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본으로 (1)
“선생님.”
“어. 왔냐?”
살이 까맣게 탄 차민재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더운 여름에 푹 쉬게 하려고 베트남까지 보냈는데, 피부가 그대로였다면 한 소리 하려고 했었다.
수제자가 책을 워낙 좋아해 숙소에 틀어박혀 책만 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표정을 보니 실컷 놀다 온 듯했다.
이번 여행은 민우가 전액 지원해 주었다.
차민재는 방돌이를 하는 대신 연구 조교로 일하고 있다. 민우는 보너스 명목으로 그의 여비를 지원해 준 것이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간식거리 좀 사 왔는데 여기다 놔둘게요. 출출할 때 드세요.”
“그래.”
말린 망고와 인스턴트커피 등 이것저것 사 온 것 같다. 정리를 마친 차민재가 책상으로 다가왔다.
“저 없는 동안 별일 없으셨죠?”
“먹여 살려야 하는 제자가 자리를 비웠는데 당연히 별일 없었지. 속이 다 시원하더구나.”
“하하하.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여행은 어땠어?”
“끝내줬습니다. 조용하니 논문 쓰기 좋을 거 같더라고요.”
“거기까지 가서 공부할 생각을 했다고?”
“그냥 상상만요. 책은 아무것도 안 가져갔어요. 그냥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민재는 민우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저만 여행 보내주셔도 되는 거예요?”
“왜, 말 나올까 봐 그래?”
“아무래도 좀 신경 쓰여서요. 부럽다고 하는 애들도 좀 있고요.”
“정당한 근로의 대가인데 뭐가 문젠데.”
턱을 괸 민우는 차민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 석사 때는 위에 눈치 보여서 여행도 못 다녀왔거든. 아마 너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나서서 보내준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라.”
“옙. 덕분에 재충전했으니 오늘부터 다시 달려보겠습니다.”
“천천히 달려. 괜히 서두르다 넘어지지 말고.”
꾸벅 인사한 차민재가 돌아서려 할 때, 연구실 문이 열리고 이수빈이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는 혀를 찼다. 왜 저렇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왔는지.
차민재를 발견한 이수빈이 반색했다.
“오! 민재 돌아왔구나?”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다녀왔습니다.”
“얼굴 좋아 보이네! 앞으로도 종종 다녀와. 젊을 때 여행을 다녀야지. 누구처럼 도서관에만 짱박혀 있으면 좋을 거 없어.”
“어…… 그거 혹시 제가 아는 분 이야긴가요?”
“그럼. 아주 잘 아는 분 이야기지.”
아주 죽이 잘 맞는구만.
민우가 있는 뒤쪽에서 살기를 느낀 차민재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연구실을 나갔고, 이수빈이 다가왔다.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도 여행 가게?”
“응? 갑자기 여행은 왜요?”
“아무리 방학이라도 잘 입고 다녀야지. 애 엄마가 그렇게 드러내고 다녀도 되는 거야?”
이수빈이 빙긋 웃더니 얼굴을 들이밀었다. 뭔가 놀릴 거리를 찾았을 때의 버릇이었다.
“박 선생님. 혹시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
“질투는 무슨…….”
“에이~ 남 시선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 웬일이래? 옷 가지고 트집을 다 잡고? 걱정 마요. 애 딸린 아줌만데 누가 거들떠보기라도 하겠어?”
민우는 그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애도 낳고 나이를 먹은 것도 사실이지만, 민우의 눈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피부에 손이 더 많이 가는 것 외에는 20대와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면 또다시 질투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그만두었다.
“당신도 여행 보내 줘?”
“남편이 매일 야근이다 뭐다 고생하는데 누가 마음 놓고 놀러 갈 수 있겠어요?”
“해외여행 나간 지 꽤 됐잖아.”
“오빠 일 안정될 때까지만 참을게요. 나중에 교환교수로 나가서 좀 쉬다 와야지.”
“윤아 안 보고 싶겠어?”
“윤아랑 같이 나가면 되죠 뭐. 공부한다 셈 치고 한 10년 정도 있다 오면 되지 않을까?”
“날 돼지가 아니라 기러기로 만들 생각이냐.”
허풍이 아니었다.
이수빈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도중에 일이 생겨 좀 일찍 들어오긴 했지만, 그쪽에서 여전히 오퍼가 오고 있다.
“마음대로 해. 원하는 대로 지원해 줄 테니까.”
“아니…… 사람이 좀 붙잡고 좀 그래야지 왜 그렇게 재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질투하는 거냐는 소리나 듣고 있지.”
“왜 이야기가 갑자기 그렇게 되는데?”
생글거린 이수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먹을 거 없어요?”
“거기 봐봐. 아까 민재가 간식 놔두고 갔어.”
이수빈은 봉지를 뜯어 말린 망고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녀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민우도 자리를 옮겨 마주 앉았다.
“어제 연주 왔다 갔다면서요?”
“내가 얘기 안 했었나?”
“얘기를 안 했다기보다는 얘기할 시간이 없었죠. 어제 나 잘 때 집에 들어왔잖아요?”
“아, 그랬지 참.”
어제는 늦게까지 처리할 일이 많아 새벽이 돼서야 집에 들어갔다.
민우는 어제 정연주가 찾아온 이유와 나눈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말해주었다.
“선생님이 총장이 되면 좀 속 시원하게 일이 풀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요.”
“총장도 결국은 이사회에서 선임한 대표자일 뿐이니까. 결국 이사장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지.”
“이사장이 되는 건 어렵겠죠?”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재단 이사야 외부 인사가 선임되는 경우가 많다고 쳐도 이사장은 세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인대 재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 당분간은 조심해야 하는 거예요?”
“이미 기사도 터트리고 소문 다 났는데 그럴 필요 있나. 이사회 눈치 안 보고 빨리 추진할 계획이야. 너무 늦었어. 서둘러야지.”
“오빠나 선생님이나 신경 써야 할 일이 많겠네요. 김강현 의원님은 언제 만날 생각인데요?”
“다음 주쯤 약속 잡아 보려고. 만나 주시려나 모르겠다. 하도 거절을 많이 했더니 죄송스러워서.”
“얘기가 잘 풀려야 할 텐데…….”
아직 정치권에서는 특별히 반응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그들도 신중하게 나설 것이다. 이익을 따져 한쪽으로 기우는 곳으로 움직이겠지.
민우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지는 것 같아, 이수빈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아는 강사들이 오빠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래요. 덕분에 좀 여유로워졌다고.”
“아직 만족하긴 일러. 제대로 돌려놔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다른 대학에 있는 강사들도 내심 기대하더라고요. 명인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변화가 있었으면 한다고요.”
“꼭 그렇게 만들 거야.”
민우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새삼스럽게 내 남자가 이렇게 멋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수빈이 말했다.
“당분간은 집에 신경 쓰지 마요. 집안일은 내가 할 테니까.”
“잠깐!”
민우가 재빨리 핸드폰을 가져왔다. 그리고 녹음 앱을 실행시키고 마이크처럼 내밀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죠.”
“집안일은 반반이지.”
“왜 이래?”
“치사하게 그걸 또 녹음하려고 그래요? 가만 보면 섭섭이 오빠보다 더하다니까. 로망을 몰라.”
“야, 그건 좀 말이 심하지 않냐?”
우우우웅!
그때 민우가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전화가 왔다.
액정에 찍힌 이름은 레아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민우는 일단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 *
“무슨 일입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민우가 물었다. 전화가 온 그날 저녁, 민우는 레아를 만나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렀다.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요.”
레아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긴장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매사 자신감 넘치던 그런 태도가 아니었다.
민우가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편하게 얘기하세요. 우리 사이에 격식 차릴 것도 없으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라…….”
한숨을 내쉰 레아가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하얀 봉투가 나올 때, 민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직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게 뭐예요?”
“비행기 티켓입니다.”
“예?”
다행히 사직서는 아니었다. 눈을 끔뻑인 민우는 봉투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일본 하네다 국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티켓을 예매하라는 지시를 한 적은 없었다.
“제임스 사장님의 지시예요. 매니저님을 모시고 일본으로 와 줄 수 없냐고 하네요.”
“일본으로요?”
“네.”
“무슨 일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비즈니스가 있다고 하긴 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언급이 없었어요.”
민우는 비행기 티켓을 다시 봉투로 집어넣고는 생각에 잠겼다.
일전에 제임스 사장이 한국에 들른다고 했었는데 일정이 취소된 적이 있다. 본사에 급한 일이 터져서 바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기 때문이다.
‘그때 이야기하지 못한 일 때문인가? 예린이 신작은 성공적으로 계약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직접 만나 확인하는 길밖엔 없을 듯했다.
민우는 스케줄을 확인했다. 다행히 항공권에 찍힌 날짜에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참 제임스 사장님도 사람 난처하게 하시네요. 뻔히 바쁜 거 아시면서.”
“제 생각엔…… 아, 죄송합니다.”
“아뇨. 말씀해 보세요.”
고개를 살짝 숙인 레아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제임스 사장님은 매니저님의 일에 관심이 많아요. 바쁘신 거 뻔히 아는데 해외로 부를 정도라면 상당히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엉뚱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가벼운 분은 아니잖아요?”
제임스는 비행기를 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통이라면 그가 한국에 온다. 하지만 굳이 일본행을 권유했다는 것은 혼자 움직이기 힘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황당한 일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서 걱정했어요.”
“하하하. 앞으로는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우리가 남도 아닌데요. 전 사표 내시는 줄 알고 철렁했잖아요. 혹시 레아 씨도 은근히 즐기셨던 거 아닙니까?”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레아가 살짝 웃었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매니저님. 편히 말씀하라고 하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지금 일본으로 들어가시면 좀 시끄러워지지 않을까요?”
“음, 그것도 그렇죠.”
얼마 전 ‘박민우 문학상’이 시상된 이후 일본 매스컴이 민우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쓰곤 했었다.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거의 나오지 않으니 그럴듯한 상을 만들어서 일본과 맞먹으려는 수작이 아니냐는 논조였다.
당연히 민우는 그 기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처구니없는 논리였다.
하지만 민우는 이해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라면 가능한 논리니까.
그래서 미리 잡혀 있던 일본 학계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그 이후로도 민우에게 좋지 않은 기사가 간간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라 레아가 걱정하는 것이다.
“그래도 공식적인 일정은 아니니 괜찮을 것 같네요.”
“입국 사실은 최대한 비공개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뭐, 제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얼마든지 오라고 하세요. 열 배, 아니 백 배로 돌려줄 테니까.”
민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