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례를 만들지 말라 (2)
“역시 박 교수, 호탕해. 하하하하!”
원순철 학장의 입꼬리가 귓가에 걸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뜨뜻미지근하던 민우의 태도가 갑작스럽게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 좀 더 신중히 접근했어야 했다.
민우는 마지못해 원순철 학장의 청을 들어준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한 방 먹일 작정이었다.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할 정도의 청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민우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 얼마나 부담이 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괜찮은 사람이면 이력서 넣어보라고 하면 그만이야. 채용 여부는 그 이후에 결정하면 되니까.’
하지만 수준 미달이라면, 그냥 원순철 학장 앞에서 면박을 줄 생각이었다.
민우는 최재석 교수의 후배가 인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문을 두드린다는 것 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원순철 학장이 핸드폰을 꺼냈다.
“음, 그래그래. 지금 바로 오면 되네. 그때 그 레스토랑 알지? 그래. 그쪽으로 오면 돼. 박 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빨리 오게.”
그 주인공과 통화를 끝낸 원순철 교수는 기분이 좋은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곧 도착한다고 하는군. 분명 박 교수도 마음에 들 게야! 아주 빠릿빠릿한 친구거든. 하하하. 자자, 식기 전에 어서 들게.”
“예.”
두 사람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는지 평범한 것으로 화제가 바뀌었다. 원순철 학장은 민우의 딸 근황을 물으며 육아의 고충을 나눴다.
그리고 메인 음식을 다 먹은 후, 두 사람은 디저트로 커피를 시켰다.
그때 웨이터가 시원한 커피 대신 사람을 하나 데리고 나타났다.
군청색 정장을 걸친 호리호리한 사내였다. 나이는 민우의 또래, 서른 중후반쯤으로 보였다. 표정엔 나름 야심이 있어 보였다.
남자는 민우와 눈이 마주치자 90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박 교수님. 김경식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경식과 악수했다. 민우는 표정을 풀고 자연스럽게 웃었다. 일부러 김경식이 방심하게 하게끔.
민우가 물었다.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 예. 먹고 왔습니다.”
“그럼 커피 한잔하시겠어요? 자리를 옮기긴 좀 애매해서.”
“좋습니다.”
괜히 자리를 옮기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민우는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른 후, 커피를 한 잔 더 추가했다. 민우가 입을 다물고 있자 원순철 학장이 분위기를 띄웠다.
“박 교수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서른여섯입니다.”
“오, 그런가? 그럼 김 선생과 동갑이군!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되겠어.”
민우는 그저 웃고 말았다.
동갑이라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다. 누구는 강단과 방송국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다른 누구는 교수직 청탁이나 하고 있으니까.
‘하긴, 그걸 알았다면 이렇게 난처한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겠지.’
한때 원순철 학장과 의기투합하며 새로운 명인대를 만들어 보자고 다짐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냉혹했다.
“아, 동갑입니까? 정말 놀랍네요! 저는 아직 자리도 잡지 못했는데, 박 교수님은 명인대 전임교수에 세계적인 석학으로 칭송받으시니 말이죠.”
그걸 칭찬이라고 하는 거냐?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웃었다. 이럴 땐 어떤 말을 해 줘야 하나.
“열심히 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운도 좋긴 했지만 정말 후회 없이 공부했으니까요. 예전엔 많이 놀았는데 대학원 들어오고 나서 열심히 했습니다.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고.”
“하하하하. 그러셨군요. 저도 좀 분발하고 싶은데 이거 영 기회가 오지 않네요.”
“기회는 본인이 만드셔야죠.”
민우가 지나가듯 충고했다.
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원순철 학장은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우리 박 교수가 난사람은 난사람이지. 그래도 김 선생도 나름 열심히 했다네.”
“최 선생님 직속 후배라 하셨으니 명인대 나오셨겠네요. 학부에선 뭐 전공하셨습니까?”
“철학입니다.”
일단 전공은 합격점이다.
교양학부 과목들은 대개 인문학적인 내용을 다루기 때문에 철학이나 문학 전공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 이상하네.’
김경식은 흔한 이름이지만 최근 철학 분야 논문에서 본 적이 없었다. 학문에 관해서만큼은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확실했다.
게다가 명인대 철학과 출신 박사라면 이름을 모르래야 모를 수가 없다. 그쪽 분야와도 공동연구 같은 걸 진행하며 얽힌 게 많기 때문이다.
‘뭔가 있구나.’
그렇게 결론 내린 민우는 질문의 범위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철학과라면 저도 좀 인연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정호림 선생님 문집에 제 논문을 실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셨군요.”
역시나 김경식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그는 원순철 학장을 한번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김 선생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올해 명인대 전임이 되긴 했지만 석사 때부터 지금까지 학교에 있었거든요.”
“아, 그게 말이죠…….”
김경식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원순철 학장이 대신 나섰다. 이 자리가 교수 채용 면접이었다면 더 들을 것도 없이 탈락이었다.
그래도 민우는 기다려주었다.
“지도교수와 좀 트러블이 있었네. 그래서 석박사는 한일대에서 했지.”
“트러블이요?”
민우는 속으로 걸려들었다 싶었다. 그는 표정을 진지하게 하곤 다시 물었다.
“어떤 트러블입니까? 학부 지도교수는 누구였는데요?”
“음, 자네가 말한 정호림 교수일세.”
마음 같아서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척하며 정호림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민우는 잘 참아냈다.
“그렇군요. 음, 김 선생님. 정호림 선생님과 무슨 트러블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개인적인 궁금증은 아니고요. 명인대 교무처장으로서 참고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되네요.”
“학부 졸업 논문 때문에 좀 견해차가 있었습니다.”
“견해차요.”
“예.”
김경식은 말을 최대한 아끼려고 하는 게 보였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논문 때문에 감정이 상하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지요. 그래도 대학원 진학을 포기할 정도의 일이었는지 의문이 들긴 하네요.”
민우가 그렇게 반문한 이유가 있다.
보통 학부 졸업 논문은 깐깐하게 보지 않는다. 기존 논문을 요약하는 정도의 수준으로도 통과시켜 주는 게 관례다.
특히나 요즘은 학문적 성취보다 취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졸업 논문 제도를 폐지하고 영어 등의 어학 점수로 졸업 요건을 설정하는 대학이 점차 느는 추세다.
그 상황에서 졸업 논문으로 다퉜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김경식이 답했다.
“대학원은 논문을 쓰는 곳이잖습니까. 학부 논문조차 그렇게 공격을 받는다면 자대에 진학한다고 해서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그럼 한일대에선 어떠셨습니까? 한일대도 제가 잘 아는데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쪽에서는 별다른 문제 없이 졸업했습니다. 박사 학위가 그 증거고요.”
그건 맞는 말이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학문적 성취가 모자란 사람에게 박사 학위를 줄 정도로 한일대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휴머니티’의 핵심 멤버인 서강일과 강민희가 국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딸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석박사를 땄다면 적어도 학문적인 역량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는 소리.
그때 원순철 학장이 나섰다.
“박 교수. 서로 불편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건 어떤가? 응?”
“전 전혀 불편한 게 없습니다. 김 선생님은 불편하십니까?”
“아, 아뇨. 아닙니다.”
민우가 정색하자 두 사람이 꼬리를 내렸다. 민우가 질문을 이어갔다.
“이렇게 됐으니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냥 식사나 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학장님께서 교수 후보 추천을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분도 아니고 학장님 부탁이라 김 선생님을 모시게 된 거고요.”
“아아. 예.”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가 혼자 판단하기엔 조금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호림 교수님의 제자이시면서 한일대에서 학위를 따신 것도 그렇고. 철학과가 아니라 교양학부로 지원을 하시려는 것도 좀 이상하고. 이 상황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민우는 김경식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원순철 학장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김경식이 답했다.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호림 교수님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양학부에 들어가고 싶은 겁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사이가 좋지 않은 게 임용 결격사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살다 보면 사이가 틀어지는 일 정도야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김경식은 나름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 성의는 인정해 줄 만했다.
“결격사유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 말인데. 연구 실적은 어떻게 쌓고 계십니까?”
“일 년에 한 편씩은 꾸준히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한 편이요?”
“예.”
당당한 대답에 오히려 민우가 당황했다.
예전에는 일 년에 한 편이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양적인 경쟁이 붙으며 요즘은 일 년에 두어 편도 적은 편이다.
하지만 민우는 양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의미 있는 연구를 꾸준히 낸다면 일 년에 한 편도 많은 거니까.
그래서 물었다.
“어디에 주로 논문을 실으십니까?”
“매년 한일사상학회에 내고 있습니다. 최근엔 강의를 좀 하느라 논문 쓸 겨를이 없었네요.”
“한일사상학회요? 어떤 학회죠?”
“한일대 철학과에서 만든 소규모 학회입니다. 분기마다 꾸준히 학회지를 발표하고 있죠.”
“…….”
민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학과에서 만든 소규모 학회엔 등급이 없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소규모 학회에 논문을 발표한 게 그가 말한 업적인 것이다.
이제야 원순철 학장이 따로 자리를 마련한 진짜 이유를 알게 됐다.
‘이 사람, 서류 전형도 통과 못 할 사람인데? 그래서 따로 청탁을 하는 거구나.’
명인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에서 연구 업적을 심사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이 게재 학술지의 ‘등급’이다.
보통 인문계에서는 KCI급 이상을 A급, KCI등재 후보지를 B급, 미등재지를 C급으로 본다.
김경식이 말한 한일사상학회는 최하등급인 C등급의 학회다.
물론 C등급 학회라고 해서 나쁘다는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민우는 소규모 학회를 좋아하는 편이다.
다만 교수 임용이라는 상황으로 한정했을 때, 다른 사람과 서류를 놓고 공정히 경쟁하게 되면 상대가 안 되는 것이 문제지.
“김 선생님. 제가 진지하게 여쭙고 싶은 말씀이 하나 있는데…….”
“편하게 하시죠.”
“등재지급 이상의 학술지에는 논문을 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그쪽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뭐라고 할까. 논문을 보낼 때마다 근거 없는 부분에서 태클을 걸고 들어오니 상당히 불쾌하더군요. 그것도 무기명으로 말이죠. 그래서 제 철학을 잘 이해해 주는 학회에만 논문을 내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