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본으로 (3)
「레아. 자네는 먼저 숙소로 돌아가도록 해. 민우 씨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차에서 내린 민우와 제임스는 예약해 둔 식당으로 올라갔다.
안으로 들어간 민우는 입을 쩍 벌렸다.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부터 바닥에 깔린 카펫, 그리고 테이블과 의자까지. 하나같이 고급스럽지 않은 것이 없는 초호화 레스토랑이었다.
「이야…… 엄청난 곳을 예약해 두셨군요.」
「불편하시면 다른 곳으로 갈까요?」
제임스가 장난스레 물었고, 민우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순 없죠. 일본으로 소환당했는데 비싼 저녁은 얻어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좋습니다.」
곧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이 착석했고, 사전에 주문한 메뉴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을 만끽하며 민우는 와인잔을 들었다.
「건배하시죠.」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이 부딪쳤다. 두 사람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제임스가 말했다.
「요즘 명인대 상황이 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더군요. 괜찮으신 겁니까?」
「생각보다 도와주는 분들이 많아서 잘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게임은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좀 더 시간이 필요하죠.」
「그렇군요.」
「혹시 그것 때문에 절 여기까지 부르신 겁니까?」
민우가 묻자 제임스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런 사소한 이야길 하려고 프로페서를 여기까지 모셨겠습니까? 실은 좀 소개해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요.」
「소개요?」
「혹시 타치카와 유지라는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프로페서 정도라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알고 있죠. 독도 연구로 유명한 분 아닙니까?」
「맞습니다.」
타치카와 유지(立川祐路)는 유명한 일본인 역사학자다.
그는 독도의 영주권이 한국에 있다고 주장했고, 각종 근거자료를 발굴하여 독도 연구에 기여한 바가 굉장히 크다.
그가 소개한 자료는 한국 정부 기관에서 인용할 만큼 사료적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극우단체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고 있기도 했다.
민우를 비롯해, 한국에서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 중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분은 갑자기 왜요?」
「최근 일본 매스컴에서 민우 씨를 공격하는 거 같더군요. 지켜보고 있는 제가 불쾌할 정도인데, 민우 씨는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일본 매스컴이 그러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술 교류까지 끊은 건 좀 아쉽더군요. 적어도 일본 학계는 민우 씨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지 않았습니까?」
자주 듣던 질문이었다. 민우가 바로 답했다.
「오히려 그래서 교류를 끊은 겁니다. 위안부 문제든 독도 문제든 한국과 얽혀 있는 문제에 대해 일본 지식인들이 지나치게 조용한 면이 있어요. 냉정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만 낼 뿐이죠.」
이번 이슈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언론에서 ‘박민우 문학상’을 공격할 때, 그 어떤 학자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시미즈 유이토 교수조차 따로 사과의 말을 전했을 뿐 공론화하진 않았다.
그 내막을 잘 알고 있던 제임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동감합니다. 저도 비즈니스를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일본인들 속을 알 수가 없었죠. ‘박민우 문학상’을 고평가한 서방세계 언론과는 다르게 아시아권에서는 좀 비판적으로 보더군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까 말이죠.」
「하지만 다르게 본다면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제임스의 표정이 진지해졌고, 민우도 잠시 잔을 내려놓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제가 타치카와 씨를 소개하려는 것도 ‘박민우 문학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오네요.」
「잠시 문학상 이야기를 해볼까요.」
집중하느라 가만히 있는 민우와는 다르게, 제임스는 포크와 나이프로 육즙이 흥건한 고기를 경쾌하게 썰었다.
「지금은 수상자가 한국인으로 한정되었지만 조만간 그 제한이 풀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로페서는 야망이 있는 남자니까. 아닙니까?」
「맞습니다. 아직 그 시기가 명확하진 않지만 말이죠.」
「당장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민우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문득 엄청난 가설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민우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자, 제임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하하하. 이제야 눈치채신 모양이군요. 첫 외국인 수상자를 일본인으로 선정하는 것은 정말 큰 고민일 겁니다. 한국의 여론이 들끓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독도 연구에 정통한 학자라면 어떨까요? 명분과 실리를 한 번에 챙길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 될 겁니다.」
민우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임스는 지금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하고 있었다.
첫 외국인 수상자를 선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첫 주인공으로 일본의 타치카와 유지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학계나 여론을 의식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상상이다.
‘하지만 타치카와 유지 선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는 친한파 일본인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 보기 드문 지식인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상황.
그에게 상을 주는 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제임스가 설명을 이어갔다.
「타치카와 씨는 이미 조국의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있는 상황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순수하게 학문에 몰두한 학자가 조국의 버림을 받다니 말이죠. 본인도 일본을 떠나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이 기회에 민우 씨가 손을 내밀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음…… 확실히 명분과 실리를 다 챙길 수 있는 일이겠군요.」
「적어도 웃으며 악수하다 뒤통수를 치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교훈을 주기에 충분할 겁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민우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명분과 실리 중 하나만 충족되는 거라면 좀 더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상황.
해볼 만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진행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겁니다. 선정위원회를 꾸려야 하고, 지음사 내부 결재도 필요하고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임스는 검지를 까딱거리며 특유의 허세를 부렸다.
「지음사만 허락한다면 우리 센트럴 북스도 선정위원회 설립에 도움을 드리고 싶군요. 숟가락만 슬쩍 올리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오해는 마시고요. 분명한 도움이 될 겁니다.」
「하루아침에 결정하신 일은 아닌 거 같네요.」
「당연하지요! ‘박민우 문학상’이 제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머리를 굴렸죠. 어떻게 하면 재미있을까 하고 말이죠.」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보니, 민우는 자신도 모르는 새 웃었다.
「확실히 센트럴 북스라면 믿음직스럽죠. 지금까지 함께 프로젝트를 하며 쌓아 온 신뢰도 있고요. 그래도 저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제 이름을 딴 문학상이긴 하지만 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거든요. 이건 돌아가서 송승현 이사님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거 같네요.」
「그러시지요.」
그런데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민우는 제임스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제임스 씨는 일본에서도 비즈니스를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제가 가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공항만 있다면 어디든 들락거리죠.」
「그런데 그렇게 나서는 건 좀 위험한 일 아닐까요? 걱정돼서요.」
「아, 그런 말씀이군요.」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큼지막하게 선 스테이크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사이에 나온 정말 맛있다는 감탄사는 덤이었다.
「비즈니스에서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란 말이 있는데,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때로는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어 더 큰 성과를 얻어내는 경우가 있죠.」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한 제임스가 와인잔을 들며 흔들었다.
「저에게 박민우냐, 아니면 일본이냐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박민우를 선택할 겁니다. 프로페서는 국가 하나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거든요. 일본이요? 뭐 실망하라면 하라죠. 신경 안 씁니다.」
「그런 말씀을 들으니 고마우면서도 부끄러워지네요.」
「됐습니다. 건배나 하시죠!」
민우는 기꺼이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민우는 근처에 있는 바에서 뜻밖의 사람을 소개받았다.
바로 제임스가 말했던 일본인 학자, 타치카와 유지였다.
* * *
「처음 인사드립니다. 박민우입니다.」
「오, 박민우 선생. 안녕하십니까.」
민우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타치카와와 악수했다.
그의 손은 거칠었다. 학자라기보다는 장인의 손이라고 할 만했다.
손뿐만이 아니라 얼굴도 그랬다.
이제 막 지천명을 넘긴 얼굴은 상당히 거칠었다. 정리되지 않은 희끗희끗한 수염도 많았다.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했다는 증거였다.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제임스 사장에게 부탁했는데 진짜로 와주실 줄은 몰랐군요.」
「아닙니다. 두 분이 움직이는 것보다야 저 혼자 움직이는 게 낫지요. 논문으로만 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 제가 드릴 말씀이지요.」
타치카와는 매우 정중했으며 겸손한 사람이었다. 무슨 말만 하면 고개를 숙이는 탓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할 정도였다.
「그럼 이야기들 나누시죠. 저는 이만 실례. 계산은 알아서 할 테니 실컷 드시길.」
그렇게 이야기한 제임스가 바텐더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술을 시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타치카와 쪽이었다.
「에…… 문학상 일은 유감입니다. 제가 신문사에 기고문을 보내고 여러모로 손을 써봤는데 아무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더군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실은 얼마 전에 시미즈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 있어서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시미즈 선생도 그랬군요. 어떻게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굉장히 폐쇄적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타치카와 선생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덕분에 세계 사람들이 독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타치카와는 무척 기쁜 표정을 지었다.
학자에게 있어 가장 기쁜 일은 자신의 연구가 인정받았을 때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장이 던진 한마디는 그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민우가 말했다.
「이야기는 제임스 사장님께 대강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매일 협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학자로서 학문적인 비판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지만…… 역시 협박은 견디기가 어렵더군요. 저 혼자만의 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만,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고 있어서 곤란한 상황입니다.」
「집요한 사람들이군요.」
「이제 딸이 막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학교 다니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입니까?」
그가 협박을 받고 있다는 건 뉴스에서 잠깐 본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선생께서는 우리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학자가 갖추어야 할 소명 의식을 일깨워주는 데 큰 역할을 하셨죠. 그래서 제가 도움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만.」
「도움…… 말입니까?」
「예. 선생께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민우의 그 한마디는, 반쯤 체념에 잠겨 있던 타치카와의 두 눈에 희망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