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장급 회의 (3)
“자, 이쯤 했으니 회의 마무리합시다. 다들 바쁘신 와중에 참석하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그럼 다음 회의 때 인사드리지요.”
“수고하셨습니다.”
서지훈 총장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참석한 교수들도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제야 민우는 팔을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시간강사 처우 개선안에 관한 투표 결과가 나온 후, 회의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다.
결국은 민우가 승리했다.
투표 결과 2표 차이로 찬성표가 더 많았다. 그래서 민우가 제안한 시간강사 처우 개선안은 처장급 회의에서 가결되었다.
이제 세부 절차를 마무리한 뒤 서지훈 총장이 결재하면 즉시 시행된다.
당연히 이번 승리는 민우 혼자만의 몫이 아니다.
휴머니티 동료들은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민우는 이 기쁜 소식을 지인들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박 교수님.”
“아, 예.”
정신을 번뜩 차린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명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결국 해내셨군요.”
“그러게요. 솔직히 박두진 학장님이 말씀하실 때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다른 학장님들이 도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랬으면 다행이고요.”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자잘한 일들이 남았다.
우선 서지훈 총장은 ‘기권’에 한 표를 행사했다.
반대 측에 선 교수들을 배려한 투표였다.
만약 강유찬 학장이나 김종필 학장이 손을 들고 소감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반대표가 훨씬 더 많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남은 일은 천천히 해결하시죠. 일단 축배를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축배요?”
“한잔 어떠십니까?”
김명현이 먼저 술을 마시자고 제안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긴, 생각해보니 그와는 제대로 식사를 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좋습니다. 갑시다.”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모시지요.”
“누굴 모십니까? 같이 가는 거지.”
민우는 김명현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때 반대쪽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박두진 학장과 마주치게 되었다. 박두진 학장의 뒤론 상경계열 교수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민우가 정중히 예를 갖췄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학장님.”
“박 교수도 수고 많았습니다.”
박두진 학장의 뜻대로 회의가 끝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처음 회의장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더 바빠지시겠군요.”
“좋은 정책이란 없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허허허. 박 교수께서 더 배울 게 남아있었습니까?”
“그럼요. 학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우리 대학은 새 정책을 잘 활용할 만한 역량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그때 다시 평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민우는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표결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민우는 주도권을 쥐었다. 하지만 그는 박두진 학장 앞에서 진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발언에서 배울 게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일까. 박두진 학장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펼쳐졌다.
“웬만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박 교수가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한마디 해야겠군요.”
“예. 학장님.”
“새로운 정책은 빠르면 다음 학기에 시행되겠지요. 총장께서 결재를 늦추지 않는다면 금방 진행될 겁니다. 이번 정책은 학계에 큰 충격을 줄 거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급진적인 정책의 약점은 바로 민심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사람들의 마음이라면…….”
“박 교수께서는 매스컴을 잘 다루지 않습니까. 다른 대학에서 나서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 명인대는 늘 첫 번째여야 하니까.”
살짝 놀란 민우가 고개를 숙였다. 박두진 학장의 발언은 잔소리보다는 조언에 가까웠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박두진 학장이 먼저 자리를 떴고, 민우도 김명현과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 * *
김명현이 소개한 술집은 명인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바였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우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조명은 어두웠고, 재즈풍의 음악이 흘러나와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민우와 김명현은 바텐더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바텐더가 투명한 칵테일을 내밀었다. 잔을 받아든 두 사람은 가볍게 건배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아직 얼떨떨합니다. 김 실장님이 진짜 안 도와주실 줄은 몰랐네요.”
“하하하.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켜보고 있겠다고.”
물론 민우도 김명현이 지원사격을 하지 않은 이유를 잘 안다.
그가 교육개발실의 책임자이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지, 직급상으론 다른 교수들의 말을 막을 만한 위치에 있진 않았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김 실장님이 기획서를 잘 다듬어 주신 덕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네요.”
“애초에 원본이 좋았으니 말이죠.”
“친구가 그러더군요. 저답지 않은 현실적인 기획서라고.”
“하긴, 박 교수님이 좀 몽상가적 기질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강유찬 학장님과 비슷한 느낌이 들더군요.”
두 사람이 술잔을 입에 댔다. 톡 쏘는 탄산과 함께 씁쓸한 알콜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의외지 않습니까? 총장께서 기권표를 행사하신 거 말이죠.”
“선생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겠죠. 기명 투표였으니, 그 상황에서 한쪽 편을 들었다가는 오히려 뒤탈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민우의 설명에 김명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새 정책을 같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요. 총장이 되시기 전부터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저라도 그랬을 거 같습니다.”
“진심입니까?”
민우는 웃으며 잔을 흔들었다. 잔 속에 들어 있던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소리를 냈다.
“요즘 총장이라는 자리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피부에 와닿고 있거든요. 언젠가 제가 그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과연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지도 걱정되고 말이죠.”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는 거 아닙니까? 서지훈 총장님 임기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인데 다음 자리를 생각하시다니.”
“하하하. 그런가요?”
“저는 박 교수께서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근거로요?”
“아까 회의 끝나고 나서 박두진 학장에게 머리를 숙이는 걸 보고 깨달았지요. 박 교수께선 의외로 정치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민우는 피식 웃었다.
그게 소질이라면 할 말이 없다. 조금의 계산도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한마디가 있었다.
김명현이 말했다.
“그때 박두진 학장이 좀 흥미로운 말씀을 하시더군요. 매스컴을 이용하라니…….”
“걱정되십니까?”
민우가 물었고, 김명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원론적으로는 맞는 전략이긴 한데…… 새로운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부담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그걸 매스컴에 알리는 게 바람직한 일인지는 글쎄요. 확신이 안 서는군요.”
“저는 박두진 학장께서 진심으로 조언을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학장님도 나름대로 대학의 미래를 생각하는 분인 것 같아서 말이죠. 저와 가는 길은 다르지만, 목적지는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렇군요.”
어느새 잔을 다 비운 김명현이 바텐더에게 추가 잔을 주문했다.
“그럼 기자회견 준비하겠습니다. 브리핑은 박 교수님이 직접 해주시면 되겠네요.”
“부탁드립니다.”
그때 뚜벅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나더니, 민우와 김명현이 앉은 자리 뒤쪽에서 뚝 멈췄다.
“아니, 박 교수님 아니십니까?”
무심코 고개를 돌린 민우가 깜짝 놀랐다. 전혀 뜻밖의 인물이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나.
“학장님!”
민우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을 걸어온 것은 의과대학의 강유찬 학장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본과 4학년 이소윤과 레지던트 1년 차 양지모의 모습도 보였다.
늘 학교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이곳에서 보게 되니 뭔가 새로웠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오랜만에 제자들하고 한잔하러 왔지요. 마침 양 선생이 오늘 오프라길래.”
“아, 그러셨군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소윤과 양지모가 동시에 인사했다. 민우는 웃으며 손을 들어 주었다.
강유찬 학장이 두 제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박 교수도 이 친구들하고 자주 본다면서요?”
“자주는 못 봅니다. 워낙 바쁜 친구들이라서요. 특히 양 선생은 어디 한 군데 고장나지 않으면 못 봅니다.”
“하하하! 박 교수보다 바쁜 친구들이었군요. 내가 눈치도 없이 데리고 나왔군. 자네들은 잠깐 가서 따로 한잔하고 있지.”
“예.”
이소윤과 양지모가 따로 테이블을 잡았다.
강유찬 학장은 자연스럽게 이쪽 자리에 합석했다. 민우는 그가 가운데에 앉을 수 있도록 옆으로 한 칸 물러났다.
곧 세 사람은 각기 잔을 들고 건배했다.
민우가 말했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학장님이 아니었다면 오래도록 준비한 계획이 엎어질 뻔했어요.”
“아아, 뭐 제 도움 때문이겠습니까? 좋은 취지의 정책은 언젠가 빛을 보기 마련이지요.”
고개를 끄덕거린 강유찬 학장은 문득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게 다 박 교수의 큰 그림인가 싶기도 하고요.”
“큰 그림이요?”
강유찬 학장은 잔을 어루만지며 잠시 뜸을 들였다.
“이틀 전쯤 정호순 병원장님을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병원장님이 박 교수 칭찬을 그렇게 하시더군요. 왜, 휴머니티에서 하는 봉사 프로그램 있잖습니까? 환아들이 정말 좋아한다고 일선에서 보고가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까 회의실에서 나올 때 김명현이 말했던,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몇 달 전, 민우가 총장선거를 준비할 때 정호순 병원장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민우는 그 자리에서 사회공헌 사업을 제안했었다.
대학원 시절 교육 봉사를 했던 경험을 살려,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어린 환자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교육을 하겠다는 제안이었다.
당시 정호순 병원장은 흔쾌히 수락했고, 대한전자의 도움을 받아 단말기 지급까지 완료되어 최근까지 사업이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헬스케어 전문 잡지에 모범적인 사회공헌활동이라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고, 보건복지부에서 ‘휴머니티’에 감사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우리병원 선생님’은 감염 위험을 줄이면서도 환아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멋진 프로그램입니다. 병원이나 대학에서도 신경을 써야 했는데 현실적인 문제가 늘 발목을 잡았었죠. 때마침 박 교수가 등장한 겁니다. 그리고 간단하면서도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지요.”
“제 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보다 다른 휴머니티 멤버들이 더 고생하고 있는걸요.”
“누구의 공이냐가 중요한 건 아니죠!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행복한 순간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김명현 실장이 사람 보는 눈은 있나 보다. 민우는 그 한마디에서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솔직히 아직 박 교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들더군요. 이런 사람이 그리는 미래는 좀 더 따뜻하지 않을까. 거기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제 오지랖이었을까요?”
강유찬 학장이 잔을 들었다. 민우도, 김명현도 잔을 들어 그와 건배했다.
쨍, 하는 맑은소리에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더해졌다.
그 순간 민우는 생각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그리 헛되지만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