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22화 (422/500)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 (2)

“좋습니다. 의원님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민우의 말이 묵직하게 울렸다.

선택에 후회는 없다.

이것은 도박이 아니다. 변화이자 진일보다.

서지훈은 교수직에서 물러나 총장직에 앉는 것으로 그 말을 실천해 보였다.

민우는 대학에 계속 투신한다고 모든 일이 뜻대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붙잡기로 했다.

당연히 김강현 의원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 박 교수님. 이건 좀 뜻밖인데…… 농담은 아니시겠지요?”

김강현 의원의 표정이 환해졌다. 처음으로 민우가 긍정적인 대답을 준 것이었다.

“진심입니다. 대단한 것 없는 제가 계속 거절하는 건 좀 보기 그렇잖아요. 의원님께서도 저와 서지훈 총장님을 위해 물심양면 도와주시는데 제가 가만히 있는 건 실례인 것 같습니다.”

“아아, 박 교수님. 그건 좀 잘못 짚으신 거 같습니다만.”

“잘못 짚었다고요?”

김강현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세상일이 주고받는 거라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일을 대가성으로 치르고 싶진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박 교수께 도움을 드리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정책 자문을 부탁드렸을 거라는 말입니다. 저는 박 교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계획을 품고 있었거든요. 명인대의 새로운 정책과 타치카와 선생의 일과는 전혀 별개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군요.”

부담감이 조금은 덜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진심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민우는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인구 절벽에 맞닥뜨린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남들이 가라고 해서 가는 대학이 아니라 필요해서 가는 대학이 되어야겠지요. 이 부분에서 박 교수가 품고 있는 꿈과 이상이 있을 겁니다. 그걸 유감없이 발휘해 주면 좋겠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 명인대 국문과 교수로 남는다면 제자를 키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순간 민우의 등줄기로 짜릿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이런 짜릿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생소한 건 아니었다. 마치 루카치의 유물을 우연히 얻게 되어 그 능력으로 여러 과제를 해결할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걱정보다도 기대가 앞섰다.

그럼에도 민우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이것은 실전이다. 언제까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실례가 되지 않으면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시지요.”

“정책자문역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음. 일단 대선 캠프가 구색을 갖추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캠프가 갖춰질 동안 우리 당의 정책 자문을 맡아주시면 되겠습니다.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필요할 때 전문적인 의견을 주면 되는 일이지요.”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민우는 대선 캠프의 정책 자문을 맡는 줄 알았다. 그런데 김강현 의원은 여당의 자문도 맡아달라 하고 있었다.

“오해는 마십시오.”

김강현 의원은 안심하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교수들이 전문위원으로 위촉되는 거야 흔한 일이니 크게 부담가지실 것 없습니다. 의원들이 모든 분야에 정통할 순 없는 거니 대학교수들에게 자문위원직을 많이 맡기는 편이지요. 당원이 되는 게 아니고, 외부 전문가에게 자문을 받는 그런 개념입니다.”

“그래도 자문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이슈가 될 수도 있겠네요.”

“그 정도는 감안하신 것 아닙니까? 오히려 이 기회를 잘 이용하셔야 할 겁니다. 박 교수님 뒤에 집권당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요?”

김강현 의원이 힘주어 말했고, 민우는 계속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히려 박 교수님과 명인대가 큰 결단을 내렸다고 찬사를 보낼 겁니다. 정치란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그건 박 교수께서 계시는 교육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좋습니다. 그럼 관련 절차는 의원님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탁하신 건도 잘 해결해 보겠습니다.”

“한잔 드실까요?”

민우는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새로운 출발의 시작이었다.

* * *

늦은 밤, 민우는 다소 지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자정이 넘은 시각. 거실엔 불이 꺼졌다. 그런데 안방엔 불이 켜있었다.

곧 인기척이 들리고 이수빈이 걸어 나왔다.

“왔어요?”

막 잠자리에 들려고 했는지 잠옷을 입고 있었다. 눈이 반쯤 감긴 게, 눕기만 하면 바로 잠들 것 같았다.

“그냥 먼저 자지 왜 기다리고 있어?”

“누가 기다렸대요? 볼 책이 있어서 못 자고 있었던 건데. 김칫국 잘 드시네. 우리 교수님.”

이수빈의 너스레에 민우는 픽 하고 웃었다. 덕분에 피로가 좀 가셨다.

“솔직하지 못한 분이네. 윤아는?”

“오늘은 일찍 잠들었어요. 응? 술 마셨어요? 술 냄새나네.”

“간단히 몇 잔. 권하시는 데 안 받을 수가 있어야지.”

“힘들었겠네요.”

이수빈은 민우의 가방을 들어주었다.

안방으로 들어온 민우는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넥타이를 풀고 푹신한 침대에 앉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만큼 김강현 의원과의 독대는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가 아니라 너무 큼지막한 일들이 순식간에 결정된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평생을 학계를 위해 투신했지만, 이제 국가의 정책에 한 발 걸치게 되었다.

민우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그래서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요?”

“아니, 그냥.”

“나 용돈 주려구?”

“뭔 소리야.”

평소라면 씻고 오라고 잔소리했겠지만, 오늘은 그냥 두기로 했다. 민우가 이 늦은 시간까지 왜 시달려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야기는 잘됐어요?”

“응. 의원님도 타치카와 선생이 자리 잡는 데 도와주신다고 하네. 임용 과정에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아. 타치카와 선생이 마음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설마 오빠가 이렇게 애써주는데 그러겠어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대학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고. 이 바닥 좁은 거 알잖아? 지금쯤이면 타치카와 선생이 명인대에 지원했다는 거 소문 쫙 퍼졌을 거야.”

문득 생각나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바로 정연주.

그녀에겐 타치카와 유지가 걱정 없이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줄 만한 능력이 있었다. 간단히 타치카와의 이름을 딴 연구 센터를 설립하고 센터장으로 앉히면 그만이지.

“그래도 우리 대학으로 올 거라고 생각해요.”

“왜?”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긴 좀 부끄러운데…… 오빠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직접 일본까지 찾아가서 모셔온 분이잖아요.”

“그 말 오랜만에 듣네.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이수빈의 궁금증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진짜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민우가 눈을 뜨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수빈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왜? 더 궁금한 거 있어?”

“있으니까 아직까지 안 자고 있었겠죠? 벌써 열두 시가 넘었는데.”

“책 보고 있었다며.”

“그냥 해본 소리지.”

그녀뿐만이 아니다. 측근들은 민우가 연락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톡이 가득 쌓여 있었지만 민우는 읽는 걸 내일로 미뤘다.

“다른 사립대에서 벌써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야. 우리 대학에 불만이 많다네. 서지훈 선생님을 총장협의회에서 제명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뭐라고요? 제명?”

민우가 고개를 끄덕여 다시금 상기시키자 이수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명인대에서 자체적으로 시간강사들에게 투자하겠다는데 왜 다른 대학 총장들이 난리란 말인가.

하지만 민우는 차분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지금까지 총장협의회에서 암암리에 합의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예외가 나오기 시작한 거잖아. 한마디로 시장 질서를 흐린다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정당하게 성명을 내고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제명이라니…….”

“예전에 처장급 회의에서 박두진 학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 우리가 송곳처럼 행동한다면 주머니를 뚫고 나와 모두의 질타를 받을 거라고. 그게 현실이 된 거 아닐까.”

“열폭도 유분수지! 정말 재수 없네요.”

팔짱을 낀 이수빈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들다.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완전히 일으킨 민우가 이수빈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우리도 각오한 일이잖아. 그러니까 차분히 풀어봐야지. 우리가 이런다고 선생님께 도움이 되진 않아. 더 힘드실 뿐이야.”

“그래도요.”

“제명한다 어쩐다 말이 많아도 막상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거야. 명인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립대학인데 정책 하나 때문에 제명을 논한다는 건 지나치게 감정적이지.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제야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가 부드럽게 풀렸다. 민우는 뒤에서 그녀를 포근히 안아 주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가끔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잖아요. 특히 대학에서 말예요.”

“기다려 보자.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이럴 때 보면 오빠는 속 편한 거 같아서 참 부럽다니까.”

“하나도 안 편해.”

민우가 한숨을 내쉬자 이수빈이 관심을 보였다. 아직 남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잘한 건지 모르겠다. 일단 지르고 보자 이런 느낌이라.”

“뜸 들이지 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어때요.”

이수빈은 마치 제자의 논문을 첨삭하듯 똑 부러지게 말했다. 민우가 답했다.

“김강현 의원님이 대선 출마를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야. 내년쯤 캠프를 꾸리신다고 들었어. 그 대선 캠프에 들어와 줄 수 있냐고 하시더라고.”

“대선…… 이요?”

이수빈이 깜짝 놀랐다.

민우는 명인대 교수다. 공직에 오른 적도 없고 정계에서 활동한 적도 없다.

그런데 그와 대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쉬이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대통령 임기 아직 좀 남지 않았어요? 무슨 벌써 캠프를 꾸려요?”

“그때 돼서 하면 늦어. 그 전에 구색 맞춰 놓고 대선 시즌 되면 바로 캠프 출범시키는 거야. 총선도 아니고 대선인데 그 정도 준비는 해야겠지.”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물은 이수빈은 흠칫 놀라며 자신의 입을 가렸다. 하지 않겠다고 했다면 민우가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됐어. 캠프 설립 전까지는 여당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게 될 것 같아. 조만간 위촉식 한다네.”

이수빈은 얼빠진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오빠가…… 정치를?”

“그냥 자문역이야.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는 식으로. 당원은 아니고.”

“그래도 나중 되면 자리 하나 하게 되는 거잖아요?”

“몰라. 그건 그때 생각하려고.”

멍하니 민우를 바라보던 이수빈이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뭔가를 바쁘게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순간 아차 싶었던 민우가 핸드폰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미 휴머니티 톡방에 메시지가 가고 말았다.

우리 오빠가 정계에 입문했다는 짧고 굵은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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