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08화 (408/500)

선례를 만들지 말라 (3)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김 선생님의 논문을 잘 이해해 주는 학회에만 투고하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예. 맞습니다. 굳이 서로 감정 상하면서 연구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논문을 쓰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말이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김경식은 씨익 웃으며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민우는 빨대를 휘휘 저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다른 의미로 말이다.

명인대 철학과 정호림 교수와의 트러블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건 연구 역량의 문제다.

한마디로 김경식은 자신의 논문이 공격당하는 것을 두려워해 소규모 학회에만 논문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학회 규모가 작으면 그만큼 투고 논문이 적게 들어오고, 학회지에 게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올라간다.

즉, 보통이라면 학회가 ‘갑’이지만 이 경우는 연구자가 ‘갑’이 되는 것이다.

김경식은 그 차이를 이용해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네요.”

민우가 한마디 던졌고, 김경식은 물론 원순철 학장도 이어질 민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일대에서 박사까지 하신 분이 서류 전형에서 제일 많이 보는 부분을 모르시진 않을 테고…… KCI급 이상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신 적이 없다면, 다른 지원자들과 서류 전형에서 격차가 많이 벌어질 겁니다.”

“아,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신데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박 교수에게 직접 소개한 거라네. 박 교수는 특별 임용권이 있지 않나? 서류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실전에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믿네.”

원순철 학장이 거들었다. 마치 이기적으로 욕심을 부리는 학부모 같은 느낌이 들어 민우는 굳이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답답했는지 김경식이 나섰다.

“학회를 등급으로 나누고 거기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된 행태입니다. 연구의 자율성을 저해할 가능성이 충분하죠. 그러니 너도나도 KCI급 이상의 학술지에만 몰리고 중소규모 학회는 고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거 큰 문젭니다.”

“그건 저도 동감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소규모 학회에 논문을 보내고 있고요.”

“현대서사학회에서의 활약은 익히 들었습니다.”

김경식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서 현대서사학회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김경식은 마치 주도권을 잡은 것처럼 자신 있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 학회는 등재후보지도 아닌데 많은 학자분들이 모여 성황리에 학술대회를 치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박 교수님도 이수빈 교수님도 거기에 논문을 발표하셨고요. 제 입장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봐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김경식은 팔짱을 끼더니 다소 거만하게 말을 매듭지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갈 줄 예상했던 것이 분명했다. 김경식의 말은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외려 그는 교수 청탁보다 잘못된 학계의 관행을 바로잡는 게 중요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말에 힘이 실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당할 민우가 아니었다.

민우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었으니.

“맞아요. 맞는 말씀입니다. 현대서사학회도 등재학술지는 아니죠. 하지만 현대서서학회는 학술대회에 100명 이상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큽니다. 소규모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입니다. 학회가 추구하는 바도 좀 다르고요.”

“그렇다면 역시나 박민우 교수님은 규모가 있는 학회가 더 우수한 학회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 거겠군요? 미등재지는 열등하고, 등재지는 우수하다. 이런 식의 논리로 말이죠.”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에 깜짝 놀란 것은 민우가 아니라 원순철 학장이었다. 엄청난 실례였다. 그는 김경식의 허벅지를 찌르며 눈치를 줬다.

“말조심하게!”

“저도 느낀 바를 말씀드린 겁니다.”

“자네…….”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원순철 학장은 오만상을 쓰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김경식 입장에서는 무례를 범할 만도 한 게, 뒤에 원순철 학장과 최재석 교수가 있고, 또 민우가 그들보다 연차가 적기 때문이었다.

조금 압박을 주면 알아서 꼬리를 말지 않을까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오판이었다.

“미등재지는 열등하고 등재지는 우월하다라…… 위험한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민우가 중얼거렸다.

원순철 학장은 더는 도와주지 못했다. 그는 민우를 자주 봐 왔다. 지금 민우가 어떤 심리 상태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김경식의 허벅지를 계속 찔렀다. 무례는 그만두라고.

하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김경식은 자신의 말을 거두어가지 않았다.

민우는 더 이상 배려해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김 선생님의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돌려 말씀드렸지만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대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제가 학회의 규모와 등급을 강조하는 것은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학회의 논문 심사 제도 때문이죠. 세상에 위대한 학회는 없습니다. 위대한 연구자가 있으면 모를까.”

민우가 훈계하자 김경식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가 말한 ‘위대한 연구자’가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김경식 본인은 아니라는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규모가 작을수록 심사가 허술하니 논문을 싣기가 그만큼 수월해지겠죠. 그렇다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논문이 학계에 고스란히 노출될 겁니다. 요즘은 논문도 집에서 쉽게 볼 수 있게 되어 있어요. 학회도 서비스 플랫폼과 계약해서 수익을 내고 있고, 학부생들도 과제할 때 많이들 이용합니다. 즉, 심사 제도가 허술하면 인터넷에 가짜 정보가 판치는 것과 다를 게 없게 되는 겁니다.”

“가짜 정보라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아아, 김 선생님의 논문이 그렇다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고요. 일반론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김경식을 질책하는 듯한 말이었다.

그 기세를 몰아, 민우는 깍지 낀 팔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조용히 김경식을 바라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김 선생님은 본인 논문이 논박당하는 게 무서워서 마이너 학회에만 논문을 내는 건 아닙니까?”

“…….”

민우의 한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그러지 않고서야 김경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리가 없었다.

그것은 부끄러움과 분노가 섞인, 그런 원색적인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마이너 학회에 논문을 냈다고 다 겁쟁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민우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에 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전화 한 통이면 다 알 수 있거든요. 뭐, 정호림 선생님께 전화할 것도 없이 한일대 철학과 쪽에 계신 선생님께 연락만 드려도 알 수 있겠죠. 이 바닥 좁은 거 아시잖아요?”

“으윽…….”

“김 선생님을 협박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해하진 마세요. 교수 채용할 때 대학이든 학회든 전화 돌려서 레퍼런스 콜 하는 건 기본이잖아요.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제가 쉽게 대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김경식은 끝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설픈 논리로 자신을 변호하며 시간을 끌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런데 민우가 향한 곳은 화장실이 아니었다.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다 그만두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어차피 남한테 듣는다고 해도 결국은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해.’

민우는 다시 화장실로 장소를 옮겼다.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 평소 이용하던 논문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김경식의 논문을 검색했다.

네 건의 논문이 올라와 있었다. 매년 한 편씩 투고했다고 쳐도 수가 굉장히 적은 편이었다.

‘원순철 학장님이 직접 나선 일이니 나도 답례를 해야겠지.’

민우는 논문 네 편을 모두 다운로드했다.

파일을 열자 그의 눈이 번뜩였다. 민우의 눈에만 보이는 푸른 빛이었다. 언젠가 흡수한 유물의 능력이 발동되며 민우를 속독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 상태로 5분 정도 앉아 있던 민우는, 한숨을 한 번 내쉬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머릿속엔 지금까지 썼던 김경식의 소논문 내용이 오롯이 들어차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김경식이 논문에 저지른 수많은 오류와 잘못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할 수 있었다.

민우는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갔다.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원순철 학장이 밥값을 계산했다. 근사한 곳이라 그런지 가격이 상당했다.

민우는 함께 밖으로 나오며 인사했다.

“잘 먹었습니다. 학장님. 이 집 요리 참 좋네요. 다음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괜찮네. 잘 먹었으면 됐지 뭐.”

원순철 학장은 씁쓸히 웃고 말았다.

바로 김경식 때문이었다. 민우에게 제대로 당한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그래서 나올 때는 두 사람만 있었던 것이다.

민우는 화장실에서 돌아오자마자 논문 이야기를 꺼냈다.

김경식이 집필한 모든 논문을 구두로 요약했고, 논리적 결함과 문제점을 무수히 읊기 시작했다.

김경식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의자 뒤로 넘어갈 뻔했다.

무엇보다도 민우가 무단 도용으로 의심되는 부분을 지적하며 연구 윤리에 대해 언급하자 그대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논문이 논박당하는 게 싫은 건지 아닌 건지 본인 입으로 끝내 말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줄행랑을 친 걸 보면 사실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원순철 학장은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보더라도 김경식은 인재가 아니었다.

시간강사로 활동하기에도 내공이 부족해 보였다. 민우의 지적이 수도 없이 나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논파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민우의 학식이 망망대해를 보는 것처럼 넓고 깊음을 느꼈다.

“자네의 공부가 그렇게 깊은 줄은 몰랐어. 김 선생 논문을 언제 다 읽었던 건가?”

“문사철 관련 논문은 거의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워낙 허술해서 기억에 남아있었네요. 가능하면 좋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었는데 분위기가 그렇게 안 되었잖습니까.”

“후우,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리더군. 최 교수에게 한소리 해야겠어.”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후배 예뻐 보이는 거야 누구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민우 입장에서는 원순철 학장에게 얼마든지 쓴소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혀 득 되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유화책은 분명한 효과를 보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내가 괜한 일로 박 교수의 시간을 뺏었군. 혹시…… 오늘 일을 총장께 보고할 생각인가?”

“걱정 마세요.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그럼요.”

원순철 학장이 반색했고, 민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명인대 정문으로 방향을 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제도가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행착오도 분명히 있겠죠. 오늘처럼 말이죠. 다음에는 명인대를 발전시킬 만한 훌륭한 인재를 추천해 주시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그래. 반드시 그렇게 하겠네! 대학을 위한 자네의 마음은 이번에 분명히 알았으니 말이야.”

“감사합니다. 학장님.”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민우는 가능한 인정을 베풀기로 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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