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布石) (2)
자문위원 위촉식이 진행되기 전 당 대표인 김보승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자문위원 위촉 배경과 당의 목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우리 한민당에서는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오늘 박민우 교수를 고등교육분과 자문위원으로 위촉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지키기에 급급한 것이 아닌, 반성과 성찰을 통해 더욱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민우는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 김보승 대표의 발언을 경청했다.
김보승 대표는 거대 여당으로서 가져야 하는 책임 의식을 강조하며 앞으로 교육계의 요청에 더욱 귀를 기울이겠다고 다짐하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연설이었다. 당 대표를 맡을 만한 관록이 느껴졌다.
이어서 바로 자문위원 위촉식이 진행되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민우가 단상 앞으로 나갔다. 꽃다발이나 선물 같은 건 없었다. 고급스러운 케이스에 담긴 위촉장을 받고 악수를 나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박 위원.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
“누가 누굴 가르칩니까. 저희가 많이 배워야지요.”
훈훈한 덕담이 오갔다.
악수를 끝낸 김보승 대표는 민우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민우는 위촉장을 기자들 앞에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민우는 온몸으로 플래시를 받으며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조금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먼 훗날 누군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 이 순간을 언급해 주기를 바랐다.
사진 촬영이 끝나고 김보승 대표가 앞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감 한마디 하라는 의미였다.
민우가 마이크 앞에 섰다.
카메라의 셔터음이 김보승 대표가 발언할 때보다 배는 더욱 크게 들리는 듯했다.
“먼저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한민당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앞선 자리에서 김보승 대표께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고등교육은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상황에서 정부가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제가 가진 지식과 조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민우는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위촉식이 끝나고 나면 바로 기자회견에 들어갈 테니까. 진짜 이야기는 그때 하면 된다.
민우의 가슴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학회가 아니다. 모든 경험이 민우에게는 생소한 것들이었다. 아마 상상하지 못한 질문들이 많이 쏟아질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명인대에서 아무런 일도 없었더라면…… 서지훈 선생님이 총장 선거에서 낙선하고 새 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관심이 몰렸을까?’
민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자들에게 있어 오늘 위촉식은 사학계의 큰 이슈와 정계의 큰 이슈를 맛깔나게 버무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일 것이다.
‘박민우. 정신 바짝 차리자.’
어느새 민우의 두 눈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푸른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와 눈이 마주쳤다.
박윤지 기자는 살짝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두 눈에 담긴 걱정을 읽지 못할 정도로 민우는 둔하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은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다. 거대한 흐름을 이끄는 리더와 그것을 펜으로 세상에 널리 알릴 사명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민우가 가려는 길은 외롭고 고달픈 길이다. 박윤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잔한 미소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민우에게 동정은 필요 없었다.
지금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타인의 동정이 아니라 자신의 직관일 뿐이었다.
“지금부터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본 행사의 취지에 맞게 고등교육 분야의 정책과 관련된 질문만 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타 분야 정책 현안에 대해서는 따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아나운서 출신인 당 대변인이 직접 사회를 맡았다. 그는 수려한 외모와 정직한 말솜씨로 무대를 장악했다.
곧 기자들이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대변인이 지목하자 기자가 자신의 신분을 먼저 밝히고 질문을 시작했다.
“먼저 김보승 대표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모두발언에서 반성과 성찰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현 여당의 수장으로서 현재 어떤 정책에 책임감을 느끼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과연 정치부 기자다운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김보승 대표를 비롯해 다른 핵심 의원들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이런 것은 그들에겐 일상이었다.
“박민우 교수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현재 고등교육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강사법 때문입니다.”
김보승 대표는 돌직구를 던졌다. 기자들이 숨을 죽이며 그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2011년 발의되어 국회를 통과한 직후부터 진통을 겪었습니다. 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시간강사들을 사지로 내몰 수 있다는 여론이 있었지요.”
실제로 고등교육법 개정안, 속칭 ‘강사법’은 2012년 12월 1차 유예를 시작으로 2013년 2차 유예, 2015년 3차 유예 등 지속적인 유예의 길을 걸어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강사법은 오랜 회의를 거쳐 2019년 8월 1일 전격 시행되었다.
강사법 시행 전부터 여러 언론과 단체에서는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학 측에서 강사를 대거 해고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수많은 대학에서 전임교원과 계약직 교원의 책임 시수를 늘려 시간강사가 설 자리를 줄여버린 것이다.
그 과정을 알기에, 김보승 대표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 대표로서, 그러한 비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은 부분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도 드리고 싶군요. 정책은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때로는 민심이 반영되기도 하지요. 그 근본은 사람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저도 실수를 많이 하고요. 중요한 것은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과 성찰을 하는 것인가. 그런 맥락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추가 질문은 없었다.
이어 다른 기자가 발언권을 잡았다.
“박민우 위원님께 질문드립니다. 최근 명인대에서 시간강사 처우 개선에 관한 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번에 자문위원직을 수락하신 것은 명인대의 정책을 가져와 법제화하려는 것이 아닌지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민우는 단칼에 잘랐다. 질문에 함정이 섞여 있음을 단번에 간파한 것이다.
“저는 자문위원이지 국회의원이 아닙니다. 행정가도 아니고요. 법제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저는 당의 요청이 있을 때 조언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자문위원직을 받아들인 것은 정계 입문의 포석이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민우는 씨익 웃었다.
문득 휴머니티 멤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밤 집으로 몰려온다고 했는데, 아마 지금쯤 무투브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겠지.
사전 포석이라는 이야기는 워낙 톡으로 많이 받은 터라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대학마다 저마다의 사정이란 게 있습니다. 명인대도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면서 여러 잡음이 있었죠. 새로운 정책이 옳았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계에 입문하는 것은 과욕이라고 봅니다.”
“한마디로 당분간 정계에 입문하는 일은 없다 이겁니까?”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정부와 당에서 수많은 오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물리치고 자문위원직을 수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으로 민우는 답변을 끝냈다. 모호한 답변이었지만 추가 질문은 없었다.
궁금증이 풀려서가 아니라, 민우의 정계 입문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우의 답변은 ‘아직은 계획이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정도로 해석되었다.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대학정책협의회, 총장협의회 등 여러 단체들이 명인대의 새로운 정책에 대해 반발하는 상황인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이 명인대로 기우는 듯했다.
생산적인 질문은 아니었다. 당의 전략과 방침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를 보던 대변인이 질문을 끊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민우가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대학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습니다. 아마 다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책 시행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는데요.”
“그것도 진지하게 들을 만한 이야깁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만약 명인대가 협회의 협상 테이블로 나갔다면 새로운 정책은 여전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민우는 우회적으로 단체들의 이기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옆에 있던 김강현 의원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고 있다.
“평소보다 더 과감한 결단과 추진력을 발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양해의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하지만…….”
민우는 잠시 말을 골랐다.
행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민우에게 집중되었다. 비판적인 어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네요. 우리는 미래가치에 투자하고 있는 겁니다. 즉, 다른 대학들과 경쟁하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 상황에서 협의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아마 그건 협의가 아니라 담합이 될 겁니다.”
‘담합’이라는 거친 표현에 기자들의 손이 빨라졌다.
잠시 질문이 끊기자 대변인이 당부했다.
“이후로 명인대 관련 질문은 삼가시고, 당의 정책과 비전에 대한 질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후로 나오는 질문들은 뻔한 것들이었다. 민우는 성공적으로 기자회견을 마치고 회의실을 나설 수 있었다.
당 관계자들이 민우와 악수를 나누고 격려했다.
“인상적인 데뷔였습니다. 오늘을 기념하는 취지로 같이 저녁 식사나 하시지요.”
김보승 대표가 민우에게 제안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요.”
“이런. 아쉽군요. 그럼 김 의원께서 배웅을 좀 해주시지요.”
“예.”
“박 교수. 또 봅시다.”
김보승 대표와 다른 의원들이 먼저 자리를 떴다. 복도엔 민우와 김강현 의원만 남았다.
“수고했습니다.”
“의원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 것 같습디다. 전혀 밀리지 않더군요. 정치부 기자들도 백 년 묵은 능구렁이들인데 말이지요.”
김강현 의원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그럴 필요 없음에도 주차장까지 민우를 배웅했다.
“긴장해서 말실수하지 않았나 걱정되네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납니다. 집에 가서 녹화본을 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말실수는 무슨. 당차고 좋더군요. 그래서 정계에도 젊은 사람들이 필요한 법이지요.”
“의원님.”
“아, 이거 실례. 박 교수님은 아직 정계 사람이 아니지요. 제가 착각했습니다. 하하하.”
과연 그게 착각이었을까.
레아는 차를 출입문에 세워두곤 공손한 자세로 민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선 민우는 김강현 의원과 악수한 뒤 차에 올랐다.
“고생하셨어요. 피곤하시죠?”
“이제 집에 가면 더 피곤해지겠죠.”
한숨을 내쉰 민우는 안전벨트를 채웠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손님을 맞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