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21화 (421/500)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 (1)

민우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괜히 빙빙 둘러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 여당 중진 의원이 모를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명인대에서 이번에 시간강사 처우 개선안을 시행한 사실, 알고 계시지요?”

“그거라면 잘 알지요. 신문에서 보기도 했고, 워낙 말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역시 말들이 많았군요.”

소탈하게 웃은 김강현 의원이 소주잔을 들었다. 딱히 건배하지 않고, 그는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박 교수님이 한번 보자는 말씀을 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정연주 이사장님과 친분이 있으시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인지 예상이 가시겠군요.”

“예상이야 가긴 하는데, 저는 좀 더 정확한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민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지만 즉답이 나오진 않았다. 김강현 의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시간을 좀 끌었다.

“상황이 좋지는 않지요. 몇몇 사립대에서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뒤를 봐주고 있던 의원들도 더는 방관하지 못하게 됐어요.”

“어떤 의원분들이 관련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하하하. 박 교수님은 교수이지 검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정보는 드릴 수 없지요. 다만…… 야당 쪽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우리 여당에서는 아직 박 교수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민우를 여당 ‘공천 후보’로 내세워 국회에 입성시켜 주겠다.

이것이 여당이 민우에게 지속적으로 보내오고 있는 러브콜이었다. 청와대에서도 장관직을 권하려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모든 것을 고사한 상황.

‘지금 권유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민우는 자신의 가치관이 최근에 크게 변했음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그 시작점은 바로 서지훈 총장을 도와 총장선거를 치르게 된 것이었다. 한차례 큰일을 겪고 난 민우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꼭대기에 올라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언젠가 서지훈 총장이 자신에게 해준 말이기도 했다.

그때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제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안다.

만약 서지훈 총장이 이번 총장선거에서 낙선했다면 시간강사 처우 개선안은커녕 대학에서 자신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졌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대학의 문을 두드려봐야 할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서지훈 총장이 꼭대기에 올라간 덕분이다.

“우리 당 내부의 목소리라면 제가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겠지만 야당이라면 어렵지요. 아마 정치적인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김강현 의원이 진지하게 말했다.

현 정권의 야당이라면 대한민국 대표 보수 정당이다.

세계적으로도 이슈가 되었던 ‘국정 농단 사태’ 이후로 그들은 정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권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수십 년간 쌓아왔던 기반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수 정당이 사립재단과 유착관계가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그나마 여당에서 의원석을 과반석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저는 의원님께 불만을 잠재워달라고 부탁드리려 나온 게 아닙니다. 그저 상황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간 저에게 여러 부탁을 하셨는데 들어드리지 못했잖아요. 그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염치라니요? 박 교수님이 평생을 학계에 투신하려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말이죠.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김강현 의원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치 9단이라고 불리는 그의 표정에서 의도를 읽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겠군요. 종종 이쪽 상황을 말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아마 청문대도 시간강사 처우 개선안을 시행하게 되면 사립대학들이 합종책을 쓸 가능성이 큽니다. 밖에서는 박 교수님과 정연주 이사장을 한 몸으로 보고 있지요.”

“청문대는 곧 시행할 겁니다. 얼마 전 정연주 이사장을 만났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이 되겠군요. 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인 김강현 의원이 나직이 충고했다.

“선공 대상은 명인대가 아니라 한 사람이 될 겁니다.”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민우가 귀를 기울였다.

“제가 타겟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고개를 가로저은 김강현 의원이 말을 이었다.

“서지훈 총장이 타겟이 될 겁니다. 어쨌든 명인대도 총장협의회에 가입되어 있고, 협의회에도 나름 정관이라는 게 존재하니까요.”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해올까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겁니다.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그리 깨끗한 사람은 없으니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여러 가지다. 언론 플레이부터 시작해 각종 낭설을 퍼트려 곤란한 처지에 몰리게 할 것이 분명했다.

조금 과격하게 나서면 총장협의회에서 퇴출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총장협의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은 앞으로 사립대학들이 어떤 플랜을 가지고 대학을 운영할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즉 사학계에서 ‘왕따’가 된다는 소리다.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민우는 상황이 그리 비관적이진 않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서지훈 총장님께서는 총장협의회에 한 번도 출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쪽의 룰을 지키지도 않으셨고 말이죠. 제명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날카로운 질문이군요.”

잠시 고민하던 김강현 의원이 뜻밖의 대답을 내놨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네요.”

“그만큼 큰일이라서 말이지요. 명인대에서는 이번에 예산을 30억 좀 넘게 책정했다지요?”

“정확히는 35억입니다. 보수적으로 잡은 게 아니라서 조금 더 늘어날 수도 있고요.”

“최근 대학들이 적자를 기록하고 있어서 더 예민하게 나오는 걸 수도 있지요. 등록금 수익이 떨어지다 보니 장기적으로 재무구조가 안 좋아질 겁니다.”

민우의 표정이 답답해졌다.

대학의 큰 문제는 등록금으로 운영비를 모두 충당하려는 것에 있다. 그래서 매번 이야기가 나오는 게 재단전입금 문제고.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김강현 의원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박 교수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어렸을 적 생긴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진 않는 법 아닙니까? 재단도 각성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좀 더 여유롭게 기다려 보시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를 보자고 하신 게 이 일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셨는데……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화제가 전환되었다. 민우는 일본에 다녀온 일을 말하며, 박민우 문학상 리뉴얼과 타치카와 유지의 입국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도움을 청했다.

“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타치카와 선생이라면 우리 쪽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지요. 뭐, 야당 인사들이야 썩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죠.”

“어떻게 도움을 받을 방법이 있을까요? 타치카와 선생이 원하는 건 거창한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만 조성되면 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국내 체류에 문제가 없도록 제가 힘 써보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민우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김강현 의원은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것은 고도로 숙련된 정치인의 미소였다.

이번 일로 민우는 김강현 의원에게 큰 빚을 졌다. 사립대학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단서를 얻었고, 타치카와 유지의 국내 체류에 도움을 받게 됐으니까.

세상의 모든 일은 기브 앤 테이크다.

그렇다면 김강현 의원의 부탁도 이제 더는 거절하지 못할 터.

“박 교수께서는 여전히 정계엔 관심이 없으신 겁니까?”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학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거든요.”

“이해합니다. 학자의 사명을 타고 난 분들은 모두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김강현 의원은 몸을 좀 더 앞으로 당기더니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저는 곧 대권에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아들놈이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출마에 문제는 없겠지요.”

“정말이십니까?”

“하하하. 그렇습니다. 종로구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는 건 그만큼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몇 해 전 치러진 총선에서 김강현 의원은 종로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종로는 전통적으로 ‘정치 1번구’로 통한다. 이곳에서 당선된 사람은 대권에 그만큼 가까워지게 된다는 말이 있다.

지난 총선에서 김강현 의원은 경쟁자인 야당의 대표와 경합하여 완승을 거뒀다.

일각에서도 김강현 의원의 차기 대선 출마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지만, 정치에 관심 없던 민우는 그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김강현 의원의 진솔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교육 개혁에 대한 의지만큼은, 제가 박 교수님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엔 젊은 피가 필요하지요. 혹시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우리 캠프로 오셔서 좀 도와주실 수 있을지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본론이 나왔다.

민우는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어떤 ‘변곡점’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많은 방해물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학문적 유토피아가 결국엔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황에서 민우는 자신의 모범적인 롤모델인 서지훈 총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행적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박 교수의 협력을 가지고 협상을 하려는 건 절대 아니니 말이지요. 박 교수가 거절하신다 해도 저는 실망하지 않을 거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약속하지요.”

“……”

고민이 길어졌다.

그 한순간도, 김강현 의원의 시선이 민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민우의 입이 열렸다.

“캠프는 언제쯤 꾸려집니까?”

“빨라야 내년입니다. 벌써부터 움직였다가는 뭇매를 피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제가 캠프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그 말에 김강현 의원이 반색했다. 민우는 늘 단칼에 거절해왔다. 하지만 거절의 말이 아니라 질문이 나왔다. 파고들 여지가 있다는 소리다.

“고등교육 정책자문역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대학 개혁을 위해 아이디어를 내주십시오. 만약 제가 대권을 잡는다면…… 박 교수가 꿈꾸는 이상이 금세 현실이 되지 않겠습니까?”

김강현 의원은 민우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가득 채워진 술이 잔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떨림이 잠잠해졌다.

민우가 결심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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