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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427화 (427/500)

선생님,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2)

오랜만에 열린 모임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민우는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총장실을 찾았다.

문이 닫혀 있었고 비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 교수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총장님 안에 계시죠?”

“계시긴 한데 지금 손님이 들어가 있어요.”

비서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꽤 높은 사람이 찾아온 것 같다.

“기다리겠습니다. 이후 스케줄은 없으신 거죠?”

“예. 지금 접견만 끝나시면 괜찮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만큼 다급했다.

어제 정연주는 서지훈 총장이 진심으로 한 이야기라고 했다. 애초에 통화도 많이 안 하는 사이인데 농담을 하려고 전화를 한 건 아니지 않냐는 논리였다.

그래서 농담으로 흘려들을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협회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총장협의회는 물론 각종 사립재단 관련 협회와 척을 지는 걸 넘어서 싸우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선생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추진하실 분은 아니긴 해도…….’

민우는 로비에 놓인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좀 섣부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내외로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는 상황이었다. 배후에 한민당을 깔고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면 안정세로 접어들 수 있는데, 너무 급하게 사립대학들을 자극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 언론에서 난리를 치겠어.’

총장협의회의 구성원, 그것도 명문사학인 명인대의 총장이 제명되었다는 기사가 나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서가 내준 시원한 음료가 바닥을 보일 무렵, 문이 열리고 손님이 밖으로 나왔다.

‘누구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민우가 앉은 소파는 파티션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손님은 50대 정도의 중년이었다. 캐주얼하면서도 젊은 복장을 걸친 것을 보니 기업가인 듯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돌아선 손님이 악수를 청하자 서지훈 총장이 손을 잡았다.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엔 제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서 총장님같이 공사다망한 분이 오신다면 제대로 준비를 해야겠군요. 다음엔 식사나 같이합시다. 아니면 야구나 한 게임 보러 가시죠.”

“그거 좋지요. 살펴 가십시오.”

갑자기 야구 이야기가 나오자 민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손님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서지훈 총장이 몸을 돌려 다시 총장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민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언제 왔어?”

“한참 됐어요. 손님 오셨다길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민우의 표정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쌓인 것 같았다. 피식 웃은 서지훈 총장이 엄지로 밖을 가리켰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바람도 쐴 겸.”

“아침 안 드셨어요?”

“빵 한 조각 먹었더니 배고프네.”

“어떤 거 드실래요? 오랜만에 제가 사겠습니다.”

“교직원 식당.”

“너무 소박하신 거 아닙니까?”

총장에 당선되기 전 교수 시절, 서지훈 총장은 제자들과 함께 교직원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곤 했다.

“제일 맛있는 곳은 가까운 곳이지. 그게 내 맛집 철학이다.”

“하, 알겠습니다. 가시죠.”

민우와 서지훈 총장은 대학본부에서 나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해왔다.

“아까 오신 분은 누구였어요?”

“테라소프트 대표.”

“테라소프트요?”

전혀 의외의 사람이었다.

테라소프트는 대한민국 게임계의 양대 산맥 중 하나였다. 그런 사람이 공대 학장이 아니라 총장을 만나러 왔다는 게 의외였다.

하지만 아예 접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자얀의 오일 머니가 공대에 쏟아지고 있는 상황. 상대적으로 수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쪽으로 산학협력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민우는 궁금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그 전에 이거나 봐라.”

서지훈 교수가 품에서 A4 용지 하나를 꺼냈다. 펴보니 발신인과 수신인이 들어간 팩스 공문이었다.

발신인을 확인한 민우는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총장협의회에서 보낸 공문이었다.

줄글을 읽어 가던 민우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아니…… 진짜 이렇게 공문을 보냈다고요?”

“어제 총장실로 온 팩스야. 그쪽에서 보낸 거 확인했으니 누가 장난친 건 아니다. 그게 지금 총장협의회의 입장이라는 거지.”

“말도 안 돼.”

내용은 간단했다.

다음 주에 열릴 총장협의회 임시 총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회칙에 따라 제명될 수 있다고 서면으로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명’이라는 표현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이럴 때는 보통 회칙에 따라 처리한다는 표현이 들어가니까.

“네가 전에 그랬지? 총장협의회에서는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못할 거라고. 보수적인 집단이니까. 하지만 이게 진실이다. 놈들은 배수의 진을 친 거야.”

“하…… 아니 이게 무슨 아침드라마도 아니고. 이렇게 한 방에 보낸다고요?”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인 거야. 아마 네가 한민당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게 트리거가 됐을 거다. 보수 세력들이 오래도록 대권을 잡지 못하고 있고, 총선에서도 여지없이 밀리고 있는 상황이지. 이 상황에서 협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항복이냐 투쟁이냐. 둘 중 하나지.”

민우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가장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건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열과 다툼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민우가 계획한 것은 이랬다.

명인대와 청문대가 대학 개혁을 성공시키고, 수많은 지지 세력을 확보한 뒤 서지훈 총장이 총장협의회를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우선 지금 시행하고 있는 시간강사 처우 개선안이 안정권에 들어서야 했으니까. 그리고 대학의 등록금 의존도도 많이 낮춰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정책을 시작하자마자 총장협의회에서 공세에 나섰다.

서지훈 총장의 ‘배수의 진’만큼 지금 상황을 잘 표현하는 말이 없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할걸? 아마 다른 협회에서도 나나 명인대를 공격하려고 나서겠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내가 어떻게 할 거 같아?”

그때 불현듯 어제 정연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우의 두 눈이 크게 열렸다.

“설마…… 그래서 어제 연주한테 전화하셨던 거예요?”

“맞아. 날 제명시키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 나는 내 갈 길을 갈 테니까.”

“그래도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니잖아요.”

서지훈 총장이 껄껄 웃었다.

“박민우. 내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냐?”

“그런 건 아니지만…… 좀 서두르시는 것 같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래서 오늘 뵈러 온 거고요.”

“서두르는 거 아니야. 옛날 상아대에서 너를 가르치기 전부터 계획한 일이다.”

서지훈 총장이 조용히 말했다. 민우는 소름이 돋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진지하게 말해본 적이 언제 있었나 기억나지도 않았다.

“나는 기꺼이 제명될 생각이다. 그렇게 명분을 얻어 새로운 협회를 세상에 내보일 거야.”

“제명되기를 기다리셨던 겁니까?”

“절반은 그래.”

민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감정적으로 결정한 일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면서도,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서지훈 총장의 속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지 걱정되었다.

두 사람이 교직원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서지훈 총장은 신분증을 두 번 찍어 민우의 밥값까지 계산해 주었다. 그리고 직원들과 잠시 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이 식판을 들었다.

“왜 그렇게 굳어있어?”

“아니, 전에도 말씀드린 기억이 나는데 너무 엄청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니 놀랄 수밖에 없잖아요.”

“하하하하.”

서지훈 총장이 집게를 들어 반찬을 담기 시작했다. 민우도 그 옆에 따라붙었다.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 몰라?”

“전 선생님처럼 멘탈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요.”

“엄살은.”

밥과 반찬, 그리고 국까지 모두 담은 두 사람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이야기를 나누기 편했다.

“나도 좋게좋게 풀리기를 바랐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지금 출세하려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잖냐. 대한민국 학계와 석박사들의 미래가 우리 손에 달린 거야.”

“알고 있습니다.”

“먹자고.”

두 사람이 식사를 시작했다. 밥을 먹던 민우는, 문득 질문 하나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까 테라소프트 대표님은 왜 온 거예요?”

“새로운 협회에 한발 걸치고 싶다더라. 뭐, 처음부터 협회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테라소프트에서 왜요? 제가 알기로 교육사업과는 관련이 없는 기업인데.”

대표적인 게임 개발사이자 퍼블리셔인 테라소프트에서 협회에 숟가락을 얹겠다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들이 프로야구 구단도 만들긴 했지만 민우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쪽에서도 사업만 하겠다는 생각은 아닌 거지. 나중에 대학을 인수하든, 아니면 설립하든 뭔가 방책을 세우고 있는 거야.”

“하긴, 우리나라에선 게임을 질병 취급하고 있으니까요. 기업 마케팅이 필요하긴 하겠죠.”

“거기에 기업이 대학을 운영하는 게 이상한 시대는 아니니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청문대만 해도 좋은 본보기고.”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새로운 협회는 뭐 처음엔 동아리 수준이겠지만 눈덩이를 잘 굴리다 보면 눈사태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테라소프트에선 뭘 조건으로 걸었는데요?”

“아주 어려운 조건을 걸었지.”

서지훈 총장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민우는 숟가락으로 국을 뜬 채로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호크스를 버리고 다이노스로 오라고 하더군.”

“…….”

“그래서 거절했다. 가을 야구는 못 해도 호크스를 버릴 순 없지 않겠어?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지.”

민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왔다. 양해각서 체결도 아니고 응원하는 야구팀을 바꾸라고 하다니.

서지훈 총장이 한화 호크스 팬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최근 야구장에 몇 번 갔다가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기 때문이다.

서지훈 총장이야 그렇다 쳐도, 테라소프트 대표도 정말 엉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바꾸세요. 방금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셨잖아요?”

“이건 피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인간 실존의 문제라고 할까. 상황이 어렵다고 버린다면 그건 진정한 팬이라 할 수 없지.”

“선생님도 빨리 메이저로 갈아타세요. 적어도 머리 빠질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살짝 놀란 서지훈 총장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더듬었다.

“나 좀 빠져 보이냐?”

“송 선배님이 별말씀 안 하셨어요?”

“딱히.”

“그럼 뭐 괜찮은 거겠죠.”

민우는 즐겁게 식사를 이어갔다. 서지훈 총장에게 한 방 먹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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