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발표회 (1)
민우는 이번 2학기에는 학부 강의를 한 과목만 맡게 되었다.
시간강사 처우 개선에 관한 정책이 시행된 이후, 명인대는 전임교수들의 책임시수를 줄이고 시간강사를 추가로 채용해 강의역량을 끌어올렸다.
한마디로 서로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자는 정책이었다.
전임교수는 연구와 학생 개별 지도에 시간을 투자해 학회 참석과 지도학생 면담 비율이 두 배 이상 늘었다.
“그래서 이쪽도 골치가 아프단 말이죠.”
오랜만에 연구실에 놀러 온 주예린이 따지듯 말했다. 책상에 앉아 있던 민우는 읽던 논문을 정리하고 그녀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만 아프냐? 누가 해야 할 소리인지 모르겠네.”
그렇게 대꾸한 민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쪽은 예산 초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자꾸 까불면 서지훈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보직 던져준다?”
“보직, 곤란.”
“초딩이냐?”
“저처럼 어린 교수가 보직 맡으면 좀 곤란하지 않겠어요?”
“골치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겠지.”
“매너겜 하시죠. 왜 팀킬하려고 해요?”
그래도 주예린이 소속된 문창과에는 강사 비중이 적은 편이었다. 소속 교수들이 대부분 작가들이기에 애초에 첨삭 지도가 많은 편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주예린은 심심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민우의 시간을 갉아먹는 중이다.
“어차피 내년엔 쉴 거 아냐? 안식년 냈다며.”
“그래서 더 억울하다는 거죠. 원래 계획이라면 세계 곳곳을 유람하며 잉여로운 1년을 보내야 하는데 뜻하지 않게 아이가 생겼네.”
“말조심해. 애가 들을라.”
“그렇다면 이미 늦었어요. 집에서는 한창 세계대전 중이거든요.”
“하아. 성질 좀 죽여라. 곧 엄마 될 사람이.”
“엄마가 자애롭다는 편견은 버려야지. 강한 아이로 키울 거예요.”
한진섭은 무딘 편이었고, 주예린은 상당히 예민한 편이었다. 임신한 이후로 티격태격하는 빈도가 늘었다.
“그래서.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 같진 않고. 나 곧 수업이야. 볼일 없으면 옆방 가서 놀아라.”
“수빈이도 수업 갔어요. 아니 국문과 사람들은 진짜 풍류를 모른다니까? 대체 한 학기에 수업을 몇 개나 하는 거예요? 이제 막 개강했으면 휴강도 좀 하고 그래야지. 인간미가 없다니깐.”
“능력이 출중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라서. 수빈이 강의 매번 만석인 거 몰라?”
민우가 피식 웃었다. 주예린은 뭔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건 아니고. 곧 제작발표회 있는 거 아시죠?”
“제작발표회?”
“벌써 까먹었다고? 이 정도면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아, 방랑자들?”
<방랑자들>은 주예린이 학부 시절 큰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에 등단한 작품이다.
일전에 한정현 감독이 찾아와 영화 제작 관련 계약을 체결했었다. 그래서 한창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야 언론에 발표할 모양이다.
물론 그간 언론에서는 온갖 추측성 기사를 생산해내곤 했었다.
일각에서는 민우가 처음으로 집필하는 시나리오를 영화화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도 그렇지만 언론에서도 민우가 작품을 창작하는 것에 대해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그 낭설은 공식적으로 부인되었고, 조만간 한정현 감독이 제작발표회를 열게 된 것이다.
“선배 바쁜 건 알지만 그래도 모셔야 후배의 도리인 것 같아서.”
“후배의 도리라. 왠지 너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거 같지만.”
“하긴, 후배의 모범적인 도리는 밥 사달라는 거겠죠. 그래서 저도 아쉬워요.”
주예린이 정사각형으로 된 편지 봉투를 건넸다. 안에 든 것을 꺼내 보니 정갈하게 만들어진 초대장이 있었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 강남 모처에서 제작발표회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VIP용 초대권이었다.
주예린이 설명했다.
“워낙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서 특별히 초대권을 만들었어요. 초대권이 없으면 아무리 선배라도 들어올 수 없으니 꼭 들고 오시길.”
“나 간다는 이야기도 안 했는데? 바쁜 걸 알면 스케줄 확인부터 해야지.”
“아 진짜 사람 매정하게 자꾸 이럴 거예요? 태교에 좋지 않습니다.”
킥킥거리며 웃은 민우는 초청장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우리 중에서 또 누구 가는 거야?”
“선배만 초대했어요.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니까.”
“진섭이도 안 불렀어?”
“남의 편을 왜 불러요.”
“언제 남의 편이 됐냐?”
“남편이 남의 편의 약자인 거 모르셨어요? 교양이 없으시네.”
“하하하하.”
어느덧 수업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출석부와 강의계획서, 그리고 각종 자료를 챙긴 민우는 주예린과 함께 연구실을 나섰다.
“기자회견 때 그것도 발표하는 거지?”
“그래야죠. 기왕 좋은 일을 하려면 남들도 알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지. 그래야 주예린답지.”
그래도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주예린은 한정현 감독과 작품 계약을 체결하며 조건을 하나 걸었다. 영화에서 거둔 수익을 모교의 장학금으로 기부해 달라고.
영화가 얼마나 잘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한정현 감독은 투자 수익분을 제외한 나머지 전액을 장학금으로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껄끄러운 것은 상아대에 있는 한수영 교수였다.
주예린과 한수영 교수는 아예 연을 끊은 상황.
하지만 <방랑자들>은 한수영 교수가 지도해 주었기에 탄생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현재로서는 주예린이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셈이다.
과연 이것을 영화로 제작한다고 발표했을 때, 한수영 교수가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했다.
“걱정되냐?”
“솔직히 말하면 괜히 잠자고 있는 호랑이 코털 건드리는 꼴 날까 봐 걱정이 되긴 해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한 선생님이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널 가르치지 않으셨을 것 같아서.”
주예린이 눈매를 좁혔다.
“오히려 속 좁기 때문에 절 내친 건 아니고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있나? 오히려 감정적이기 때문에 솔직한 법이야. 천천히 기다려 보자고. 대전에서 어떤 메시지가 날아올지.”
두 사람은 계단에서 헤어졌다. 떠나는 주예린의 표정에는 별 기대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민우는 달랐다.
* * *
민우는 국문과 전공 강의실로 들어갔다.
이번 강의는 ‘한국현대소설론’이라는 이름의 전공선택 과목이었기 때문에 1학기 때처럼 청강자가 몰리진 않았다.
얼핏 보니 서른 명 정도가 수강한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얼굴도 보이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네요. 반갑습니다. 이번 학기 강의를 맡게 된 박민우입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학생들이 손뼉을 쳤다. 민우가 마이크를 쥐고 연단 앞으로 내려와 학생들과 좀 더 가까이했다.
“다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 과목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이어진 우리나라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인 배경을 다뤄야 하고, 결국은 소설론이라기보다는 소설사에 가깝게 되겠지요. 엄밀히 말하면 근대와 현대는 구분해야겠지만 흐름을 함께 놓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함께 다룰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집중했고, 민우는 수업 방식과 과제, 그리고 평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설명은 이쯤 하면 될 거 같은데, 혹시 질문 있습니까?”
민우가 둘러보자 앞쪽에 있던 학생이 손을 들었다.
“지난 학기에 <존재와 영혼의 형식> 강의를 들었는데요. 이번에도 교재에 없는 내용으로 시험을 보게 될까요?”
“그거 좋은 질문이네요.”
민우는 머쓱해졌다.
당시 <존재와 영혼의 형식>의 기말고사는 즉흥적으로 출제되었다. 주교재에도 없는 내용이어서 학생들은 사막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시험을 치러야 했다.
덕분에 강의 평가에서는 썩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다.
거의 만점에 가까운 평가를 받던 민우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민우는 점수나 지표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미안했지만, 그들의 답안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후회는 없었다.
“이번에는 교재에 있는 내용으로 시험 문제를 낼 겁니다. 학생이 들었던 강의는 교양이었기 때문에 문제 출제가 자유로웠지만 전공 강의는 그렇게 하기 어렵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질문을 던진 학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뒤쪽에 있던 학생이 손을 들었다.
“조금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요즘 뉴스를 보면 교수님께서 여당으로 입당한다는 말들이 많은데 곧 학교를 떠나시게 되는 걸까요?”
연구실에서라면 모를까, 강의실에서는 나오기 힘든 질문이었다.
민우의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자 질문을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대학원 진학 예정인데 교수님이 안 계실까 걱정돼서…….”
“반가운 소리네요. 대학원 진학 결심을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합니다. 먼저 질문하신 내용은 뭐라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앞으로의 일을 알고 있다면 인생이 이렇게 피곤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죠.”
다소 이야기가 무겁게 흘러갈 것 같아 민우는 애써 웃어 보였다.
“제가 만약 대학을 떠난다고 한다면 학생은 대학원 입시를 포기할 건가요?”
“글쎄요…… 고민이 되긴 합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음, 문득 제가 대학원 들어갈 때가 생각나네요.”
학생들이 솔깃했다. 인기 있는 교수의 사생활은 누구나 좋아하는 테마다. 민우는 자연스럽게 학부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아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학부 때 지도교수님 덕을 많이 봤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서지훈 총장님이죠. 그때 공부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결국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었지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서지훈 총장님 때문이 아니라 그냥 공부라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에 진학을 결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즉, 누가 지도교수가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공부에 뜻이 있느냐인 것 같네요. 즐길 수 없다면 굉장히 고된 길이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공부를 즐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하겠지만,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보다 많아요.”
질문을 던진 학생은 이해했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명인대 국문과에는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습니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박사까지 친절히 가르쳐주실 겁니다. 요즘은 서비스 시대 아닙니까?”
마지막 농담에 학생들이 웃었다. 더 이상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민우는 전달사항을 마저 전한 뒤 강의를 마무리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까지 수강 변경 기간이지만, 전공과목이니 바로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주변에 소문 좀 내주세요. 수강 변경할 사람들은 다음 시간에 들어오라고. 다들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리를 정리한 민우는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학생들도 생각 이상으로 신경을 쓰고 있구나.’
불과 1년 전이라면 아까 나왔던 질문 하나에 마음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민우는 그 질문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질문을 한 학생이 대학원에 진학해 먹고사는 걱정 없이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좀 더 대범하게 가자고.’
민우는 그렇게 다짐하며 연구실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