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24화 (424/500)

포석(布石) (1)

다사다난했던 여름방학이 지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명인대 캠퍼스는 사람들로 북적여 활기가 넘쳤다. 날씨는 여전히 후텁지근했지만, 학생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며 캠퍼스를 거닐었다.

덕분에 이수빈도, 한진섭도 주예린도 연락이 뜸할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강의를 맡은 서강일도 마찬가지였다.

한일대 출신이라는, 조금 민감한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던 서강일이지만 첫 강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명인대 학생들은 라이벌 캠퍼스에서 온 젊은 교수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동료들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민우는 오늘 캠퍼스에 나갈 수 없었다.

바로 집권당인 한민당 당사에서 자문위원 위촉식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임명장을 전달하고 대표와 악수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번 자문위원 위촉 건을 민우의 정계 진출의 포석이라고 해석했다.

때문에 대한민국 언론, 심지어 해외의 메이저 언론에서도 민우의 자문위원 위촉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정치권에서는 말 그대로 ‘수퍼 루키’가 등장하는 셈이었으니까.

‘이거 은근 긴장된단 말이지.’

레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며 민우는 넥타이를 고쳐매었다. 입이 바싹 말랐다. 그래서인지 생수병에 손이 자주 갔다.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기자들은 대부분 문화부 쪽 기자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정치부 기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의 내공은 무시할 수 없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요즘 기자들 편집실력이 장난이 아니니까.’

그나마 한편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자문위원 위촉식이 무투브 스트리밍으로 생중계된다는 것이었다.

기사로만 나간다면 편집의 위험을 피할 수 없지만, 생중계되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긴장되시는 모양이네요.”

레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덕분에 민우는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와 차분해졌다.

“대학이나 강단에 서는 건 익숙해서 편한데 이런 건 처음이라서요. 엄청 긴장되네요.”

“저도 처음엔 놀랐어요. 잘못 들은 건가 싶을 정도로요. 아무리 정계에 진출하는 게 아니라고 하셔도 처음으로 협력하시는 거잖아요?”

레아는 민우의 개인 비서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얼마나 민우에게 많은 러브콜을 보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중간에서 조율자 역할을 해야 하니까.

지금까지는 모든 요청을 단번에 거절해왔다.

굳이 민우에게 전달할 것 없이, 레아가 자체적으로 자른 청탁들도 많았다. 애초에 민우가 그렇게 지시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민우는 김강현 의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민당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한민당으로서는 젊은 피를 수혈받는 느낌일 것이다.

“제임스 사장님도 엄청 놀라더라고요. 아니, 놀랐다기보다는 재밌어했다고 해야 하나.”

이어 그가 화상 회의에서 ‘언빌리버블’을 연신 외쳤다고 전했다.

민우는 피식 웃었다. 이야기만 전해 듣는 것으로 제임스 사장의 표정이 빤히 보였으니까.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요?”

“다행히도 딱히 없었습니다.”

“아 맞다. 타치카와 선생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타치카와 유지는 명인대 임용 1차 서류전형에서 최고점을 받아 학장 면접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머물 곳을 찾아야 하는데, 레아에게 따로 부탁해 놓았다.

역사학과에서는 이미 타치카와 교수를 임용 후보자로 낙점한 상황이다. 한일관계에 정통한 사람도 많지 않은데, 거기에 독도 문제까지 얹으니 뽑을 사람이 그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핏 들으니 역사학과에서 ‘독도 연구소’를 설치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었다.

연구소 설립은 단순히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투자는 물론 정부 지원까지 받을 수 있으니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된다.

“일단 당분간은 호텔에 머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임용이 확정된다면 교직원 숙소에 입주할 수 있으니까요.”

“잘하셨어요.”

민우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명인대는 근처에 아파트를 구입해 교직원들에게 숙소로 제공하고 있었다. 학군도 나쁘지 않아서 자녀를 걱정하고 있는 타치카와에겐 좋은 옵션이 될 것이다.

“혹시 일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 그 경우도 대비해 놓았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이 잘못될 것 같나요?”

“저는 타치카와 씨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그리고 매니저님처럼 사람을 잘 보는 것도 아니고요.”

“아닙니다. 레아 씨도 사람 잘 봐요.”

“그런가요?”

“저와 오래 일하셨잖아요. 그게 사람 잘 본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민우는 농담으로 말했지만 레아는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최근 청문대를 비롯해 몇몇 대학에서 타치카와에게 오퍼를 보내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다른 대학이야 그렇다 쳐도, 청문대가 나선다는 소문은 민우를 살짝 긴장하게 했다.

청문대는 대한그룹이라는 엄청난 모기업을 등에 업고 있었고, 그 수장은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정연주다.

대학원 시절 처음 만났을 때는 순진한 이미지였지만, 교육행정가로 탈바꿈한 이후로는 완전히 달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욕심은 민우 이상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굳이 타치카와에게 찾아가 의리를 강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가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한들 비난할 생각도 없었다. 민우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에게 ‘박민우 문학상’을 수여하는 거니까.

다른 대학으로 간다고 해도 국내에만 머물고 있다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무엇보다도 타치카와 본인도 의리와 인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 민우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뭐, 지금은 기자회견 건만 생각하자고요. 너무 생각을 많이 하면 빨리 늙으니까. 건강에 해롭습니다. 오래오래 살아야죠.”

“알겠습니다.”

곧 차가 한민당 당사에 도착했다. 이미 주차장 입구부터 기자들이 쫙 깔려 있었다.

민우는 대한민국 언론이 얼마나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피부로 확 느낄 수 있었다.

‘이야…… 평소보다 한 세 배는 모인 것 같은데?’

대학과 학계 관련해서 기자들을 초청할 때와는 차이가 상당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민우는 표정을 풀었고, 곧 차가 멈춰서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던 한민당 직원이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 직원은 민우가 당연히 뒷좌석에 타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민우는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래서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그래도 조수석과 뒷자리가 동시에 열리는 해프닝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박민우 교수님.”

“반갑습니다.”

“다음부터는 제가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대표님께서 잘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직원이 조심스레 말했다. 오가는 대화는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었다.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히려 그러면 더더욱 제 손으로 문을 열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예?”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기왕 남의 눈을 신경 쓰는 거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우가 미소를 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직원이 안으로 안내했다.

찰칵! 찰칵찰칵!

엄청난 셔터음이 들렸다.

민우는 기자들을 향해 손을 들며 웃어준 뒤 당사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안에서 기자회견도 예정되어 있었고, 당사 직원들이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우에게 달라붙는 기자들은 없었다.

거리를 떨어뜨린 채 좋은 사진을 건지기 위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댈 뿐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한민당 대표인 김보승과 여러 의원들이 복도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엔 당연히 김강현 의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보승은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지는 않지만, 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쳤고 경험도 많아 인지도가 상당한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민우 교수.”

“너무 늦게 인사드렸네요.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김보승은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최근에 건강이상설이 나온 적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고, 나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지나가는 감기 같은 거지요.”

“건강 조심하십시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박 교수가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오셨으니 10년은 젊어진 것 같군요.”

“하하하!”

주변에 있던 의원들도 동조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총선에서 승리했던 것처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엔 김강현 의원이 나섰다.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의원님.”

민우는 김강현 의원과 굳게 악수했다. 김강현은 잠시 민우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김보승을 포함한 모든 의원들을 회의실로 보냈다.

그 장면을 보니, 김보승은 표면적인 대표일 뿐이고 실권은 김강현 의원이 꽉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자들이 참 많이 왔지요?”

“그러게요. 저도 그쪽으로는 나름 잔뼈가 굵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스케일이 좀 다른 것 같네요. 전국에 있는 모든 언론사들이 모인 느낌입니다.”

“정치가 그런 겁니다. 밥줄의 문제거든요.”

의미심장하게 웃은 김강현은 조금 틀어진 민우의 옷깃을 손수 바로잡아 주었다.

“위촉식에 들어가기 전에 꼭 해줄 말이 있습니다.”

김강현 의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민우는 이어질 그의 말에 집중했다.

“박 교수께서는 오늘 행사가 자문위원 위촉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래서는 곤란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특히 언론인들은 말이지요. 그들의 입장에서 오늘 위촉식은 박 교수님이 정계에 데뷔하는 첫 무대인 겁니다. 박 교수님이 그저 자문위원일 뿐이다, 정치 입문과는 상관없다. 이런 말을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민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김강현 의원의 조언이 계속되었다.

“정치부 기자들은 세 부류로 나뉩니다. 여당 편이거나, 야당 편이거나, 아니면 회색인이거나. 즉 우리 편보다 적이 훨씬 많은 거지요.”

“감사한 말씀이긴 한데…… 처음부터 엄청나게 부담을 주시는데요?”

“하하하. 부담이라뇨. 뭐, 박 교수께서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노파심에 한마디 한 거니 너무 마음 쓰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닙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회견장에는 대표님도 나가시고 저도 나갈 겁니다. 우리 당 대변인도 있고요. 행사의 주도권은 우리가 쥐고 있으니 다급하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아시겠지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가십시다.”

김강현 의원이 앞장섰고, 곧 민우는 위촉식이 열리는 회의실로 들어섰다.

단상은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위쪽엔 ‘한민당 정책자문위원 위촉식’이라는 그럴듯한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민우는 주변을 살피곤 김강현 의원에게 물었다.

“다른 자문위원분들도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오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는 사람은 박 교수님뿐입니다. 오로지 박 교수님을 위해 준비한 자리라고 할까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김강현 의원이 단상 쪽의 자리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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