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해 먹자 (2)
민우가 일본에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간 민우는 타치카와 유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도움을 주었다. 아직 김강현 의원과 만나기 전이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준다 장담할 순 없었지만, 입국 후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타치카와 유지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바로 ‘휴머니티’를 언급한 것이다.
“휴머니티에서 교양 강의를 하나 하고 싶으시다고요?”
민우는 다소 놀란 듯이 물었다.
일본의 재야 역사학자가 ‘휴머니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휴머니티의 설립 이념은 정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앞으로는 한국에 계속 머물 것 같은데, 가능하면 박 교수께 힘을 보태고 싶군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힘을 보태시려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무리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민우는 점잖게 사양했다. 그러자 타치카와가 반문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자격 미달이라는 말씀일까요?」
“아뇨. 절대 그런 건 아니고요. 휴머니티는 제 개인 소유가 아닙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지식 공동체라고 할까요. 휴머니티에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지만 저에게 주시는 도움은 괜찮다는 의미입니다.”
「아아…….」
타치카와는 다시금 감탄했다. 이 한국의 젊은 학자의 열정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듯했다.
「좋습니다. 그럼 휴머니티에 힘을 보내는 것으로.」
“감사합니다. 선생님. 학생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정말 기뻐할 거 같네요. 한일관계가 개선되는 건 물론이고, 올바른 역사관을 전파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봅니다.”
「그럼 한국에서 다시 인사드리도록 하지요. 준비가 끝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선생님.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그로부터 또다시 며칠이 지났다.
덜컥!
문이 급하게 열리더니, 얼굴이 상기된 조은혜 교수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근처에서 책을 고르던 차민재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민우의 연구실을 노크하지 않고 들어올 사람은 두어 명뿐인데, 거기에 한 명이 추가된 것일까?
“조 선생님. 아무리 급해도 노크는 하셔야죠.”
“앗! 죄송해요!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 생겨서…….”
“당황스러운 일이요?”
책을 읽던 민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읽던 책을 덮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조은혜 교수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데요? 논문 파일이라도 날리셨어요?”
“아뇨. 그…… 이번에 추가 채용 건이요. 일본의 타치카와 유지 선생님 아시죠? 그 독도 연구로 엄청 유명한 분 있잖아요!”
“알죠.”
“그분이 지원하셨더라고요!”
그녀는 분명 기뻐하고 있었지만, 놀라움에 묻혀 그 감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반응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네. 혹시나 싫어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타치카와 유지가 역사학계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저 한일관계만 연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독도 관련 사료는 물론 수많은 연구논문을 보유한 스타 학자였다.
“그분이 지원하셨다면 좋은 거 아닙니까?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아, 그게요……”
잠시 머뭇거린 조은혜 교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일본인 채용 관련해서 대학본부의 지침이나, 총장님 의견을 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지침이요?”
민우는 조은혜 교수가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신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무역 보복 이후 산업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것들이 서서히 소외되기 시작했다. 아마 그것을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즉,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 교수를 임용해도 되는지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지침이 무슨 소용입니까? 지원자가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만 보면 되는 거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선생님께도 그렇게 전달할게요.”
꾸벅 인사한 조은혜 교수가 들어올 때처럼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민우는 다시 덮었던 책을 쥐었다.
그때 차민재가 다가왔다.
“역사학과에 교수 한 분 더 오시나 봐요?”
“그렇게 됐다.”
“2학기에 그럼 두 분이나 오시는 거네요. 역사학과에.”
민우는 웃으며 차민재를 올려보았다.
“왜. 너도 한 자리 하고 싶어서 그래?”
“아뇨. 아직 석사학위도 없는데 자리는 무슨요. 그냥 좀 신기해서요. 문사철은 전국적으로 위축되는 분위기잖아요. 그중 철학과와 역사학과가 제일 힘들고. 그런데 한 학기에 정교수를 두 분이나 모시는 게 신기해서요.”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민우는 책장을 스륵 넘겼다. 그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자의 문답에 응해주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는 거야. 대학에서 교수를 줄이고, 새로 채용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나서서 뛰어난 학자들을 데려오면 되니까.”
“그건 그렇지만 대학 입장에서 부담이 늘어나진 않을지…….”
“나는 그게 대학의 근본적인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경쟁력이요?”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고 있지?”
“예. 대강은요.”
“현 교육계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취업이야. 특히 대학에서는 취업이라는 가치가 학문이라는 가치보다 우선시되고 있지. 하지만 모든 패러다임이 그렇듯,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
“새로운 패러다임…….”
곰곰이 생각하던 차민재가 대답했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라 민우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언젠가는 대학이 다시 학문이라는 가치를 더욱 우선시하게 될 거라는 말씀인가요?”
“맞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이 노동에 할애하는 시간은 극적으로 줄어들 거야. 그렇다면 여가에 몰두하게 되겠지.”
“학문도 여가의 일종이 될까요?”
민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현실에서도 간간이 나타나고 있다. 은퇴하거나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것이 바로 ‘대학원’이니까.
그래서 인문계 대학원에는 불혹을 훌쩍 넘긴 중년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때까지 기다리려면 상당히 긴 계획이 되겠네요.”
“그렇지.”
차민재의 말도 맞지만, 민우가 확신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때 돼서 유능한 사람들을 구하려면 이미 늦어버릴 거야.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었거나 경쟁자들이 모조리 쓸어갔겠지. 학자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아. 5년…… 아니, 10년 단위로 보고 움직여야 해.”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나 총장님이나 시간강사 처우에 신경을 쓰고 계신 거고요.”
“맞아. 비옥하지 않은 땅에서 좋은 작물이 자라지는 않으니까. 땅을 일구기가 힘들긴 하지만 누군간 해야 하는 일이다.”
“저도 빨리 커서 돕겠습니다.”
피식 웃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민재는 다시 책장으로 돌아가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민우와 문답을 마친 후 손이 더욱 바빠진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 * *
그날 밤, 민우는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다.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아 레아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제임스 사장님껜 뭐 연락 온 거 없죠?”
“예. 없습니다.”
‘박민우 문학상’ 선정위원회와 관련된 논의는 송승현 이사가 직접 진행하고 있다. 슬슬 진척되었을 타이밍인데 잠잠한 상황이었다.
송승현 이사에게 연락해서 물어보면 그만이지만, 괜히 채근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래서 민우는 하루하루 설레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긁지 않은 복권을 안주머니에 넣고 당첨일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선정위원회가 설립되고 전 세계에 그 사실이 공표된다면 어떨까.
주요 외신들이 앞다투어 ‘박민우 문학상’을 조명하는 것은 물론, 모든 학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받은 상금은 시간이 지나면 다 쓰게 되지만 역사에 남을 이름은 인류의 문명이 존속하는 한 없어지지 않을 테니까.
“이러다 이번에는 미국행 비행기 티켓이 날아오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민우가 농담 삼아 말했다. 레아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민우를 모시는 비서의 입장에서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뭐 결국은 저한테 좋은 일이잖아요?”
“그래도 경우라는 게 있는데, 이런 식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본사 보스라고 해도 지킬 건 지켜야지요.”
“살다 보면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이번 일도 그런 거 같고요.”
그 부분에서 민우는 제임스 사장과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민우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 만큼은 민우도 제임스의 추진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니저님께 유일한 단점이 하나 있다면 너무 관대하신 거라고 할까요?”
“그게 유일한 단점이라고 하는 건 칭찬 아닙니까?”
민우가 기분 좋게 웃었다.
곧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옥으로 되어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그 주변에는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차량이 가득했다.
바로 오늘, 민우는 이곳에서 김강현 의원을 만나기로 했다.
민우는 재킷의 옷깃을 다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을 가로질러 걷고 있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김강현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젊은 남자였다. 장관 시절에도 몇 번 본 적 있었다.
민우가 다가오자 그가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입니다. 박민우 교수님. 오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의원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일단 안내하겠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본문에 충실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니 별채가 나왔고, 구석진 방 쪽에 마련된 미닫이문이 열리자 풍채 좋은 김강현 의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실이라고 하기엔 좁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최적화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나 보는 듯한 그런 밀실 같은 느낌이다.
“아이고. 박민우 교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민우에게 존칭을 썼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악수를 청했다.
“이제야 뵙자고 하니 면목이 없네요. 의정 활동으로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박 교수님 바쁘신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람인데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의원님.”
다시금 인사를 한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곧 근사한 저녁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즘은 어떠십니까? 박 교수님 존함을 딴 상도 만들어진 거 같고, 얼마 전엔 일본도 다녀오셨더군요.”
당시 공항에서 민우가 한 공격적인 인터뷰는 악의적으로 변질되어 일본 일간지에 기사로 실렸다. 국내 반응은 ‘일본이 일본했다’는 것뿐이었다.
민우도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직 ‘진짜 공격’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의원님을 뵙자고 청한 겁니다. 거기에 명인대 일까지 더해서요.”
“명인대라면…….”
여우 같은 김강현 의원의 눈매가 살짝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