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14화 (414/500)

새로운 정책 (3)

눈에 익은 휴대폰 번호였다. 민우는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네, 박민우입니다.”

― 오빠?

해맑은 목소리에 순간 마음이 탁 놓였다. 적어도 이번 새로운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은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연주였다.

“웬일로 사무실로 전화를 다 했어? 핸드폰으로 안 하고.”

― 일하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핸드폰으로 전화 안 받으셔서 이쪽으로 했어요.

“엉?”

민우는 눈을 굴려 핸드폰을 찾았다. 보통 책상에 올려놓곤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꺼내지 않은 것 같았다.

민우는 잠시 정연주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킷을 뒤졌다. 안쪽에서 핸드폰이 잡혔다. 부재중 전화가 세 건이나 찍혀 있었다.

한 통은 이수빈이었고, 나머지 두 통은 정연주가 건 전화였다.

“아, 쏘리. 주머니에 넣어두고 안 꺼내놨네.”

― 왠지 그럴 거 같았어요.

정연주의 웃음소리는 오랜만이었다. 아니, 목소리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요즘 비행기 타고 돌아다니느라 바쁘다면서. 귀국한 거야?”

― 예. 지금 명인대 근처에 와 있어요. 잠깐 서지훈 총장님 좀 뵈려고요. 겸사겸사 오빠도 같이 봤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응? 선생님을 뵌다고?”

민우는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지금까지 정연주가 사적으로 서지훈 총장을 만난 일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 자신까지 같이 보는 게 좋겠다고 하니, 짐작 가는 일이 있었다.

“그래. 그럼 내가 선생님께 한번 연락해볼게. 요즘 바쁘셔서 못 만날 수도 있는데 괜찮아?”

― 괜찮아요. 사실 오빠만 봐도 크게 상관은 없어요. 좀 걱정되는 게 있어서요.

“알았어. 그럼 일단 이쪽으로 오고 있어.”

전화를 끊은 민우는 바로 서지훈 총장에게 연락했다. 그는 좀 바빠 보였지만, 정연주의 이야기를 전하니 시간을 내보겠다고 했다.

잠시 후 도착했다는 정연주의 연락을 받은 민우는 대학본부 정문으로 내려갔다.

* * *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근사한 검은 세단이 천천히 다가와 멈춰 섰다. 곧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정연주가 뒷좌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재단 이사장이 원피스를 입는다고 한다면 잘 상상되지 않지만, 정연주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나이다. 어떤 복장이든 잘 소화할 수 있는 시기였다.

오히려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는 캐주얼한 복장이 때로는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늘 그렇지. 얼굴이 좀 탔다?”

“어, 그래요?”

정연주는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약간 그을려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돌아다닐 일이 많아서 그랬나 봐요. 한국에 있을 때야 사무실에만 있는데, 거긴 그럴 수 없으니까. 캠퍼스도 견학해야 하고요.”

“성과는 좀 있었어?”

“예. 나름 좋은 소식도 있고요.”

민우는 뒤에 있던 유진태 비서실장과도 눈인사했다. 연주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 민우는 연주를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정연주는 명인대 동문이기도 하지만 청문대 재단 이사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할 때처럼 편하게만 대할 수는 없었다.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오른 두 사람은 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근데 나름 좋은 소식은 뭔데?”

“생각보다 우리 휴머니티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에 발품 좀 팔았어요. 오빠도 잘 아시겠지만 해외에서도 오픈코스웨어처럼 온라인 무료 강좌가 인기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다들 솔깃해하더라구요.”

“해외 사업 하기로 결정된 거야?”

“서강일 선생님은 고민 좀 해보겠다고 했는데, 아마 하겠다고 하실 거 같아요. 지금으로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휴머니티’ 모임장직을 내려놓은 이후 민우는 운영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서강일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민우처럼 속전속결로 큼지막한 결정을 내리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신중함을 발휘해 멤버들의 지지를 얻는 중이다.

연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조만간 모여서 다 같이 진지하게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거 좋지. 한번 자리 만들라고 할게. 안 그래도 요즘 강일이 자주 만나거든.”

“명인대에서 강의하게 되었다면서요?”

“그렇게 됐어.”

두 사람이 총장실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비서 직원이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평소라면 시크하게 자리에 앉아 민우를 맞이했겠지만, 귀한 손님이 온 터라 서지훈 총장은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이래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건가. 민우는 웃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서 와라. 연주는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학교에서 뵙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자주 연락 못 드려 죄송했어요.”

“죄송하긴 뭘 죄송해?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인데. 너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그다지 잘 지내고 있진 못하지.”

“그러실 줄 알고 준비했어요!”

정연주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서지훈 총장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이건 뭐야?”

“간식이에요. 머리 아플 땐 달달한 게 최고더라고요. 머리 아플 일 많은 자리잖아요?”

“역시 이쪽으로는 선배라는 건가? 하하하. 고맙다.”

서지훈 총장은 쇼핑백을 받아들며 기분 좋게 웃었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교육행정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정연주였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대학을 대표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민우도, 서지훈 총장도 그에 비하면 뉴비라고 할 만한 입장.

서지훈 총장은 손수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 인터폰을 눌러 시원한 차를 내오라 시켰다.

아무리 대학원 때부터 봐왔던 학생이라고 해도, 지금은 명문사학의 재단 이사장이 찾아온 것이다. 결례를 범할 순 없었다.

서로 근황을 묻다 비서 직원이 차를 내왔고, 그제야 연주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대충 짐작하고 계시죠?”

“어제 박 선생 인터뷰한 거 때문 아닌가?”

“맞아요.”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연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차가운 찻잔을 어루만졌다.

“기사는 오늘부터 나가기 시작하긴 했는데, 어젯밤부터 고위 라인에 소식이 전해진 거 같더라고요. 여러 재단에서 우려를 표하고 있어요. 너무 급진적인 정책이 아닌가 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죠.”

어제 박윤지 기자가 말했던, 근사한 곳에서 반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거라는 말이 현실이 된 듯했다.

“총장협의회에서는 딱히 언급 없으셨던 거죠?”

“굳이 나가서 동의를 얻어야 하나? 내가 그 양반들 눈치 보려고 이 자리에 앉은 건 아닌데 말이지. 게다가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협의회에 나갈 일도 없었어.”

총장협의회, 즉 ‘대한사립대학교 총장협의회’는 사학의 역사와 함께 하는 대규모 단체다. 사립대학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라고 보면 된다.

표면적으로는 사립대의 균형적 발전과 협력을 추구한다고 되어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정책 단합 등 좋지 않은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지훈 총장은 교수 시절부터 총장협의회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협회란 친목 골프 모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앞으로도 딱히 출석할 일은 없을 거야. 우리 대학 식구들 찾아가 이야기 들을 시간도 부족한데 뭐하러 가서 고개 숙이고 앉아 있어?”

“그래도 명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데 나가지 않으시면 파장이 좀 크지 않을까요?”

“그 모임이 얼마나 쓸모없는 모임인지 스스로가 깨닫는 계기가 되겠지.”

서지훈 총장은 여유롭게 웃었다. 민우와 정연주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그가 저렇게 자신 있게 대답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 설득하러 온 거야? 총장협의회에 나가 보라고?”

“그런 건 아녜요.”

“그럼 소심한 몇몇 총장들이 한 소리 해달라고 부탁한 모양이군.”

거기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했다. 연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걱정이에요. 이제 명인대도 좀 안정되기 시작했는데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오면 많이 흔들릴 거 같아서요.”

“지금 우리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 청문대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나?”

“그래도 여긴 제 모교잖아요.”

연주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서지훈 총장도 더는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사학재단에서 말이 나오는 거야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지. 하지만 그쪽에서 불만을 토해낸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다. 문제는 국회에 계신 잘난 분들께서 어떻게 압박을 해올 거냐 하는 거지.”

“아마 시간문제라고 생각해요. 사학재단과 정치계는 그 유착이 상당히 심하니까.”

“청문대 쪽도 그런가?”

서지훈 총장이 필터링 없이 툭 던졌다. 연주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사장에 취임한 뒤로 지저분한 일들은 많이 줄였어요. 하지만 관례라는 게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간 이어왔던 관계도 있고요.”

“그렇긴 해. 오해는 마라. 비난하려는 건 아니니까. 이쪽도 마찬가지거든.”

“일부 사립대에서는 생존권을 위협받는 걸로 확대해석할 수 있어요. 명인대야 능력 있는 분들이 많으셔서 수입원을 마련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대학들은 그럴 수 없으니까요.”

“생존권을 운운하는 건 교육자의 마인드가 아니지. 장삿속이다.”

그렇게 단정 지은 서지훈 총장은 찻물을 들이켰다. 이번엔 민우가 잠시 끊긴 대화를 이었다.

“청문대는 어쩔 생각이야?”

“저희는 명인대 정책을 벤치마킹할 계획이에요. 다음 학기부터 시간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할 거고요.”

“그거 반가운 소리네. 확실히 빠르구나.”

“아무래도 저희는 모기업이 있으니 그런 면에서 좀 자유롭긴 해요.”

정연주는 최근 대한그룹 내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미 그녀가 만들어 둔 기반이 두텁기 때문에 몇십억 정도 쓰는 건 일도 아닐 거다.

“우리 대학과 청문대가 같이 움직인다면 다른 대학들도 뭔가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겠어.”

민우가 중얼거렸으나, 정연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다른 대학들이 같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큰 혼란이 일어날 거예요. 우리가 학계에 균열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박 선생이 그렇게 계획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그치?”

갑자기 폭탄이 넘어오자 민우가 정색했다.

“어깨가 묵직해지는데요? 잠깐 방심했는데 순식간에 총대가 넘어오네.”

“그러라고 처장 자리 준 거다 인마.”

“알겠습니다. 저도 미리 좀 움직여 볼게요.”

“너 그쪽으로는 인맥 없다며?”

“아예 없진 않아요. 적어도 김강현 의원님하곤 안면이 있으니까요.”

김강현 의원은 전 문체부 장관을 역임한 사람으로, 현 여당의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연의 시작은 민우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문체부 장관으로 활약하던 김강현은 민우에게 번역 아카데미 교수직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이제는 장관 임기를 끝내고 가끔 민우와 인부 전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한번 만나서 슬쩍 떠봐. 상황이 어떤지.”

“알겠습니다.”

“일 얘기는 이쯤하고. 아직 다들 점심 전이지? 나가자. 오랜만에 내가 살 테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랜다.”

“좋죠.”

진지했던 분위기는 눈 녹듯 사라지고, 세 사람은 평소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총장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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