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례를 만들지 말라 (1)
서지훈 총장과 면담을 마친 민우는 교무처로 돌아왔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모든 직원들이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처장님.”
1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찾아왔다고 해서 한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2학기를 위해 준비해야 할 때다.
교무처는 교강사 관리 및 학생들의 교과목 이수 등 포괄적인 업무를 수행하므로, 계절학기는 물론 2학기 개강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
민우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잠시 멈춰선 민우가 서류를 검토하던 변호영 과장을 불렀다.
두 사람은 처장실에서 독대했다.
“바쁜 데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처장님. 편히 말씀하십시오.”
“다른 게 아니고, 이러다 방학 끝나기 전에 회식을 못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괜찮은 날짜 좀 잡아주십사 불렀습니다.”
“아아. 회식이요. 안 그래도 직원들하고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 다음 주 금요일쯤 어떠십니까?”
“좋네요. 그럼 그날 저녁 비워두겠습니다. 나머지는 과장님께 맡기겠습니다.”
“예. 처장님. 그런데 혹시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실까요?”
변호영 과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민우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글쎄요. 딱히 없는데. 정하기 어려우시면 사다리라도 타시든지요.”
“……사다리요?”
변호영 과장이 눈을 끔뻑거리다 깜짝 놀랐다.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뭐 이상한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지금까지 여러 처장님들을 모셨지만 사다리를 타라는 분은 처음이셔서.”
“그래요? 그럼 이 기회에 한번 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저 대학원 시절에 자주 했었거든요. 편하고 좋습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직원들하고 한번 상의해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변호영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민우가 손을 뻗어 그를 불렀다.
“잠깐만요. 과장님.”
“아, 예.”
한가하게 회식이나 잡아 보라고 변호영 과장을 부른 것은 아니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김명현 실장님이 별다른 말씀 안 하셨습니까?”
“했습니다.”
“어떤 말씀이었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변호영 과장은 어려워하는 것 없이 바로 답했다.
“처장님의 새로운 정책에 직원 모두가 힘을 실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렇군요. 새로운 정책이라고 하기는 좀 거창하지만 분명 의미 있는 일이 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부 내용에 대해선 들으셨지요?”
“네.”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변호영 과장 정도라면 정보를 공유해 주는 게 좋다. 실무 최고 책임자였으니까.
“그럼 소감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조금 다른 의미로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우 개선이라는 표현이 붙는 모든 정책엔 예산 문제가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데, 그 부담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현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7할 이상입니다.”
생각보다 높은 숫자가 나왔다.
사실 변호영 과장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제 처장급 회의에서 중역들의 지지만 끌어낼 수 있다면 시행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거기에 이공계에는 ‘오일 머니’가 투입되고 있었다. 인문사회계에도 과감히 투자할 명분이 세워졌다.
“교무처 직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예. 직원들 사기도 좀 올랐습니다. 처장님도 아시겠지만, 아무래도 두 분 사이에서 좀 어려웠던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변호영 과장은 단어를 조심스럽게 고르며 설명했다.
민우는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직원들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기뻐할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신다고 해도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많으니 말이죠.”
“명심하겠습니다.”
“과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언젠가 오늘을 추억하며 건배할 날이 올 겁니다.”
“예! 처장님.”
변호영 과장이 밖으로 나갔다. 한숨 돌린 민우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번호 세 개를 꾹꾹 눌렀다. 곧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 학장님. 박민우입니다. 지금 좀 찾아뵈려고 하는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 * *
그날 저녁, 민우는 명인대입구 역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교양학부의 원순철 학장과 약속이 잡혔다. 학교에서 만나려고 했지만, 원순철 학장은 굳이 밖에서 만나는 것을 고집했다.
민우는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뭔가 있어. 굳이 이런 자리에서 식사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래도 민우는 이유 없는 만남을 꺼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교강사는 물론 교직원의 인사권을 대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일행이 있으십니까?”
“박민우입니다.”
“원순철 님 일행이시지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레스토랑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민우는 셔츠의 맨 윗단추를 풀었다.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곧 원순철 학장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에 도달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박 교수! 요즘 아주 바쁜 모양이야. 얼굴 보기도 어렵고 말이지. 하하하하.”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말에는 뼈가 있었다. 민우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악수를 받았다.
“이거 죄송합니다. 진즉 찾아뵈었어야 했는데요.”
“아니, 아닐세. 박 교수에게 잔소리하려고 이렇게 부른 건 아니니까 말이야. 괘념치 말게. 큰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바쁜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웨이터가 물을 채워주었고, 식사 주문을 받아 돌아갔다. 테이블 근처는 비어 있어 상당히 조용했다.
그 고요함을 깬 것은 원순철 학장이었다.
“듣자 하니 요즘 재미있는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던데.”
“어떤 일 말씀입니까? 하고 있는 일이 좀 많아서요.”
“김명현 실장이 박 교수와 은밀히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있더군.”
“지나치게 자극적인 워딩이군요.”
민우가 간단히 평가절하하자, 원순철 학장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었고, 이내 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이거 내가 말실수를 했나 봐. 미안하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표현 자체가 뭔가 대립하고 있었다는 느낌이라서 말이죠. 지금은 조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박 교수의 말이 맞네. 조심할 때는 조심해야지.”
그때 식전 빵이 나왔다. 원순철 학장은 빵을 손으로 찢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박 교수 뜻대로 풀리지 않았나. 새로운 총장도 모셨고, 대학엔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지. 그래서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때인 듯싶어서 말이네.”
“말씀하시죠.”
“인문학 프로그램을 손본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인가?”
원순철 학장은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조금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애초에 원순철 학장이 마음을 돌린 것도 인문학 프로그램의 주도권이 다른 학부로 넘어가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사실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손볼 계획인가?”
“그건 아직 정해진 바 없습니다. 다만 큰 틀에서 강좌 수를 늘리는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강좌 수를 늘린다고?”
원순철 학장의 눈매가 좁아졌다. 민우의 말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강사 처우에 대한 문제는 학장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나 총장님의 숙원 사업이기도 하고요. 그 일환이라고 할까요.”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나?”
“인문사회계 쪽 강좌 수를 늘릴 계획입니다. 시간강사들에게 강의를 주고 강의료를 지급하려고 합니다.”
“오, 그렇군. 좋은 기획일세.”
원순철 학장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이공계 교수진을 경계하고 있었다. 민우가 ‘인문사회계’로 집어 말한 것은 그를 배려해서였다.
“그렇다면 우리 교양학부에는 크게 나쁠 일은 아니군그래.”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교양을 위한 과정이니, 당연히 교양학부에서 앞장서 주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좀 더 폭넓게 강의를 세팅하면 좋겠군요.”
“고맙네.”
원순철 학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우는 왠지 꺼림칙했다. 그가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아서.
원순철 학장이 포크질을 멈췄다.
“자네는 왜 안 먹나? 입맛에 안 맞나?”
“아닙니다. 많이 드시죠.”
그제야 민우도 포크를 쥐었다. 그 모습을 은근히 바라보던 원순철 학장이 물었다.
“그런데 말이지. 2학기 교수 임용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나?”
파스타를 감고 있던 포크가 뚝 멈췄다. 민우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임용 계획이야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진행해야지요. 특별할 게 뭐 있겠습니까?”
“최재석 교수 알고 있지?”
“예. 실제로 뵌 적은 몇 번 없지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최재석 교수는 학보사 주임교수로, 예전에 민우가 학생 기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총장선거법을 개정할 수 없었을 거다.
그제야 민우는 본론이 시작됨을 느꼈다.
원순철 학장은 교양학부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니다. 바로 청탁을 하려고 나온 것이었다.
“최 교수 직속 후배가 이번에 일자리가 필요한 모양이더라고. 인문학 프로그램도 그렇고, 교수 확충을 해야 할 시기이니 한번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하더군.”
입맛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민우는 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지훈 총장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진 않았다.
“일자리라면, 시간강사입니까?”
“에이, 이 사람도! 어엿한 학위가 있는 사람이 일자리를 찾는다면 정교수지 뭐겠나?”
원순철 학장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민우는 웃으며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새콤한 토마토소스가 입 안을 휘저었다.
“비전임이라면 모를까, 전임 교수직이라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제대로 절차를 거쳐 임용을 권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민우가 타이르듯 말했으나, 원순철 학장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웃었다.
“자네가 특별임용권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저 떠도는 풍문이 아닐 텐데?”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과 행사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그런 권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당한 과정을 거칠 생각입니다.”
“허어, 답답한 친구로세.”
원순철 학장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피 튀기게 싸워 놓고 원칙대로 행동한다고? 그 무슨 손해인가. 자네는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권리를 얻은 게 아닌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좀 실망인데요.”
민우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마찰음이 크게 들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쌓였다.
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대업을 망치려고 하냐, 명인대의 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한 것은 그저 연출이었나.
하지만 민우는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을 여기까지 불러내 음식을 먹이는 수고를 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지 말고 한번 만나보는 건 어떤가? 안 그래도 이 근처에 있다고 연락이 왔는데 말이지.”
자연스럽게 합석을 권할 생각이었던 듯하다.
민우는 흔쾌히 웃었다.
“좋습니다! 학장님 말씀이니 계속 사양하는 건 좀 실례인 것 같고.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부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