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26화 (426/500)

선생님,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1)

집 현관 앞에 도착한 민우는 귀를 기울였다.

어딘가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했는데, 바로 자신의 집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다들 신나있구만. 하긴,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건 오랜만이니까.’

그 바쁘다던 정연주도 오늘 온다고 했으니 휴머니티 멤버가 한자리에 모두 모인 셈이다.

민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안이 조용해지더니 모두의 시선이 현관 쪽으로 쏠렸다.

“아이고! 우리 박민우 의원님. 어서 오십시오!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오셨네!”

한진섭이 손을 흔들었다.

누추한 곳이라는 표현이 신경 쓰였지만, 한진섭과 주예린이 사는 집에 비하면 누추한 것이 맞아 대꾸하지 못했다.

자본주의란 그런 것이다.

“저녁은 먹었어요?”

이번엔 이수빈이 물었다.

“아니. 아직. 당사에서 바로 오는 길이라서.”

“뭐라도 간단히 먹지.”

“안 그래도 의원님들이 저녁 같이 먹자고 했는데 사양했어. 오랜만에 다들 모이는 자리잖아?”

“잘했어요.”

남편의 손님을 맞는 상황이라면 힘이 들 법도 한데 이수빈은 생긋 웃어 보였다.

휴머니티 멤버들은 민우의 손님이기도 했지만 이수빈의 손님이기도 했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녀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 집에 이렇게 잔뜩 모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집들이 이후로 처음일걸요?”

“그렇지?”

민우와 이수빈을 제외한 멤버가 총 8명이니, 넓은 거실도 가득 찰 지경이었다. 큰 상 위에는 보쌈과 치킨, 탕수육 같은 배달 음식이 잔뜩 깔려 있었다.

벌써 반주를 걸치고 있는지 소주병과 맥주캔도 널려 있었다.

그래도 너무 늦게 도착한 건 아닌 것 같다.

“위촉식 잘 봤어요.”

이번엔 정연주가 말을 걸어왔다. 민우는 겉옷을 벗어 한쪽에 던져두곤 이수빈의 옆에 앉았다.

“사람 부끄럽게 왜 그래. 기자회견도 봤어?”

“그럼요. 다 같이 모여서 봤어요. 다 좋았지만 특히 그 말이 인상적이더라구요. 명인대는 다른 대학과 경쟁하고 있다는 말…… 저도 지지 않도록 분발해야겠어요.”

“야, 그러지 마. 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무섭잖아.”

“뭐가 무서워요? 타치카와 선생님의 마음도 사로잡으셨으면서.”

지나가듯 나온 정연주의 말에 민우가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따르던 맥주가 흘러넘칠 뻔했다.

“설마 청문대에서도 오퍼 넣은 거야?”

“네. 맞아요.”

“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구나.”

민우는 놀랐지만 주변에 있던 멤버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말 그대로 거물끼리 경쟁이 붙은 거니까.

명인대의 전통적인 라이벌이라고 한다면 한일대를 떠올린다.

하지만 국립대라는 한계가 명확했고, 투자에 인색해졌다. 한일대가 주춤하는 사이 청문대가 상당히 치고 올라온 상황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현질’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오해는 마세요. 고의는 아니었으니까요. 이미 청문대에서는 1년 전부터 타치카와 선생님을 영입 순위에 두고 있었어요. 준비를 다 끝내고 오퍼를 넣었는데 공교롭게도 오빠가 움직이던 바로 그때였어요.”

“이야,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만 더 빨랐더라도 청문대로 모셔올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연구소도 설립해드린다고 했는데 정중히 거절하셨어요.”

민우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름을 딴 연구소를 설립해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타치카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와는 평소에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의 저서를 몇 번 읽어본 게 전부였다. 일본에 가서 만난 것이 실제로 처음 본 것이었으니까.

청문대, 그것도 정연주가 직접 나섰다면 더 좋은 조건을 받았을 텐데 약속을 지켜준 것이다.

내일 전화라도 한 통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전화로는 부족하지.

호텔로 찾아가서 식사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까 인터뷰에서 경쟁이라는 말이 나오니 정신이 확 들더라구요. 그래서 앞으로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요즘 좀 느슨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뭔가 내가 말실수한 것 같은 느낌이네.”

“그럴지도요?”

정연주가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민우는 피식 웃었다. 앞으로 더욱 힘들어지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진섭이 대뜸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연주 네가 느슨해진 거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 다 반성해야 하지 않나? 우리 중에 제일 열심히 사는 사람이잖아. 그러니 앞으로도 우리 박 선생 많이 괴롭히라고. 기대하겠어!”

“반성?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진섭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신용이 안 가지. 명인대의 한량 아니었냐?”

“내가 왜 한량이야?”

“인문계 교수가 서술형보다 객관식 시험이 편하다고 하면 끝장 본 거지 뭐야.”

시험 기간 때면 맨날 찾아와 빈둥거렸던 것을 빗대어 한 말이었다.

그런 농담을 하면서도, 민우는 정연주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환한 미소 속에서는 조금의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정연주의 입장에서 데려올 사람은 무궁무진했다.

그것은 단순히 재력과 지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대의 문제다.

수천 년간 득세하던 철학의 시대가 저물고 과학기술의 시대가 찾아왔다. 대학이라고 해서 그 흐름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문학만 팠지만 연주는 다르지.’

정연주는 프랑스문학과 물리학을 동시에 전공했다. 거기에 과학고 출신이다. 그래서 문과든 이과든 계열과 관계없이 인재를 영입할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경영자로서 굉장히 큰 메리트로 작용했다.

최근 기업의 임원 자리를 공학계열 출신들이 많이 채우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증거다.

‘나도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되겠어. 한 우물만 파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니까.’

이래서 민우는 휴머니티가 좋았다.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관계였으니까.

궁지에 몰린 한진섭이 잔을 들었다.

“자자, 네거티브는 그만하고 다들 오랜만에 모였는데 건배는 해야지?”

“좋죠.”

“우리 박 선생의 성공적인 정계 입문을 기념하며, 건배!”

다들 잔을 부딪쳤다. 한참 배가 부르기 시작한 주예린은 대신 주스를 마셨다.

잔이 부딪치고, 이수빈이 넌지시 물었다.

“아들이야 딸이야?”

얼마 전에 검진을 받고 온다고 들었다. 요즘은 태아감별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의사들이 정확히 말해주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경우가 많다.

“고추 농사 잘 지어질 거 같대.”

“아들이구나?”

“하, 딸이었음 좋았을 텐데…….”

주예린이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러더니 한진섭에게 눈치를 준다.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던 한진섭이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왜 그런 식으로 봐?”

“누구를 보니 아들은 쓸모가 없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차라리 윤아처럼 귀여운 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게 무슨 서운한 소리야?”

“찔리는 거 있어? 당신이라곤 안 했는데.”

“아니…… 딸 낳고 싶으면 하나 더 낳으면 되지 왜 또 시비야.”

“니가 낳냐?”

당사자 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연애할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지지 않는 게 하나 있다면 두 사람의 티키타카다.

한참 근황을 나누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민우의 위촉식으로 흘러갔다.

“오빠는 정말 정치랑은 안 어울릴 거 같았는데, 막상 생중계로 보니까 정치도 잘할 거 같더라. 난처한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멋지게 대답하고…….”

민우를 바라보는 이수빈의 눈에 애정이 가득 찼다. 민우가 보쌈을 집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했다.

“다 이유가 있지.”

“뭔데요?”

“화면 잘 받는 얼굴이라서.”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민우는 농담하기도 힘든 세상이라며 혀를 찼다.

“그런데 정말 자문위원으로 끝낼 생각은 아닌 거지? 한민당 고인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 같은데.”

모두가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었다. 총대를 멘 것은 한진섭이었다.

“글쎄? 어떻게 될지는 그때 가 봐야 알겠지. 확실히 정해진 건 없어. 아직 자문위원 일 시작도 안 했다고.”

“우리 사이에 너무 말 아끼는 거 아니냐? 벌써 언론에선 포석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는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는 말도 있잖아.”

“그거 연기 아니야. 먼지야. 굴뚝 청소라도 하나 보네.”

“아 쫌! 사람 진지하게 묻고 있구만.”

민우는 대선과 관련한 이야기는 이수빈과 서지훈 총장에게만 한 상황이다.

앞으로도 다른 멤버들에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대선’이라는 단어는 그 무게 자체가 다르다.

자신만 피해를 보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여기엔 김강현 의원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얽혀 있으니 조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뭔가 결정되면 내가 어련히 이야기 안 하겠어? 재촉하지 마시고 얌전히들 기다리십쇼. 문학상 만들어질 때 그랬던 것처럼 중대발표할 날이 오겠지.”

“쳇. 알았다. 치사해서 안 물어봐.”

“누가 치사하다는 거냐.”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한진섭이 민우의 팔을 툭 쳤다.

“그래도 이번엔 진짜 개쩔었어! 대리만족이 확 느껴지더라고. 사람들이 명인대에서 이런 정책을 밀 줄 생각이나 했겠어?”

“믿을 수 없지만 내가 아는 강사들이 다들 민우 칭찬만 하고 있어. 한일대도 난리가 났다.”

이번엔 서강일이 받았다. 한진섭이 물었다.

“아직 그쪽은 뭐 달라진 거 없지 않나?”

“그래도 명인대에서 움직여 주니까 희망이 생기는 거지. 어디 구석에 있는 작은 대학에서 하는 건 큰 의미가 없잖아. 뭐, 명인대가 대한민국 최고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명문대에서 발 벗고 나서니까 다들 기대하고 있는 거 같네.”

“존심 쩌네 진짜. 이젠 좀 인정해라! 한일대 한물갔잖아? 우리 명인대가 대세지~”

그렇게 으스댄 한진섭이 닭다리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강민희가 먼저 낚아챘다. 한진섭이 어이없다는 듯 강민희를 째려보았다.

잠시 잊고 있었다. 서강일은 물론 강민희도 한일대 성골이라는 것을.

“근데 다른 학교 반응이 그 정도면 명인대 난리 난 거 아니냐?”

“적어도 교무처는 그래. 추가 모집은 없는지 물어보는 전화만 하루에 30통 이상은 와. 아직 체크는 안 해봤는데 이메일은 더 많이 쌓였을걸?”

“크, 우리 처장님 힘드시겠구만.”

한진섭이 닭다리 대신 가슴살을 집었다. 그리고 민우가 답했다.

“당장 전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이대로 몇 년만 버티면 분명 달라지는 게 있을 거야. 우리가 하려는 일이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걸 하나둘 깨닫게 되겠지. 그러면 세상이 변할 거야.”

민우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것은 다른 멤버는 물론, 민우와 서지훈 총장을 지지하고 있는 수많은 시간강사들의 염원이기도 했다.

그때 뭔가 떠올랐다는 듯 정연주가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서지훈 선생님께 연락 왔었어요.”

“왜?”

“협회 하나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하시던데요? 새교육협의회였던가?”

뭐야. 그거 농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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