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가까이에 있다 (6)
확신에 찬 민우의 시선이 김명현을 향했다. 김명현은 그런 민우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네요.”
내밀어진 서류를 집었다. 그는 서류철을 펼치진 않고, 그저 테두리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박 교수님은 한없이 정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동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진심으로 말이죠.”
“저도 고민 많이 했습니다. 더 쉬운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네요.”
“자존심도 없으신 겁니까? 아니면…….”
김명현은 조심스레 말을 줄였다. 그를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다.
민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존심을 따질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 사람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지요.”
돌연 김명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민우가 건넨 서류철을 책상에 놓더니, 민우에게 권했다.
“잠시 나가실까요?”
“그러시죠.”
김명현이 앞장섰고, 민우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교육개발실에서 나온 김명현은 건물 밖으로 나가 산책로를 걸었다. 그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땀이 절로 흐를 정도로 날씨가 무더웠지만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그 와중에 민우를 알아본 학생들이 인사를 해왔다.
평소라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에 비해 김명현을 알아보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곧 그들이 도착한 곳은 누군가의 연구실도, 사무실도 아니었다.
인문관 옆에 있는, 명인대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작은 연못이었다. 돌아서 연못을 한번 둘러본 김명현은 기다란 벤치에 앉았다.
민우도 그의 곁에 앉았다.
“학생들이 많이 따르는 것 같군요. 그렇게 인사받기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고마운 일이죠. 학생들도 그렇고, 다른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쌓인 피로가 풀립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실감한다고 해야 할까요?”
“천생 교육자시군요.”
잠시 말이 끊겼다. 김명현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연못 위에 떠 있는 연꽃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같은 길을 걷고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주는 건 전혀 다른 것 같군요.”
김명현의 한마디에서 외로움이 느껴졌다.
의외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가 이렇게 감상에 빠질 줄이야. 하긴, 이렇게 인문관까지 함께 산책할 줄을 누가 알았을까.
민우가 답했다.
“실장님은 인정받기 위해서 일을 하십니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하하하! 오늘 참 재미있는 말씀을 많이 하시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관심과 존경을 받는다는 건 즐거운 일인데 말이죠.”
“이번 일을 통해서 좀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무엇을요?”
김명현의 고개가 돌아갔고, 민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민우가 담담히 말을 받았다.
“저는 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일은 끝까지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옳은 일, 제가 맞다고 생각한 일에만 집중했었어요.”
“새삼스럽군요. 그게 박 교수님의 매력 아닙니까?”
“하지만 그게 정답은 아니더군요. 세상엔 제 생각보다 더 다양한 형태의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서지훈 총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교수일 때는 한창 자신의 편이었던 그가, 이제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가 변절한 게 아니다.
지금까지는 소수의 편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절대다수의 편에 서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까. 서지훈 총장도 한 걸음 내디딘 것이다.
민우는 그 현상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자신의 상황에 대입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내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태도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번 시간강사 처우 문제 건만 봐도 알 수 있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도 뜻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말이 좀 빙빙 도는 느낌인데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실장님께서 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제가 밤새워 기획안을 써도 재미있는 물건이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프로그램을 만드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그게 새로운 정책의 토대가 될 거라는 것. 저는 그걸 강조하고 싶네요.”
“아하하하하하!”
김명현이 시원하게 웃었다. 그는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금 민우를 바라보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군요. 통찰이 대단하십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뭐, 편하실 대로. 하지만 박 교수께서는 교육의 자본화를 그토록 경계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행보를 대놓고 비판하실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건 아까 실장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고 싶네요.”
“어떤?”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아닙니까?”
김명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다시 연못 쪽으로 돌렸다. 그때 연못 밖에서 놀던 오리 떼가 푸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연못에 몸을 담갔다.
“저는 여전히 교육의 자본화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 스스로가 좀 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네요. 자리의 무게라는 것은 그래서 무겁게 느껴지는 거겠죠.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고 싶습니다. 기회가 온다면요.”
“그 말씀은, 역시 서지훈 총장님의 이후를 보고 계시는군요.”
“일단은요.”
민우는 결론을 내렸지만, 김명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불어오는 여름 바람을 맞으며 자리에서 일어설 뿐이다.
“전에 총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 있습니다. 실장님은 저의 아주 모범적인 안티테제라고 말이죠.”
“…….”
김명현도 가방끈이 긴 사람이었다. 지금 민우가 꺼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진 않았다.
“처음엔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했었는데, 이제는 총장님께서 제대로 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실장님 덕분에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교수님!”
그때 인문관에서 나오던 학생 한 무리가 민우를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기껏 와서 인사를 하는데 그냥 돌려보내기가 미안했다.
민우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학생들과 안부를 나눴다.
“…….”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김명현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학생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는 민우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가지지 못한, 마음속 빈 곳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건 ‘질투’였다.
강단에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지는 않지만, 교육행정가로서 여러 정책을 기획했다. 하지만 찾아와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형, 김태현도 마찬가지로 지적했다.
김태현은 전화 통화에서 그렇게 말했다. 본인의 열등감으로 남을 재단하지 말라고. 잘못을 인정하니 새로운 길이 보였다고.
‘박민우 문학상’을 수상한 직후 걸려온 전화에서 김태현은 자신의 과오를 열거하며 참회했다.
한편으로는 형의 목소리가 편안하게 들렸다. 그간 발목을 잡고 있던, 보이지 않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 통화할 때 왜 불쾌한 느낌이 들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바로 형이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피해를 본 상대가 그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상대가 받은 좋지 않은 경험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김명현의 시선이 민우를 향했다.
그는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다. 낮은 자세에서 학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자, 공정하게 상대를 인정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명현은 그런 결론에 닿았다.
‘저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는 교수가 아니라 선생이니까.’
김명현은, 그의 형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한마디를 떠올렸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라.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훨씬 더 넓어질 거라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당장에라도 전화를 끊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내가 모범적인 안티테제라고? 그렇다면 나의 안티테제는 누구인가?’
곧 학생들이 돌아가고, 민우가 돌아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국문과 학생들인데 다들 붙임성이 좋아서 말이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한숨을 내쉰 김명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물었다.
“하나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예.”
“박 교수께서 가져오신 새 정책 말이죠. 그걸 시행하면, 대학에 교수님 같은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습니까?”
김명현은 쉽게 대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늘 정론만을 펼쳐왔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민우는 깊게 고민했다.
“그건 저도 확답을 드릴 수가 없겠는데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 대학엔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많으니까요. 굳이 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티 없이 깨끗한 민우의 미소를 바라보던 김명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질투를 대신해 자리 잡은 부끄러움을 어루만지며.
“좋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 * *
“김 실장을 설득했다고?”
서지훈 총장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간 고생한 걸 떠올린 민우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 정말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별로 기대하고 있진 않았는데, 한번 해보기로 결론이 나왔네요.”
“정말 고생 많았다!”
서지훈 총장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민우는 그렇게나 좋아할 일인가, 그런 표정이었다.
고맙게도 서지훈 총장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지금 너와 김 실장은 우리 대학의 성장 동력이나 다름이 없어. 다른 교수들은 나이든 만큼 변화를 싫어하거든. 그런데 서로 맞물리지 않고 헛바퀴만 돈다면 얼마나 아깝겠냐? 그러니 기쁜 일이지. 새로운 정책이 시행되는 걸 떠나서 아주 좋은 일이야.”
“그 정도였어요?”
“내색만 안 했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도 걱정하고 있었을걸? 당장 너희 교무처만 해도 직원들이 눈치 많이 보지 않든?”
“그건 그래요.”
성실한 교무처 직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린 민우는, 미뤄뒀던 회식을 빨리 잡아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지훈 총장은 민우가 제출한 기획안을 다시 살펴보며 물었다.
“그림 확정안은 언제 올라오는 거냐?”
“다음 주에 처장급 회의가 있으니 이번 주 내로 확정해서 다시 올릴 생각입니다.”
“김 실장 피드백은?”
“큰 틀은 그대로 가져가기로 했고, 디테일만 살짝 손 보기로 했어요. 그건 김 실장이 맡아서 할 겁니다.”
“좋아. 그럼 회의 참석자들에겐 내가 귀띔해 놓을 테니 너도 준비 잘해 놔라.”
“이사회엔 보고할 필요가 없을까요?”
팔짱을 낀 서지훈 총장이 피식 웃었다.
“여긴 내 대학이야. 내 마음대로 할 거다. 그런 거까지 보고받고 싶으면 본인들이 총장해야지.”
“와우. 화끈하시네요! 그럼 선생님만 믿고 준비해 보겠습니다.”
“다음엔 누굴 만날 생각이야?”
“원순철 학장 만날 계획입니다. 아무래도 요즘 불만이 좀 쌓이신 거 같아서 말이죠.”
교양학부장인 원순철은 서지훈 총장의 선거를 도운 핵심 인물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지금, 그는 전리품을 은근히 바라고 있는 중이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서지훈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매듭짓고 와. 무리한 요구는 네 선에서 커트하도록.”
“알겠습니다.”
한고비를 넘겼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민우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