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09화 (409/500)

처장급 회의 (1)

며칠 후, 연구실에서 논문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민우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평소보다 더 복장에 신경을 쓴 서강일이었다.

“어? 웬일이야?”

“이럴 줄 알았다. 어째 연락도 없더만. 오늘 학장 면접이었잖아. 까먹고 있었지?”

“아! 맞다.”

“친구를 사지에 몰아넣고 팔자 좋게 논문이나 보고 있고. 쯧. 명인대 클라스 알 만하다.”

“하하하. 일단 앉아.”

민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를 권했다.

시간강사 처우 개선에 관한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고, 거기에 개인 연구까지 이어가다 보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인문대 학장 면접이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학장 면접에는 각 학과장과 인문대 학장이 참석한다.

형식상의 면접이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전임 교수도 아니고, 시간강사 선발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니까.

시간강사는 학과 추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편이다.

서강일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국문과 학과장인 설예라 교수는 물론, 인문대 학장과 이야기가 모두 끝난 상황.

설예라 교수와 인문대 학장은 한일대에서 온 젊은 학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단순히 그가 경력과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 학술계를 명인대와 한일대로 양분할 수 있다면, 수십 년간 이어져 왔던 경쟁 구도를 이번 기회에 역전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강일 영입은 시작에 불과하다.

서지훈 총장을 비롯해 학장급 이상의 시니어 교수들은 민우를 교두보로 활용하여 한일대의 뛰어난 젊은 교수들을 영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전쟁에서 장수가 필요한 것처럼,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출중한 장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면접은 어땠어?”

민우가 물었고, 서강일은 심드렁히 대답했다.

“면접이 그냥 면접이지 뭐. 전임도 아니고 시간강사 면접에 뭐 대단한 게 있겠냐?”

“출신을 문제 삼은 사람은 없었지?”

“딱히.”

인문대 학장이나 국문과 학과장은 몰라도, 다른 과 학과장들이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명인대 출신의 젊은 강사들이 있는데 왜 라이벌 대학의 인재를 데려다 쓰냐고.

민우가 이번에 전임 교수로 채용되어 암묵적인 룰을 깨긴 했지만 이제 반년이 지났을 뿐이다. 관례가 흐릿해지려면 여전히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특별히 말이 오가지는 않은 것 같다.

서강일이 자존심 때문에 있던 일을 없었다고 말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설예라 선생님이 기대 많이 하고 계시더라. 요즘 네가 매스컴에 많이 나오니까 궁금한 게 많으신가 계속 물어보시더라고.”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면접장에서 직접 여쭤보라고 했지.”

민우가 마치 남 일처럼 말했고, 한숨을 내쉰 서강일은 다시금 혀를 찼다.

“어쩐지. 이것저것 많이 묻긴 하시더라. 이제 네가 결재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채용은 확정될 거고…… 여기에 1년 정도만 있으면 되나?”

“아직 강사 계약서도 안 썼는데 벌써 나갈 궁리를 한다고? 오퍼 받은 데 있냐?”

“오퍼야 오는 데는 많지. 그래도 내가 돈 보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잖냐?”

“그렇지. 우리 서강일 선생님은 의협심 넘치는 분이지.”

“그래도 여기서 구체적으로 뭘 할 건지 공유는 해 줘야 할 거 아냐. 나도 여기서 한가하게 강의나 하려는 게 아닌데.”

팔짱을 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강일 입장에서는 많이 궁금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는 책상에 놓아둔 서류철을 집었다. 그리고 조금의 고민도 없이 그것을 서강일에게 건넸다.

“뭔데?”

“네가 궁금해하는 거.”

일단 서류철을 받아 커버를 넘겨본 서강일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명인대에서 쓰는 양식으로 작성된 문서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근 김명현과 협력하여 작성한 기획서의 최종 완성본이었다.

뒤를 슥 돌아본 서강일이 조심스레 물었다.

“야. 이거 대외비 아니냐? 막 보여줘도 돼?”

“너를 그냥 시간강사로 생각했다면 당연히 안 보여줬겠지.”

“음…….”

이제는 같은 배를 탄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다시 서류철을 펼친 서강일은 내용을 신중히 검토했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와 함께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곧 서강일이 서류를 손가락을 툭툭 치며 말했다.

“박민우 작품치고 의외로 현실적으로 쓰였네. 이 정도라면 비벼볼 만한데?”

“나 혼자서 쓴 게 아니거든.”

“한진섭 선생도 거들었어?”

“아니. 김명현 실장이 도와줬지.”

서강일이 다시금 놀랐다.

그도 김명현이 명인대에서 무슨 일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휴머니티’ 멤버 중 김명현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민우는 굳이 자신과 김명현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진 않았다. 그저 웃으며 서강일이 건네는 서류철을 받아들 뿐이다.

“일단 이번 학기는 이 기획서로 밀어붙이고, 성과를 평가한 다음에 다음 학기에 좀 더 빡세게 쪼아볼 생각이야.”

“하긴, 예산을 한 번에 따내긴 쉽지 않을 테니.”

“인문학 프로그램 강좌는 추가하는 것으로 확정되는 분위기야. 그래서 국문과에서는 널 내보내고 싶은데…… 어때?”

“무슨 강사 채용 결정도 안 났는데 프로젝트를 던져주고 있냐?”

헛웃음을 지은 서강일이 결국은 두 손 들었다.

“에휴, 상사가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그래서, 프로그램 개강은 언젠데?”

“이번 달 말이야.”

민우는 테이블 옆에 놓인 팸플릿을 서강일에게 툭 던졌다.

“저번 학기 인문학 프로그램 때 쓴 팸플릿이야. 거기에 없는 주제로 강의계획서 써서 제출해. 선착순이니까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하, 정말 일거리가 끊이질 않네.”

한숨을 내쉰 서강일이 팸플릿을 주워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우도 따라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오랜만에 왔는데 좀 더 놀다 가지.”

“선착순이라며?”

피식 웃은 민우는 연구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서강일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고생해라.”

“오냐.”

민우는 연구실 앞에 서서 서강일을 배웅했다.

* * *

다음 날 오후, 명인대 소회의실에서 서지훈 총장 주재로 처장급 회의가 열렸다.

명인대 대학본부의 각 처장 교수는 물론, 각 학부의 학장까지 모인 중요한 회의였다.

“박 교수.”

“학장님. 안녕하십니까.”

“요즘 이래저래 바쁘게 뛰어다닌다던데. 어때. 성과가 좀 있습니까?”

회의실 앞에서 만난 사람은 경영학부장 박두진이었다.

나비넥타이를 맨 그는 외모와 목소리처럼 매우 점잖은 사람이었다.

명인대 경영학부는 의학부, 법학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화려한 교수진은 물론, 배출한 학생들이 정재계 곳곳에 포진해 있어 그만큼 권력이 막강한 곳이었다.

민우는 정중히 웃으며 말했다.

“성과라고 말하기 부끄럽습니다만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학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네요.”

“박 교수의 명성이야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내가 도와줄 게 있으려나 모르겠군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만큼 돈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민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번 시간강사 처우 개선의 건이 2학기 집행 예산에 달려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것은 경영학에 정통한 박두진 학장도 공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산은 이념이 아니라 숫자니 더욱 어려운 면이 있지요. 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점을 잘 알아두면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이만 들어갑시다.”

민우는 박두진 학장과 함께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호의적인 시선도, 그렇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의식하지 않고 당당히 걸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교무처장의 자리는 총장 다음가는 상석이었다.

그래서일까. 명인대의 능구렁이들은 젊은 그가 요직을 차지한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이 중엔 내 편이 얼마나 있을까.’

민우는 눈인사를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반도 되지 않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힘든 싸움이 되겠어.’

그나마 자얀의 활약으로 김종필을 비롯한 이공계 학장들이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게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과반수의 찬성표를 얻지 못하면 이번 시간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안건은 폐기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개선안은 매우 중요했다. 만약 엎어진다면, 서지훈 총장과 함께 세워 둔 대학 개혁의 꿈이 시작부터 삐거덕거리게 된다.

“박 교수님.”

그때 느지막이 도착한 김명현이 다가왔다. 그가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준비는 어떠십니까?”

“한다고 하긴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생각보다 반응이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처장급 회의가 소집되기 전, 민우는 보직 교수들을 만나 이번 개선안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하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혜택에만 관심이 있지 후발 주자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것이다.

“대안은 있으십니까?”

“대안이라고 할 만한 건 없습니다. 늘 그렇듯 정론으로 부딪쳐 봐야죠. 이번 싸움은 명분의 싸움이 될 겁니다. 실리는 나중의 일이고.”

“알겠습니다. 지켜보고 있지요.”

“지켜보지만 말고 좀 도와주세요.”

민우의 농담에 씨익 웃은 김명현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말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곧 문이 열리고 서지훈 총장이 들어왔다.

모든 처장급 교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재자석으로 걸어오는 서지훈 총장의 모습은 평소와는 좀 달랐다.

‘위엄’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상황.

민우는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이 새겼다. 언젠가 자신도 저 길을 걸어가야 할 테니까.

“다들 앉으시죠.”

구성원들이 모두 착석했다. 회의 준비가 끝났다. 서지훈 총장이 마이크를 잡고 모두발언을 시작했다.

“제가 임기를 시작한 이후로 처음 여는 처장급 회의네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대학 내부는 물론, 국민들께서 우리 대학을 주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분명한 결과를 내야 할 겁니다. 우리 명인대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니 말이죠.”

괜히 편 가르기하면서 싸우지 말라,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일까. 민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지훈 총장이 교수진을 온전히 장악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그럼 첫 번째 안건을 검토해 봅시다. 박 교수. 시작합시다.”

“예.”

민우가 마이크를 가까이 당겼다. 그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방금 총장께서 말씀하셨듯, 우리 대학은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고 있는 글로벌 명문입니다. 대학의 기본은 교육과 연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교육 부분에 있어서 불안정한 요소들이 예전부터 끊임없이 지적되어 오고 있습니다. 바로 강사법 때문입니다.”

민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안건에 대해 전달받은 상태.

서론이 길면 그만큼 효과는 반감되는 법이다. 그래서 민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사법 자체의 취지는 좋습니다. 강사들에게 교원 지위를 부여하고 처우를 개선한다는 골자로 만들어진 법안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대학에서는 강사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대학본부에 유리한 부분만 취했습니다. 바로 그 부분이 문젭니다.”

민우의 날 선 비판에 몇몇 처장급 교수들이 눈매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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