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18화 (418/500)

다시 일본으로 (4)

「일단 말씀은 감사합니다.」

타치카와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없이 어려워하는 표정으로 민우에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박 선생께 도움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와주신 것만으로도 과분합니다. 조언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은 적어도 타치카와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협박을 받으면서까지 연구를 계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을 속이는 사람은 세상과 타협한 사람들이니까.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리겠다고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사양부터 하시면 제가 무슨 입장이 됩니까?」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타치카와도 변명을 하지 못했다.

민우가 말을 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총장님께 특권을 하나 받았습니다. 대학 발전에 도움이 되는 교수님들을 모셔올 수 있는 권한이라고 할까요.」

「아아, 그렇군요. 그럼 박 선생께도 교수 임용 권한이 있는 겁니까?」

「조금 복잡하긴 한데, 간단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 있는 명사들을 우리 명인대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본으로 와서 제임스 사장의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진 못했다.

국내에도 훌륭한 선생들이 많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직접 일본에 와서 타치카와를 만나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전도유망한 학자들을 데려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경쟁에는 여러 대학이 참여할 것이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정연주 이사장일 정도로.

하지만 민우는 자신 있었다.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학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어려움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젊은 나이에 대단하십니다. 한국의 교수 임용도 일본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노력한 것에 비해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저 더욱 노력할 뿐이지요. 그리고 교수 임용이 쉽지 않은 건 큰 단점이라고 봅니다. 학문후속세대들이 포부를 품을 수 없게 되는 구조로 변질되거든요.」

「일본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지요.」

「그 와중에 비리도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교육과 연구라는 대학의 순기능이 많이 희석된 느낌입니다. 폐단도 생기고요. 저는 대학을 좀 더 건강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타치카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민우는 고작 서른 중반의 젊은 나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최고 대학의 임용권을 쥐고 있고, 거기에 겸손하기까지 하며 시대를 통찰하는 안목도 갖고 있다.

그런 대학이라면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타치카와의 결론이었다.

그랬기에, 타치카와는 민우가 어떤 제안을 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우리 대학이 타치카와 선생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타치카와 선생이 우리 대학을 필요로 하는 구도로 만들어야 해.’

민우는 좀 더 먼 미래를 보고 있었다.

타치카와는 지조 있는 학자다. 입신양명보다 학문적 진실성을 우선시하는 사람이다.

지금 당장 어려운 사정을 이용해 그를 끌어오는 것은 하책일 뿐이다.

이 경우 상책은 그의 마음을 얻는 것.

민우는 바닥부터 올라온 학자였다. 같은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공략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타치카와 선생님을 우리 대학으로 초빙하고 싶습니다. 명인대에서 후학을 양성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셨으면 합니다. 수많은 책과 논문보다 선생님께서 자리를 잡고 계시는 게 더욱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박민우 선생…….」

그리고 이어질 민우의 말은, 타치카와의 예상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저는 제가 가진 특권으로 선생님을 우리 대학으로 모시지는 않을 겁니다.」

「예에?」

타치카와의 눈이 동그래졌고, 민우는 씨익 웃었다.

「그건 선생님께 큰 결례니까요.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을 제 보잘것없는 권한으로 가리고 싶지 않습니다. 2학기 교수 초빙은 끝났지만 추가 모집을 진행하겠습니다. 이력서를 넣어 주시면 좋겠는데 어떠십니까?」

「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모집 분야가 어떻든 선생님의 전문성을 따라올 사람은 없을 겁니다.」

민우는 넌지시 말하며 타치카와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낙하산으로 데려온 게 아니라 정식 절차를 밟은 정교수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설계한 일이었다.

교수 모집 분야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독도 문제와 한일관계’

이 정도로 특수한 분야라면 타치카와를 뽑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의 제기도 많지 않을 거고, 뒷말도 거의 나오지 않을 거다.

타치카와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약간의 불안감이 보였다.

「박 선생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좀 걱정이 되는 게 있습니다.」

「편히 말씀하시죠.」

「저는 일본을 떠날 생각입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완전 이주도 고려하고 있지요.」

「마음이 아프시겠습니다.」

타치카와는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 후회는 없어 보였다.

「한국의 외국인 관련 법률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염치 불고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전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로 손을 써 둘 테니까요. 이건 우리나라에도 득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다들 빨리 움직여 줄 겁니다.」

「아아……!」

타치카와는 두 손을 모으며 감격했다.

하지만 민우는 그 관계에서 오는 우월감을 조금도 표현하지 않았다.

애초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에겐 조금의 우월감도 없었다.

다만 명인대로 돌아가 타치카와와 공동연구를 진행할 생각으로 가득했다. ‘박민우 문학상’에 관한 일도 진척시키고 말이다.

* * *

호텔로 돌아온 민우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기다리는 사이 잠시 침대에 누웠다.

정말 힘든 하루였다.

하지만 그만큼 수확이 있었다. 하네다 공항에서는 파리가 좀 꼬이긴 했지만, 제임스와 센트럴 북스의 절대적인 협력을 약속받았다.

거기에 타치카와 유지라는 역사학자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서지훈, 송승현 부부에게 큰 칭찬을 받지 않을까 마음이 설렜다.

‘진짜 지음사에서 공로패 하나 받아야겠는데? 계획대로만 된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야.’

민우는 ‘박민우 문학상’이 노벨문학상을 뛰어넘어 세계적인 학술상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짜릿한 쾌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피로가 풀리고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생전 그 모습을 보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띵동!

그때 벨이 울렸다.

룸서비스를 시킨 적이 없었기에, 민우는 무슨 일인가 싶어 욕조에 받던 물을 잠시 잠그고 문을 열었다. 그리곤 깜짝 놀랐다.

「시미즈 교수님?」

「아아, 박 선생. 오랜만입니다.」

그는 동경대 문학부의 시미즈 유이토 교수였다. 손에는 작은 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일본 전통주인 것 같았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니, 제가 묵는 숙소는 어떻게 아시고.」

「아까 타치카와 선생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에…… 박 선생 덕분에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고요. 타치카와 선생과는 동문수학한 사이입니다. 감사의 인사도 전하고 싶었고, 또 술도 생각나고 해서 말이죠.」

「일단 들어오시죠.」

「밤늦게 실례 많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시미즈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호텔 방은 넓어서 두 사람이 앉고도 남을 만한 소파가 거실 쪽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극도로 조심한다.

특히 밤늦게 찾아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신사로 소문 난 시미즈 교수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그만한 사연이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거절할 수 없었다.

민우는 적당히 잔으로 쓸 만한 작은 컵을 트레이에서 꺼냈다.

그리고 미니바에서 안주로 쓸 만한 것들을 몇 개 내갔다.

「차린 게 없어서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이렇게 선생과 마주하고 앉을 수 있어서 참 좋군요.」

「교수님을 뵐 줄 알았다면 서지훈 선생님께 책을 받아올 걸 그랬습니다. 교수님께 좀 전해달라는 책이 있었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저도 일본 일정이 좀 갑작스레 잡힌 거라 다음에 전해드리려고 했습니다. 곧 다시 귀국해야 해서요.」

민우가 사정을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인 시미즈 교수가 술병을 따고 술을 따랐다.

민우가 물었다.

「이시카와 선생은 어떻게 잘하고 있습니까?」

「그럼요. 안 그래도 찾아갈 거라고 하니 박 선생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박 선생이라면 꼭 시간을 내줄 거라고 했습니다. 이제 스승인 저보다 안목이 훌륭합니다.」

「하하하.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떻게 내쫓습니까? 그건 도리가 아니죠.」

민우는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자 시미즈 교수가 고개를 숙였다.

「먼저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이번 매스컴의 대응은 실로 유감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정적으로 대응한 게 죄송스럽지요. 하지만 당분간 철회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 일은 좀 장기전이 될 거 같네요.」

「이해합니다. 음…… 저도 그렇고 많은 선생들이 반성의 시간을 가졌지요. 하지만 역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할까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진지한 민우의 물음에 시미즈 교수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현역 은퇴를 앞두고 있을 정도로 나이 차가 많이 났지만, 오히려 압도당하는 것은 시미즈 교수 쪽이었다.

민우가 조곤조곤 말했다.

「저는 좀 이해가 안 되더군요. 매스컴 하나 바꾸지 못할 거라면 학문을 하는 이유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진리를 밝히는 일이 더 고되고 어려운 일일 텐데요.」

「음…….」

「저는 불쾌해서 교류를 끊은 게 아닙니다. 이리저리 휘둘리고 침묵하는 일본 지식인들에게 투신해 봐야 제가 배울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타치카와 선생님은 굉장한 사람입니다. 일본 학계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뼈아픈 비판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미즈 교수는 조금의 불쾌함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한없이 성찰하는 자세를 보였다.

시미즈 교수는 자신의 빈 잔을 다시 채웠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두가 침묵하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해 주시니 감회가 새롭군요. 그것도 일본 사람이 아닌 한국의 지식인께서 말이지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속담이 있지만, 글쎄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늦은 거 아닐까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뭔가 수를 내셔야 할 겁니다.」

「그건…… 타치카와 선생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자연스레 수가 나올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미즈 교수는 마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두 눈을 반짝였다. 그도 알고 있는 걸까? 민우와 제임스가 기획하고 있는 일들을.

타치카와가 ‘박민우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면 일본 열도는 난리가 날 것이다.

시미즈 교수는 바로 그 틈을 노리고 있는 듯했다.

「좋습니다. 기다리지요.」

민우는 일을 좀 더 빨리 추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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