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책 (1)
처장급 회의에서 시간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가결된 이후, 명인대 대학본부는 바쁘게 돌아갔다.
정책 시행이 결정되었다고 해서 모든 게 일사천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변경된 규정을 반영한 새로운 계약서를 만들어야 했고, 관련 사실을 시간강사들에게 통보해야 했다. 때로는 이의가 들어와 면담도 진행했다.
임용 계약서를 변경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시간강사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혹여나 더욱 불리한 조건으로 재계약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만큼 사립대학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적어도 임용계약에 있어서는 말이다.
하지만 계약서 신구대조표를 받아본 그들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생존권을 보장해 주려는 대학의 노력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민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시간강사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과 친분이 있는 강사들에게 새로운 정책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번 변화의 중심에 민우와 서지훈 총장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 수많은 강사들이 환호했다.
덕분에 교강사 임용에 관한 모든 업무를 수행하고 있던 교무처 직원들은 야근을 불사해야 했다.
그것은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민우는 교무처에 들어오는 대소사에 모두 관여했다. 변호영 과장에게 일임해도 될 법한 사소한 일도, 본인이 직접 검토했다.
“계약서 갱신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이번 주 내로 각 학과에서 강사들과 계약 갱신을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변호영 과장이 보고했다. 민우는 한숨 돌렸다.
“다행이네요.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는 거 같아서. 재무과 분위기는 어때요?”
“그게…… 좋지는 않습니다. 그쪽도 지급 처리할 게 늘어났으니까요.”
“그렇겠네.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야겠네요.”
민우는 지난주에 교무처 직원들과 함께 회식했다. 덕분에 모르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고, 직원들과 좀 더 친해질 수 있었다.
대학 내에도 회사와 비슷한 조직이 있다는 게 민우로서는 생소했다.
제대로 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석사 시절 지음사 인문사회팀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회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재무과 사람들이 깐깐하긴 해도 속이 좁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숫자에 예민한 거지, 새로운 정책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마음 놓고 있을게요.”
민우는 결재를 끝낸 서류를 변호영 과장에게 건넸다.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서 쉬시죠. 이번 주 내내 야근하지 않으셨습니까?”
“월급 받는 만큼 일해야죠. 직원들 힘든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저 혼자 발 뻗고 잡니까?”
“그렇게 따지면 처장 수당이 많은 편은 아니니까 오히려 더 쉬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하하하. 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나가서 일 보세요.”
“예. 처장님.”
“참, 오늘 오후에 저 스케줄 있는 거 아시죠? 한 시간 뒤쯤 나갈 생각이니 급한 결재는 바로 올리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변호영 과장이 처장실에서 나갔다.
민우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인터뷰 관련 서류를 꺼내 들었다.
오늘은 주요 언론사와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새로운 정책이 문서화된 직후 교육개발실의 김명현 실장은 기자들을 초청했다. 한 시간 뒤면, 프레스룸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늘 인터뷰는 대학 개혁의 포문을 여는 중요한 날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민우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단순히 대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결국은 정부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꼬집어야 하니까.
‘총장협의회가 아니라 정치권에서 태클이 들어오면 좀 난감해지는데…….’
민우는 정계 인사들과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쪽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좋은 일 하겠다는데 불러다 놓고 면박이라도 주겠어?’
민우는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보도자료 검토를 마치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서류를 가방에 넣은 민우는 정장 재킷을 걸치고 교무처 사무실을 나섰다.
“선배!”
민우는 명인대에서 다양한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선배도 그중 하나였다.
돌아서니 대학원 석사 시절 알게 된 후배 정일주가 뛰어오고 있었다.
군대도 다녀오지 않았던 학부 꼬맹이가 어느새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지난 학기부터는 강의도 하고 있다.
“어디 가세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안 드셨으면 밥 좀 사주세요. 드셨어도 사주시면 감사하고요.”
“이게 하늘 같은 처장님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하하핫. 우리 사이에 왜 그러십니까? 강의 뛰고 오느라 너무 배고파요. 점심시간도 지나버려서 같이 먹을 사람도 없고.”
“아싸였냐?”
“설마요. 휴가 시즌이라 학교에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후배들도 다 잠수 타 버렸고.”
지금은 8월 초다. 국내 최고의 면학 분위기를 자랑하는 명인대 중앙도서관도 한산할 시즌이다.
그건 대학원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쉬는 날에도 나와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미덕이었는데, 요즘은 잘 쉬고 잘 놀아야 공부도 잘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일각에서는 민우가 석사과정 중 과로로 쓰러진 일 덕분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선배들한테도 잘했어야지. 후배들만 챙기니 이 꼴 나는 거 아니냐?”
“너무하시네. 밥도 못 먹고 일한 후배가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그게 쫄쫄 굶지 말라고 일 구해다 준 사람한테 할 말이야?”
“그러게요.”
두 사람이 피식 웃고 말았다.
민우는 프레스룸이 설치된 인문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일주가 자연스레 옆으로 따라붙었다. 이상함을 느낀 민우가 물었다.
“너도 인문관 가냐?”
“네? 저 밥 사주러 가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뭔 소리야. 나 지금 일하러 가는데. 오늘 인터뷰 있다는 거 못 들었어?”
“아, 맞다. 오늘이구나!”
정일주도 명인대 국문과 출신이다. 민우의 일거수일투족이 가장 빨리 공유되는 곳이 국문과라서, 그도 인터뷰 소식을 들었다.
거기에 민우는 시간강사로 활동 중인 정일주를 통해 강사들의 불안 요소를 잠재우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고급 정보를 많이 공유해 주는 편이었다.
“쩝. 그럼 오늘 밥은 좀 어렵겠네요.”
“진짜 배고픈가 보네. 진섭이한테 가 보든가. 지금쯤 연구실에서 에어컨 바람 쐬면서 신선놀음하고 있을 거다.”
“섭 선배는 휴가 안 가신대요?”
“이번에는 못 간대.”
“저런.”
주예린은 임신 초기인 데다가 나이가 적지 않아서 조심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해외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기로 했다.
“하지만 섭 선배는 벼룩의 간을 빼먹는 사람이라서 안 됩니다. 오히려 갔다가 제가 삥 뜯길걸요?”
“이젠 괜찮을 거야. 용돈 올랐거든.”
민우는 웃음이 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후배와 할 날이 올 줄이야.
정일주를 비롯해 다른 후배들을 보면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생 연구실에서 아웅다웅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강사들 분위기는 어때?”
민우가 물었다. 정일주는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완전 대박이죠! 방학 때 놀지 못하게 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선배 말대로 굶지 않게 된 게 다행입니다. 은근히 가정 있는 선생님들 많잖습니까.”
“그렇지.”
“인문학 프로그램도 잘되고 있는 거 같고, 계절학기도 많이 늘었고 특강 기회도 생겼으니 다들 열심히 하는 분위기죠.”
강의뿐만 아니라 연구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강의만으로는 명인대에 등록된 수많은 시간강사들을 커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돌아올 겨울방학부터는 거액의 연구 기금을 조성해 강사들이 연구실에서 따뜻한 겨울을 나게끔 도와줄 계획이다.
강의가 없더라도 먹고살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전에 인문대 강사들하고 술 한잔했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선배나 서지훈 선생님이 안 계셨더라면 암담했을 것 같다고.”
“네 생각은 어떤데?”
“당연히 저도 같은 생각이죠. 아마 새 정책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과외 자리 알아보고 있었을걸요? 역시 선배십니다! 석사 때부터 알아봤어요. 그래서 줄 하나 기가 막히게 잘 섰죠.”
민우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바로잡아야 할 말이 하나 있었다.
“그게 왜 내 덕분이야? 서지훈 선생님 덕분이지.”
“이야! 감투 좀 쓰시더니 아부가 느셨네요. 자연스러웠습니다!”
“난 상아대에서 공부할 때부터 서지훈 선생님 옆에 있었어. 만약 다른 선생님이 내 지도교수였다면 새 정책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거 아니다. 오래 천천히 보고 깨닫는 게 있어야지.”
“그러니까 지도교수를 잘 골라야 한다는 거군요. 음, 아쉽네요. 저 대학원 들어올 때 그렇게 말씀 좀 해주시지.”
“콱 그냥. 설예라 선생님께 이른다?”
“저 박사는 따고요.”
어느새 두 사람이 인문관에 도착했다. 정일주는 같이 들어가지 않고 현관에서 몸을 돌렸다.
“전 그럼 섭 선배 삥 뜯으러 갈게요. 인터뷰 잘하십쇼.”
“그래. 다음에 보자.”
정일주와 헤어지고, 민우는 1층에 마련된 프레스룸에 들어갔다. 얼핏 봐도 스무 명이 넘는 기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민우를 향했다.
* * *
시간강사 처우 개선안에 관한 세부 브리핑이 모두 끝나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이거 진짜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교수님인데 설마 뻥카겠어?”
“내가 알기로 그렇게 돈을 쓰는 대학이 없을 텐데…….”
다소 혼란스럽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였다.
이것은 명백한 특종이었다.
국립대학도 아닌 사립대학에서 시간강사의 수입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예산을 편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을 줄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잠시 기자들의 반응을 살피던 민우가 마이크를 잡았다.
“설명은 이쯤 하면 될 것 같고요. 자세한 내용은 보도자료를 배포할 테니 그쪽을 참고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질문을 좀 받아볼게요.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질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때 앞줄에 있던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민우가 손으로 가리켰다.
“종합뉴스의 안민영 기자입니다. 이번 정책은 생소한 면이 좀 있는데요. 혹시 정부의 지원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논의된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런 지원도 없었고 논의도 없었습니다. 명인대 자체 플랜입니다.”
민우가 담백하게 답변을 마무리하자 다음 질문자가 나왔다.
“박 교수님의 브리핑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여러 정책들이 시행될 거고 적지 않은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데요. 보통은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인데 어떤 목적으로 새 정책을 시행하시는 것일지요?”
“좋은 질문이네요. 그 전에 유머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학부 때 죄를 지으면 감옥이 아니라 대학원으로 끌려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몇몇 기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민우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유머가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학계에 미래가 없다는 거예요. 물론 시설 투자도 대학의 미래 전략 중 하납니다. 하지만 결국은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는 것은 대학의 몫인데, 더 이상 방관할 수는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해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 정부가 제대로 된 정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불쑥 치고 들어온 질문에 민우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