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장급 회의 (2)
“으음.”
일부 교수들이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들 입장에서 낙하산이었던 민우의 지적은 불쾌한 것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지만 대학 행정은 다른 문제다.
관록이 있는 교수들은 민우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민우는 잠시 서지훈 총장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황이라 민우는 말을 이어갔다.
“지금 우리 대학의 정책으로는 시간강사에게 온전한 교원의 지위를 부여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전임과 비전임의 차이는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만, 생계 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지요.”
“허허, 박 교수. 듣자 하니 너무 지나친 거 같은데. 왜 우리가 그들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합니까?”
누군가 끼어들었다. 시선을 돌리니 중년의 교수가 눈에 힘을 잔뜩 주며 노려보고 있었다.
민우는 회의에 참석하기 전 이수빈은 물론 한진섭과 주예린과 대책을 논의한 바 있다. 그래서 예상 반론은 모두 꿰고 있었다.
방금 나온 반론도 함께 논의했던 내용에 있던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있으니까요.”
민우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가 상대를 자극했다.
“위험한 발언이오! 현대 사회는 무한경쟁시대입니다.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국가도 아닌데 어떻게 근로자들의 생계를 일일이 책임져 줍니까?”
“교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 케이스에 한해서는 접근이 조금 엇나간 거 같습니다만.”
“뭐요?”
질문을 던진 교수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민우는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여유롭게 답했다.
“시간강사는 단순히 근로자라 정의할 수 없습니다. 학계의 미래죠.”
민우의 일침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날이 갈수록 학생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대입 정원도 마찬가지고요. 결국 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육의 질을 올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후학에 투자해야죠. 새로운 교육 방식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
민우는 간단히 논파에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공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른 교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의 질을 높이는 다른 방법도 있는데 굳이 시간강사들에게 아까운 예산을 투자해야 합니까? 35억이라는 돈이 옆집 개 이름도 아니고 말이지요.”
“말씀 잘하셨습니다. 현재 시간강사들이 우리 대학의 30퍼센트에 달하는 강의를 맡고 있는데요. 그들의 기본 생존권을 보장해 주는 게 아까운 거라면, 100억이 훌쩍 넘는 땅덩이에 투자하는 건 아깝지 않은 겁니까?”
일부 교수들이 움찔거리며 반박하지 못했다.
전임 총장이었던 백성웅이 부동산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던 것을 비꼬아 말한 것이다.
지금 모인 처장급 교수들은 대부분 백성웅 총장이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아직 임기가 남아서 교체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즉, 그들도 명인대의 장삿속에 어느 정도 일조한 것이 있지 않냐는 지적이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교수들을 향해 민우가 공격을 이어갔다.
“현재 일부 입찰 건에 대해서는 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당 입찰 정황이 있다지요? 여기가 대학인지 건설업체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건물을 올린다고 논문이 써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부끄러운 일입니다.”
“박민우 교수.”
서지훈 총장이 넌지시 경고하자 민우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말이 좀 샜네요.”
하지만 민우의 표정은 당당했다. 그의 발언은 감정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계산에 따른 결과였다.
그 한마디를 던짐으로써 피아식별을 제대로 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고, 서지훈 총장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교수들의 반응을 살피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부동산 이야기를 꺼낼 때 불쾌한 기색을 보이는 것만큼 통쾌한 반응을 보인 교수들도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서지훈 총장이 손뼉을 쳤다.
“자자, 너무 과열된 것 같은데, 조금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갑시다. 예산이 부담스럽다는 것도 맞는 말이고, 후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타당성이겠지요. 우리는 대학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철저히 확인하고 따져봐야 합니다.”
잠시 말을 끊은 서지훈 총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박두진 학장이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민우에게 반론을 펼친 교수들은 잔챙이에 불과했다.
진정한 보스는 경영학부장을 맡고 있는 박두진이었다.
그는 일견 점잖게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속에는 백 년 묵은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서지훈 총장도 예의주시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박두진 교수.”
“예. 총장님.”
“교수께선 우리 대학의 재정적 안정화에 많은 기여를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상경계열 교수들의 존경을 받고 계시고 말이죠.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만.”
“음…….”
신중히 말을 고른 박두진 학장이 점잖게 운을 뗐다.
“35억이라는 돈은 적은 돈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많은 돈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엔 기회비용을 따져야 할 겁니다.”
“기회비용이라면, 달리 쓰면 더 좋다는 말씀입니까?”
서지훈 총장이 물었고, 박두진 학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경우엔 어느 쪽에도 쓰지 않는 쪽이 더 현명한 처사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민우가 물었고, 시선을 민우 쪽으로 돌린 박두진 학장은 다시금 점잖게 웃었다.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 태도에서 엄청난 내공이 느껴졌다.
“국립이든 사립이든…… 대학은 서로 경쟁하고 있지만 때로는 협력하며 공생하는 관계지요. 특히 사립대는 총장급 협의회도 있고 여러모로 얽혀 있는 게 많아요. 그 상황에서 우리가 송곳처럼 행동한다면, 주머니를 뚫고 나와 모두의 질타를 받게 될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만 모나게 행동한다면 다른 대학에서도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상도덕이라는 게 괜한 이야기가 아니죠!”
“괜히 돈 써서 욕 먹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박두진 학장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두진 학장이 언급한 내용은 민우도, 서지훈 총장도 예견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반론을 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래도 민우는 물러나지 않았다.
“학장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다른 대학의 눈치를 보느라 좋은 정책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건 여러모로 손해라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정책이라는 표현은 틀렸습니다. 정책에 좋고 나쁨은 없지요.”
박두진 학장은 손가락을 하나 들더니 미소를 지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기묘한 미소였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라고 할까…… 지금 우리 대학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잘 활용할 만한 역량이 없습니다. 애석하게도.”
견고한 성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민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론으로 부딪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꺼낸 것도 정론이었다. 좀 더 묵직하고 커다란.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를 이루고 있지요. 우리는 그걸 생태계라고 부릅니다. 오랜 세월 안정된 학계의 관례를 무모한 실험으로 망칠 이유가 있을까요? 올바르지 않다면 그것은 시간이 도태시킬 겁니다. 우리가 애써 재촉할 필요 없다는 거지요. 으음, 제 견해는 여기까집니다.”
박두진이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마이크에서 물러났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민우와 서지훈 총장의 눈이 마주쳤다.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는 어렵다는 사인을 보낸 것이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계속 대립각을 세운다면 불협화음이 생긴다.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회의가 파행되면 서지훈 총장 입장에서도 정치적인 부담이 커진다.
민우의 배려를 헤아린 서지훈 총장은 웃어 보였다.
이 정도면 됐다, 수고했다.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제가 한마디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민우도, 서지훈 총장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 선거 운동을 할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던 강유찬 학장이었다.
그는 의과대학의 학장으로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웅성거리던 주변이 고요해졌다.
회의가 새 국면을 맞이했다. 그것을 느낀 서지훈 총장이 손을 내밀며 권했다.
“강 교수님. 말씀하시죠.”
“의대에서 괜히 대학 운영에 왈가왈부하기 좀 그렇지만…… 저는 박 교수의 제안을 좀 더 곱씹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우의 눈이 순간 커졌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지원사격이 들어온 것이다.
“아마 여기에 계신 분 중 지난 총동문회에 참석하신 분이 계실까요? 그때 박 교수는 이렇게 말했죠. 우리 후배들을 위해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말이죠. 참 마음이 뭉클해지더군요! 생각만 하는 것과 말로 실천하는 건 천양지차지 않습니까?”
몇몇 교수들이 힐난하는 눈빛으로 강유찬 학장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말로 딴지를 걸지 못했다. 그만큼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저는 이번 정책이 그 연장선에서 나온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르고 건강한 학계를 만드는 것이 곧 우리 후배들을 위하는 길이 될 테니까 말이죠. 좋은 음식을 먹어야 몸이 건강해지듯이 말이죠. 아, 이거 너무 말이 길어진 것 같아서 죄송하군요. 이상입니다.”
그때 한쪽에 있던 김종필 학장도 손을 들었다.
그는 일전에 자얀과 만나 거액의 투자를 약속받은 공과대학장이었다. 오일 머니 덕분에 지금 공대는 축제 분위기였다.
“역시 강유찬 학장님이십니다. 좋은 말씀을 해주셨군요! 박민우 교수는 명인대에서 교편을 잡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오래도록 대학에 몸담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네요. 후배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김종필 학장의 가세는 민우에겐 조금 의외였다.
하지만 자얀과 자신의 개인적인 친분,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투자를 생각한다면 그가 두 팔 걷고 나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눈매를 좁힌 김종필 학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까지 대학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겁니까? 기존 체제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만 새 시대를 열 수 있는 겁니다. 이번 기회에 통 큰 투자를 결정했으면 하는군요. 우리 공대 교수진은 박민우 교수의 정책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잠시만요. 김 교수.”
“예. 총장님.”
“공대 교수진이라고 하셨는데 사전에 논의가 끝난 겁니까?”
“그렇습니다.”
서지훈 총장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것은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의대와 공대 두 곳에서 힘을 모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서지훈 총장이 제안했다.
“다들 의견이 팽팽하니 투표로 결정했으면 하는데,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진행하시죠.”
일이 이렇게 되자 박두진 학장은 입을 꾹 다물 뿐 거부하지 못했다.
서지훈 총장이 직원을 불러 투표를 준비시켰다. 회의실 뒤쪽에 놓인 거대한 스크린에 찬성과 반대, 그리고 기권 항목이 띄워졌다.
“이번 투표는 사안이 중대한 만큼 기명으로 진행하지요. 자, 그럼 시작합시다.”
서지훈 총장의 말과 함께 교수들이 테이블 앞에 놓인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민우는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결과 집계가 끝나고 스크린에 숫자가 출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