 작가가 아니었다면 오늘 제작발표회 열리는 거 몰랐을 겁니다.”
“그러셨군요. 이거 나중에 주 작가님께 인사 좀 드려야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인 주예린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다.
불참은 아닐 거다. 어디 아프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으니까.
이번 제작발표회는 영화계는 물론 문학계에서도 큰 이슈가 될 만한 일이었다. 때문에 주예린이 설명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
그때 한정현 감독이 민우와 거리를 좁히며 조용히 말했다.
“얼마 전 한민당사에서 열린 인터뷰는 저도 봤습니다. 이제 뵙기 힘들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 <프로페서> 시즌 3까지는 교수님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말이죠. 연기자들도 다음 시즌부터는 교수님의 피드백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드라마가 잘되니 배우들도 욕심이 많아진 것 같네요.”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개입하는 건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프로페서>라는 드라마가 제 자서전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드라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주제넘게 개입한다면 제가 스스로를 미화시킨다는 비판이 나올 겁니다.”
“그런 비판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요. 까려는 사람은 뭘 해도 까지 않습니까?”
“저야 무시하면 그만이긴 한데, 스태프분들이나 연기자분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서요. 시즌 1이야 그렇다 쳐도 다음 시즌부터는 개성 있는 작품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한정현 감독은 민우의 배려에 감탄했다. 약간의 아쉬움이나 그런 것들이 보일 법도 한데, 민우는 정말 아무런 욕심이 없어 보였다.
“이야! 술도 안 마셨는데 취하는군요. 교수님은 언제나 저를 감탄하게 만드십니다.”
“저는 촬영장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정말이에요. 그러니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좋습니다! 그럼 해외 일정부터 빠르게 추진해봐야겠군요. 출국엔 문제없으신 거지요?”
“예. 첫 일정이 프랑스였던가요?”
“맞습니다.”
시즌 2에서는 프랑스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프랑스 내에서 한국 드라마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한마디로 인기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랑느 박사의 포지션을 이어받은 세계적인 석학이 등장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첫 촬영지가 소르본 대학으로 결정되었다.
제작사에서는 공문을 보내 소르본 대학의 협조를 구했고, 대학 당국에서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세계적인 석학 랑느 박사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소르본 대학에서는 민우를 특별 연사로 초청했다.
당연히 제작사 입장에서는 소르본 대학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우에게 부탁했고, 민우는 휴머니티를 도와준 랑느 박사와 그 제자들을 위해 특강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다음은 영국으로 넘어갈 계획입니다. 맨부커상 시상식이 열렸던 곳에서 촬영이 있을 겁니다.”
“기대되네요. 제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그 순간을 어떻게 연출하실지.”
“당시 영상이 남아 있어서 재현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제 식으로 풀어낼지가 관건 아니겠습니까?”
“감독님의 안목이라면 멋진 작품이 나오겠지요.”
“하하핫. 너무 그러지 마십쇼. 부담되네요. 아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제가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한정현 감독이 손을 내밀어 민우를 자리로 데려갔다. 무대의 맨 앞쪽에 있는 VIP석이었다. 다른 좌석과는 달리 안락한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다.
개중에 민우의 등장을 발견한 기자들이 슬그머니 찾아와 인터뷰를 청했다.
민우는 난처한 표정으로 응했다.
“좀 곤란한데요. 오늘 주인공은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한 감독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으신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민우는 슬쩍 한정현 감독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한정현 감독이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였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오! 감사합니다. 이번 영화 제작에 박민우 교수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사실입니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아예 접점이 없었던 주예린과 한정현 감독을 이어준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어설프게 숟가락을 올리려고 하는 것보다 아예 추켜세워 주는 게 서로 좋은 일이다.
“그건 아닙니다. 한정현 감독님은 예전부터 주예린 작가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작품에 대해서도 말씀을 많이 했고요. <프로페서>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박민우 교수님은 주예린 작가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뭐, 다들 아시다시피 주예린 작가와 저는 같은 대학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같은 학부를 나오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저희가 만나서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가 뭔지 아십니까?”
기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녹음 앱이 켜진 핸드폰이 점점 가까이 다가옴을 느꼈다.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 뭐 그런 시시한 이야기밖에 안 합니다. 작품에 대해서는 서로 관여하지 않아요.”
기자들이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피식 웃은 민우는 이제 이쯤 하겠다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들이 물러나자 곧 제작발표회가 시작되었다.
무대 뒤쪽에서 한정현 감독과 주연을 맡은 연기자들이 함께 등장했다.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한정현 감독의 스타성을 알 만했다.
무대에 나타난 연기자들은 모두 신인이었다.
민우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제작발표회를 밥 먹듯 했는데 매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안녕하십니까! 영화감독 한정현입니다.”
서두를 장식한 한정현 감독은 연기자들을 소개했다. 인터넷에 검색할 것 없이 모두가 신인이었다.
한정현 감독은 믿고 쓸 수 있는 기성 배우가 아니라 신인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 <방랑자들>이라는 작품은 세기말에 놓인 젊은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서사와 캐릭터성이 절묘하게 조합된 아주 멋진 작품이지요. 물론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감독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맞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백지에 그 작품을 담아내는 게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험은 없지만 재능이 뛰어난 친구들을 섭외했죠.”
상당한 칭찬이었다. 배우들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래서 한 분을 더 무대로 모시고 싶네요. <방랑자들>의 원작자, 주예린 작가님입니다!”
곧 무대 뒤에서 주예린이 나타났다. 후드티 매니아였던 그녀는 편안한 임부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를 길게 풀어서인지 성숙한 매력이 느껴졌다.
도도하게 앉은 주예린이 한정현 감독이 건네는 마이크를 받았다.
“주예린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홑몸도 아닌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괜찮아요. 택시 타고 왔어요.”
“하하하. 이따 택시비 좀 챙겨드려야겠네요.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원작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거 같은데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그럴까요? 그래야겠죠? 여기까지 왔는데.”
한차례 너스레를 떤 주예린은 설명을 시작했다. 작품의 집필 의도와 전개 방향, 그리고 그려내려고 했던 캐릭터와 오브젝트에 대해서.
그녀는 천성 이야기꾼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궁금한 것을 콕콕 집어 주었다.
“등단을 위해 쓴 작품이긴 하지만 아포칼립스라는 장르적인 코드를 녹인 작품이라 언젠가 영상화가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한정현 감독님을 만나서 꿈을 이룰 수 있게 됐습니다.”
“찰진 설명 감사합니다. 그런데 작품 외적으로도 말씀하실 게 하나 더 있으시죠?”
“그거라면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이건 작가님의 아이디어였으니 작가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럴까요.”
주예린은 잠시 뜸을 들였다. 기자들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번 작품의 제작비와 투자금을 제외한 모든 수익을 모교인 상아대 국문과에 장학금으로 쓸 생각입니다. 창작기금이라고 할까요? 작품 활동에 뜻을 둔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네요.”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수익금 전부를?”
“제정신인가?”
“상업 영화도 아닌데…….”
특히 반쯤은 한정현 감독의 팬이었던 기자들이 걱정스럽게 수군거렸다. 민우는 그저 관망하는 자세로 무대를 지켜보았다.
한편, 주예린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을 알고 있던 한정현 감독은 그녀를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저도 상업 영화가 아니라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말씀드려야겠군요.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영화를 만드는 거지요.”
일침을 맞은 기자들이 조용해졌다. 이번엔 한정현 감독의 시선이 주예린 쪽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작가님께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를 여쭤보지 못했네요.”
“<방랑자들>은 제가 쓴 작품이지만, 오롯이 제 힘으로 쓴 작품은 아니에요. 학부 시절 은사님께 도움을 받아 쓴 작품입니다.”
“은사님이라면 한수영 작가님 말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