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23화 (423/500)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 (3)

다음 날, 민우는 여러 소식을 들고 서지훈 총장을 찾아갔다.

민우가 정계에 입문했다는, 조금 과장된 소식을 들은 휴머니티 멤버들과는 달리 서지훈 총장은 자기 일을 하며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총장실에 도착한 민우가 비서에게 물었다.

“총장님 좀 뵈려고 왔는데요. 안에 계실까요? 중요한 일로 찾아왔습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안 그래도 총장님께서 교수님 오시면 안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들어가셔도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참고로 안에 재무과장이 와 있습니다.”

“재무과장이요?”

비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교수라면 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비서는 늘 민우에게 협조적이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커피 한잔 대접할게요.”

“괜찮아요. 제 일인데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비서의 말대로 재무과장이 안에 있었다. 최측근이라는 것을 과시할 수 있었지만, 민우는 정석대로 행동했다.

“총장님. 업무 중이시면 밖에서 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니. 마침 잘 왔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재무과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민우에게 묵례했다. 반면 민우는 반갑게 인사했다.

“요즘 새 정책 때문에 많이 바쁘시죠?”

“바쁘기야 하지만 소화할 만합니다. 정신없는 거야 교무처도 마찬가지겠지요. 요즘 야근도 불사하신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재무과는 ‘처’로 승격되지 못한 소규모 집단이다. 처장급 교수도 없고 실무 직원들만 있다. 그래도 대학 재정을 담당하는 곳이라 우습게 볼 순 없다.

그래서 처장급 교수임에도 민우가 성대영 과장에게 격식을 차린 것이다.

물론 서지훈 총장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의도가 제일 컸지만.

최측근이랍시고 예의도 없이 안에서 휘젓고 다니는 꼴을 보고 좋아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박 교수 오기 전에 새 정책 예산 집행이 문제없이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두 분 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민우가 성대영 과장을 추켜세우며 답했다. 하지만 본인은 공과에 큰 관심이 없는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서지훈 총장이 성대영 과장의 어깨를 다독였다.

“조만간 자리를 마련할 테니 셋이서 오붓하게 반주나 합시다. 바쁜 건 알지만 사양하지 않았으면 하네요. 새파랗게 어린 열혈 처장 덕분에 성 과장님이 고생 좀 하지 않았습니까? 한잔 얻어 마셔야지요.”

“좋습니다.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곧 연락하지요. 이만 나가 보세요.”

꾸벅 인사한 성대영 과장이 민우에게도 예를 차리고 밖으로 나갔다.

안 그래도 성대영 과장과 따로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서지훈 총장이 알아서 자리를 마련해주니 한결 부담을 덜었다.

“비서가 귀띔 안 해줬으면 실례할 뻔했어요.”

“강 비서가 이야기해줬어?”

“예. 안에 재무과장 들어가 있다고.”

“역시 인복은 많구만. 아니, 여복이 많은 건가?”

서지훈 총장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민우가 어떤 소식을 가져왔는지 먼저 확인해야 할 때였다.

“어땠어?”

“어땠을 거 같아요?”

“박민우 많이 컸다. 예전에는 바로 보고하곤 했는데 말이지.”

“일이 잘 안 풀렸으면 이런 농담도 안 하죠. 우리가 예상했던 가장 좋은 시나리오로 일이 마무리됐습니다. 김강현 의원님께서 도와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역시! 너라면 해낼 줄 알았지.”

서지훈 총장은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가장 궁금한 것을 해결한 그는 민우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는 민우의 표정은 개운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찝찝한 표정이야?”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내 귀를 막으면 너한테도 별로 안 좋지 않을까?”

맞는 말이었다.

지금 서지훈 총장은 교수가 아니다. 명문 사립대의 수장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맡은 상황이다.

민우는 김강현 의원에게 들었던, 총장협의회의 움직임과 관련한 모든 이야기를 그에게 전했다.

“그랬군.”

삐딱하게 다리를 꼰 서지훈 총장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다.

“노친네들 움직임 하나는 빠르네. 뒤통수를 쳐도 한 번은 부르고 나서 칠 줄 알았드만.”

“연주도 전에 와서 이야기했었고…… 김강현 의원까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상당히 일이 진척되었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다고 생각해요.”

“왜?”

“제명은 너무 감정적인 대응이라고 봅니다. 총장협의회 설립 이후로 한 번도 없던 일 아닙니까? 괜한 선례를 만드는 건 보수적인 단체에서 잘 하지 않는 일이잖아요.”

서지훈 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는 제명이라는 키워드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애초에 마음에 들지 않는 단체였으니까. 뭐, 내쫓으라 그래! 정연주 이사장 꼬셔서 새로운 협회 하나 만들면 그만이지. 새교육협의회. 어때?”

“선생님은 참 엄청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게 부러워요.”

“나이를 먹으면 지혜로워지는 게 아니야. 뻔뻔해지는 거지. 너도 나이 먹어보면 알 거다.”

“하하하하.”

이어지는 질문은 없었다. 서지훈 총장은 어제 이수빈이 보낸 엄청난 톡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미리 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뭐야, 또 있어?”

“김강현 의원님이 차기 대선 캠프에 자문위원으로 참가해 달라고 권유했습니다. 정확히는 고등교육 정책자문역이네요.”

“수락했어?”

“예.”

서지훈 총장이 감탄을 흘렸다.

“뭐야.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하겠다고 한 거야? 너 정치판 싫어했잖아.”

“다 아시잖아요. 제가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

“마치 내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능청스럽게 대꾸한 서지훈 총장은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했다. 결정하기 어려웠을 텐데 용기를 냈구나.”

“열심히 해 봐야죠. 이것도 저에게는 새로운 기회일 테니까요.”

“예전부터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젠 해도 꼰대 소리 안 들을 거 같으니 한마디 하마.”

“오, 드디어 비급을 전수해 주시는 겁니까?”

싱겁게 웃은 서지훈 총장이 답했다.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나치게 맑으면 따르는 사람이 없다. 이 고사, 알고 있나?”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말 아닙니까?”

“학부 때 졸지는 않았군.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야. 네가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걸 굳이 남에게 증명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 봐라.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인 것을.”

“이러다 절로 들어가시겠어요.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가. 그런데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이라니…… 댁에서 송 선배한테도 그러십니까?”

“이 녀석이?”

두 사제는 오랜만에 마음을 터놓고 웃었다.

이번 조언은 한발 늦었다.

이미 민우도 결론을 내놓은 것이니까.

“그럼 김 의원 쪽 일이 잘 풀리면 너도 언젠가 대학을 떠나게 될 수도 있겠구나.”

“완전히 떠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계획한 바를 모두 이루면 다시 돌아와야죠.”

“민재한테는 잘 이야기해라. 두 번은 버려도 세 번은 좀 곤란하지 않겠냐?”

“그래야죠.”

웃긴 했지만 민우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민재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오셨어요?”

차민재는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석사 1학기를 끝낸 그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하루하루 쑥쑥 자라고 있었다.

“2학기엔 누구 수업 듣냐?”

“이수빈 선생님, 강예진 선생님, 주예린 선생님 수업 듣습니다.”

“뭐야. 여자 교수님들 수업만 골라 들어?”

“네?”

차민재가 벙 찐 표정을 짓자 민우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인마. 부럽네. 아주 그냥 꽃밭에서 수업 듣겠어.”

“가시에 찔리면 파상풍으로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가시? 강 선생님 말하는 거지? 고대로 전해줄게.”

“아…… 살려주세요.”

현대서사학회 총무간사 일을 하면서 차민재는 강예진과 부쩍 가까워졌다. 이번에 대학원 수업을 하나 맡는다고 들었는데 석사과정 강의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주 선생 강의는 왜 들어? 다른 과 수업이잖아.”

“얼마 전에 주예린 선생님께 논문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웹소설 관련 논문이요.”

“그런 일이 있었어?”

“전에 연구실에 오셨을 때 요즘 뭐 쓴 거 없냐고 물어보셔서…….”

민우는 혀를 찼다. 문창과 제자들 글 첨삭이나 잘해줄 것이지.

“아무튼, 이쪽으로 제대로 연구하고 싶으면 수업 들으라고 하시더라고요. 학점 인정도 되니까 괜찮을 거 같아서 수강 신청했습니다.”

“잘했네.”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 국문과와 문창과를 통틀어서 웹콘텐츠 분야에 정통한 사람은 주예린밖에 없다. 필요한 자료가 있다면 당당하게 출판사에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거다.

“확실히 테마 잘 잡았어. 웹소설 산업도 날로 성장하고 있고 연구도 많이 되고 있으니 이 기회에 많이 배워라.”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도 많이 도와주셔야죠?”

“왜. 또 도망갈까 봐 불안해?”

“그런 건 아니지만…….”

“앉아라.”

두 사람이 마주했다. 민우는 길게 끌 거 없이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갑작스럽게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내가 당분간 대학을 떠나 있을 수도 있을 거 같다. 지금은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없지만 내 나름대로 좀 큰일을 해보려고 해.”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뭐야. 그 쿨한 반응은. 예상했었냐?”

“아무래도 요즘 우리 대학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고…… 선생님 정도 되시는 분이 대학에만 계실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저나 제 후배들 앞길 생각해 주셔서 그러시는 거잖아요?”

차민재는 수제자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민우의 의도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지. 너 석사논문 도장은 내가 꼭 찍어줄 테니 너무 걱정은 말고.”

“전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을 어떻게 안 써? 총장님도 한 말씀 하시더라. 두 번은 그래도 세 번은 아니지 않냐고.”

“저 주목받고 있는 겁니까?”

“그래. 기뻐해도 돼!”

민우는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게 연구비만큼 대학원생의 의욕을 자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모른다. 지나가듯 던진 칭찬 한마디에 한 학기를 버틸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너 석사 졸업하고 박사 들어올 때는 지도를 이수빈 선생에게 맡길까 싶은데. 어때?”

민우가 말을 이었다. 차민재는 살짝 놀랐다.

“선생님께서 절 받아주실까요?”

“이미 이야기 끝났어. 너만 오케이하면 돼.”

차민재는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저야 영광이죠. 시간 되면 평론도 좀 배워보고 싶었는데 제대로 배울 수 있겠어요.”

“그래. 나같이 못난 선생한테는 배울 게 없겠지.”

“이야…… 선생님도 질투를 다 하시네요.”

“아니야. 나도 부러워서 그래. 노벨상은 받았어도 평론으로 등단은 못 했거든. 나도 늦기 전에 신춘문예에 원고 좀 보내봐야 하나?”

자책인지 자랑인지 모를 지도교수의 한마디에 차민재는 그저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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