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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419화 (419/500)

다 해 먹자 (1)

2박 3일간의 일정을 모두 소화한 민우는 귀국하자마자 바로 명인대로 향했다.

다른 일은 차치하더라도, 타치카와 유지의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서지훈 총장은 총장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민우가 만남을 청한다는 말에 그는 기꺼이 총장실의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별일 없었냐?”

“별일이 없지는 않았고요. 뜻밖의 수확이 좀 있었습니다.”

“수확이라고 하니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서지훈 총장은 민우에게 자리를 권했다. 곧 시원한 차가 나왔고, 민우는 공항에서부터 쌓인 갈증을 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임스 사장이 절 일본으로 부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박민우 문학상이고, 둘째는 유명한 학자를 소개해주기 위해서였어요.”

“전혀 뜻밖인데? 문학상이야 그렇다 쳐도 너에게 학자를 소개해줄 이유가 있나?”

“그 과정에서 유명한 일본인 학자분이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 서지훈 총장의 눈이 번뜩였다.

“혹시 타치카와 유지 선생이냐?”

“역시 아시는군요.”

“알다마다. 종종 뉴스에 나오는 인물이잖아. 어떤 도움을 청했는데?”

“정확히는 저에게 도움을 청한 건 아니고요. 일본을 떠나고 싶은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수소문한 것 같습니다. 제임스 사장을 통해서요. 그러다 저를 만나게 된 거고요.”

그제야 서지훈 총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제임스와 타치카와 유지 사이에 있던 연결끈이 이해되었다.

“상당히 협박에 시달리고 있는 거 같더라고요. 가족들도 피해를 보고 있어서 이주를 결심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 상황에서 네가 손을 내민 거고?”

“예.”

“잘했다. 확실히 성과라는 말을 붙일 만하네. 타치카와 선생 정도라면 큰 전력이 될 수 있지.”

“타치카와 선생을 위해 역사학과에 자리를 하나 만들 생각입니다. 여의치 않으면 교양학부도 좋을 것 같네요.”

“특별 채용하기로 한 거냐?”

“아뇨. 추가 공지가 뜨면 이력서를 넣어 달라고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서지훈 총장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민우는 그렇게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한 명의 교수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런 방책을 냈다고.

서지훈 총장이 감탄했다.

“이제야 감을 잡은 모양이구나. 명인대의 교무처장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이다.”

“아직 멀었지만 이젠 좀 알 것 같긴 해요.”

“역사학과 학과장에겐 네가 직접 이야기할 거냐?”

“그래야죠. 설득할 자신 있습니다. 그 정도의 명사가 부임한다면 연구자료도 공유할 수 있고, 기존 선생님들도 더 좋은 논문을 써낼 수 있으니 좋은 일이잖아요.”

“하하하. 그런가? 뭐, 그럼 그 일은 너에게 맡기마. 하지만 명심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 되어야 한다는 거. 교수 임용엔 늘 신중해야 하거든.”

“알겠습니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떠올린 서지훈 총장이 물었다.

“그런데 아까 말한 박민우 문학상 건은 뭐야? 센트럴 북스에서 투자라도 하겠대?”

“비슷합니다. 선정위원회 설립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네요. 노벨상처럼 몸집을 키우려면 아무래도 상설 기관이 되어야 하니까, 인력이든 자본이든 많이 필요하겠죠.”

“역시 그런가. 하긴, 센트럴 북스라면 예전부터 지음사와 프로젝트를 많이 해 왔으니 별문제는 없겠어.”

센트럴 북스는 지음사와 함께 국내에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우도 참여한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였다.

<인문과학총서>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중고등학교는 물론, 모든 대학과 기관에서 필독 도서로 채택했다.

또한 지음사의 ‘오픈 라이브러리’에 탑재되어 책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온라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로 개발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제안을 하더라고요.”

민우가 흥미롭게 웃자, 서지훈 총장이 몸을 좀 더 가까이 당겼다.

“어떤?”

“타치카와 유지 선생에게 박민우 문학상을 주는 건 어떠냐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뭐?”

깜짝 놀란 서지훈 총장의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하지만 민우는 물론 그의 입가에도 곧 큼지막한 미소가 걸렸다.

* * *

“안녕하십니까.”

“어? 박 교수님!”

또래의 젊은 여교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큰 눈에 머리를 한 갈래로 묶어 누가 보면 교수가 아니라 학생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은 조은혜. 역사학과 조교수이자 학과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민우가 총장 면담을 마치고 바로 찾아온 것이다.

역사학과는 국문과와는 다르게 힘 있는 교수가 학과장을 맡지 않는다.

학과장은 번거로운 행정 일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막내 교수가 맡아서 하는 게 관례가 되어 있었다.

교수진도 적은 편이었고 약간 가족 같은 분위기라서 내부 알력 다툼 같은 것도 거의 없는 청정지역이었다.

그래서 민우는 역사학과 교수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휴가 내고 일본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지나가다 커피나 한잔 얻어 마실까 해서요.”

“아! 내 정신 좀 봐. 어서 앉으세요!”

뺨을 어루만지며 호들갑을 떠는 걸 보면 아직 어린 티를 못 벗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순수한 면이 있으니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겠지.

아직 미혼인 그녀에게 고백하는 남학생들이 한 학기에 두어 명은 나온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대학에서는 꽤 흔한 일이다.

자리에 앉은 민우는 그녀가 준비해준 커피잔을 손에 들었다.

“잘 마실게요.”

“그런데 정말 커피 드시러 오신 거예요?”

“하하하. 그러면 실례죠. 선생님도 일 많으실 텐데 방해하는 거잖아요.”

“어…… 그럼 혹시…… 교수 임용 관련한 문제일까요? 2학기 충원이 좀 어렵게 된 걸까…… 요?”

조은혜 교수가 조심조심 물었다.

1학기가 끝나고, 역사학과에서는 신규 교원 채용안을 제출했다. 교수 한 명을 충원하겠다는 계획서였는데, 민우는 그 채용안을 통과시켰다.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 채용 프로세스가 취소된 게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사립대학에서는 꽤 자주 있는 일이다. 대학본부가 사정상 채용이 어렵게 됐다며 교수 임용을 취소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그래서 지원한 교수들은 최종 면접에서 합격했다고 하더라도 임명장을 받기 전까지는 외부에 알리지 않곤 한다.

일단 민우는 손을 내밀어 조은혜 교수를 안심시켰다,

농담이라도 한마디 했다가는 그 큼지막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그런 건 아니고요. 이번에 2차 면접까지 봤잖아요? 좋은 선생님들 많이 올라오신 거 같던데요.”

“아! 그렇다면…….”

“2학기에 한 분 더 모시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이미 정규 채용은 끝났으니까 추가 채용으로 한 분 더요. 그거 상의드리러 온 겁니다.”

“엑? 한 분 더요?”

눈을 끔뻑이던 조은혜 교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교수진이 완성된 곳에서 한 명 충원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한 명 더 뽑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것도 교무처장의 입에서 말이다.

“저 놀리시는 거 아니죠?”

“하하하. 제가 왜 선생님을 놀려요? 엄연히 공무로 찾아뵌 겁니다.”

“아! 그럼 좋죠! 좋아요! 어떤 분야 채용하실 생각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독도와 한일관계 전문 교수를 초빙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영토분쟁은 심화될 거고, 또 한일관계도 예전 같지 않잖아요?”

몇 해 전 일본에서 반도체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품목의 수출규제를 강화하여 외교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관계가 회복되는 듯했으나, 여전히 거리감이 남아있는 상태.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대일(對日)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한일관계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면 타치카와 유지가 들어올 자리는 만들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조은혜 교수가 물었다.

“혹시 생각해 둔 분이 계실까요?”

“그건 역사학과에서 자체적으로 선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추가 채용이긴 하지만 정규 채용처럼 진행해 주세요.”

“그럴게요. 아, 정말 좋은 소식이에요. 다른 선생님들께 알리면 기뻐하실 거 같아요!”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죠.”

“왜요?”

“이력서를 받아보시면 아마 더 기쁠 겁니다.”

민우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커피를 홀짝였다. 조은혜 교수는 민우가 연구실을 나가기까지 그 미소의 진의를 알지 못했다.

* * *

해가 지고 나서도 민우는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바로 송승현 이사를 만나는 것이었다.

지음사 본사에 도착한 민우가 이사실로 들어갔다.

송승현 이사가 피로한 표정으로 민우를 맞았다. 여전히 그녀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살고 있었다.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보자고 하고.”

“서지훈 선생님께 못 들으셨습니까?”

“오늘 그이랑 한 번도 연락 안 했는데?”

‘박민우 문학상’에 대한 이야기를 송승현 이사에게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민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안 그래도 어제 제임스 사장에게 연락이 오긴 했었거든요.”

“뭐라고 하던가요?”

“뭐라고 하긴요. 곧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라고만 하던데.”

소피에 몸을 기댄 송승현 이사가 다리를 꼬고 편히 앉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민우는 방해하지 않았다.

“이건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골치 아픈 일인데…… 외국인 수상은 아직 좀 이른 감이 있죠. 민우 씨 생각은 어때요?”

“저도 몇 년 정도 경험을 더 쌓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건 지음사 자체에서 문학상을 운영할 때의 이야기고, 센트럴 북스가 협력한다고 하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관점을 좀 달리 생각할 필요는 있어요.”

팔짱을 낀 송승현 이사가 민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어쩌면 제임스 사장은 민우 씨가 일본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걸 이용해서 지분을 가져가려는 걸 수도 있어요.”

“저도 그런 생각을 잠깐 하긴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치카와 선생은 충분히 수상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제임스 사장이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줬다고 할까요?”

“으음. 그런가요.”

한숨을 내쉰 송승현 이사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좋아요. 박민우 문학상은 내 소관이니 민우 씨 믿고 한번 진행해 볼게요. 이미 1회 수상은 끝났으니 외국인 부문을 신설해서 연말에 진행하고, 2회부터는 본상에 포함시키는 걸로. 어때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타치카와 씨는 어디로 움직이는 거예요?”

“아마 명인대가 될 것 같습니다.”

민우는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명인대 역사학과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거고, 타치카와 본인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모든 일은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명인대가 다 해 먹는 분위기가 되겠군요.”

“훌륭하신 분이 총장이 됐는데 그 정도 업적은 세우게 해 드려야죠.”

“하아, 정말이지 말이나 못 하면…….”

고개를 가로저은 송승현 이사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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