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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404화 (404/500)

답은 가까이에 있다 (5)

진섭은 민우의 아파트 단지 안까지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린 민우가 고맙다는 말을 던지곤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을 여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잘 다녀왔어요?”

이수빈은 조금 지쳐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최근에 설예라 교수가 낸 문학 이론서였다.

“벌써 다음 학기 수업 준비하는 거야? 방학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책 제목을 본 민우가 잔소리했다.

요 며칠 스케줄이 많아서 집안일을 돕지 못했다. 좀 쉬엄쉬엄하라고 당부했는데 벌써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라뇨? 다음 학기 대학원 수업까지 포함하면 네 과목인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혼난다고요.”

“한 학기 정도는 쉬어가도 되잖아. 당신 정도면 눈 감고도 수업할 수 있을 텐데.”

“요즘 연구 트렌드 따라가는 것도 힘들어요. 우리 대학원 시절이랑은 많이 다르다니까?”

“그건 그렇지.”

2000년대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방식의 문학 연구가 유행했었다. 그래서 ‘정전’으로 평가받는 텍스트를 잘 이해하고 있기만 해도 평타는 쳤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고, 문학도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풍속이 달라졌다. 학제 간 융합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옛날 운운하며 우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금방 도태되는 세대가 된 것이다.

차민재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그는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웹소설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IT 디바이스에 익숙한 또래 학생들은 그 분야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이가 많은 교수들은 웹소설이라는 분야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경험이 많고 교수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으면 뒤처지게 된다.

“시상식은 잘하고 왔어요? 중계방송 잠깐 봤는데, 분위기 좋은 거 같더라고요.”

“괜찮았어. 송 이사님이 신경을 많이 쓰셨더라고.”

이번 시상식은 공중파를 타지는 못했지만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생중계되었다. 첫 시상식이라 부족한 점도 있었지만, 대부분 호평이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도 수많은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음사 실무진들은 성공적인 시작이라 자평했다.

하지만 민우는 아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슈아와 나눈 이야기처럼, 수상자가 국내로 한정된다면 그들만의 리그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좀 더 판을 키워야 했다.

“나도 가고 싶었는데 아쉽다.”

“내년엔 수상자로 한번 참가해 보는 건 어때?”

“그러려면 분발해야겠네요. 평론도 열심히 쓰고 논문도 열심히 내고.”

“그래도 쉬엄쉬엄해.”

민우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테이블에 생과일주스가 놓여 있다. 컵을 들고는 이수빈의 곁에 앉았다.

“상의할 일이 좀 있는데. 괜찮아?”

“뭔데요?”

“방학 때 시간강사들에게 일자리를 좀 주려고. 그런데 내 계획이 옳은지 쉽게 판단이 안 서네.”

“그 문제라면…….”

아내이기 때문에, 그리고 같은 길을 걷는 동료 교수이기 때문에 그녀는 민우가 하고 있는 고민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예산은 괜찮은 거예요?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시간강사 급여로 지급될 예산을 확보하는 거잖아요. 재단에서 재원을 끌어오지 않는다는 게 기본 입장일 거고.”

“서지훈 선생님께서 힌트를 주셨어. 아무래도 인문학 프로그램에 답이 있는 것 같아.”

“인문학 프로그램이요?”

명인대 인문학 프로그램은 전임 총장인 백성웅과 김명현의 합작품으로, 대중의 교양을 증진한다는 미명하에 개설되었다.

한마디로 대학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이었던 것.

당초 명인대 교양학부에서 프로그램을 핸들링했지만, 지금은 스케일이 커져 여러 학과에서 교수진을 파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민우는 서지훈 총장과 나눈 이야기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이수빈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의미일 것 같아요. 오빠가 제대로 해석했네. 서지훈 선생님도 이제는 교수가 아니라 총장의 입장이니까 여러 이해관계를 고민해야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김 실장하고 내일 협상해 볼 생각이야. 이야기가 잘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계절학기 대신 인문학 프로그램에 강사로 보내는 걸로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 계획은 이랬다.

“대학본부에서 문제 삼는 건 시간강사들이 실제로 강의를 하지 않는다는 거야. 방학 기간 중 2주 정도 임금을 주는 것도 강의 준비라는 명목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고.”

“그러니까 방학에도 강의를 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거네요.”

“기본 골자는 그래.”

하지만 덧붙여야 할 말이 많았다.

지금 민우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이수빈도 그 계획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대번에 알았다.

“그런데 시간강사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특강을 만들 만한 여력이 될까요?”

“그게 문제야. 인문학 프로그램에 강사를 보내 봐야 얼마나 되겠어? 수요가 예상되지 않는 상황에서 프로그램을 갑자기 늘릴 수도 없는 일이고. 아마 각 분야에서 한두 명만 초빙해도 충분하겠지.”

“그렇다고 계절학기 과목을 확충할 수도 없고…….”

계절학기는 대부분 초빙교수들이 맡는다. 그리고 강의 자체도 수가 적은 데다가 수강생이 미달되면 강제 폐강되기 때문에 자리를 만드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한계를 느낀 민우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굳이 ‘강의’라는 행위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 프로그램 말고도 여러 안건을 제안할 거야. 우리 대학 이름으로 연구 기금을 조성하는 것도 있고, 교재 개발도 하면서 지역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방법도 이야기해보려고.”

“연구 기금을 조성하는 건 무슨 소리예요?”

“방학은 길면 8주 정도 돼. 인문사회계 교수라면 연구 하나 끝내기에는 적당한 시간이지. 우리 대학 이름으로 논문을 내는 조건으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거야. 약 8주 정도의 보수를 말이지.”

이수빈이 깜짝 놀랐다.

“아! 그러면 대학 연구 성과도 올라가니 겸사겸사 좋겠네요?”

“강사 수당을 100퍼센트 지급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거야. 이공계 쪽은 어차피 자얀이 투자하기로 했으니 그쪽에서 해결하면 되는 거고.”

“좋은 생각 같아요! 음, 교재 개발은 뭔지 알 것 같고…… 그럼 지역사회 공헌은?”

“지방에 강사들 부족한 건 알지?”

“알죠. 강사료보다 교통비가 많이 나오니 초빙하기도 어렵잖아요.”

그럼에도 경력을 쌓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강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출강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대학 이름으로 지자체나 각종 기관에 강사를 파견해 보려고. 대학 이름으로 사회공헌활동을 하는 셈이지. 우리는 파견된 강사에게 경비나 강의료를 지급해 주면 되는 거고.”

“약간 휴머니티랑 겹치는 거 아녜요?”

“걱정할 거 없어. 휴머니티는 온라인 활동이 주력이니까. 명인대에서는 오프라인 활동에 주력하면 돼.”

“그래도 쉽지는 않을 거 같아요.”

“맞아. 쉽지 않지. 예산이 문제가 아니라 소속 학과들이 과연 이 계획에 찬동해줄지가 문제니까. 학과장들 먼저 만나서 협조를 얻어야 해.”

“더 바빠지겠네.”

“결과가 어떻든 해볼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지.”

이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와 함께 산 지도 오래되었다. 피곤하고 힘들지만, 민우는 침대로 가서 눕지 않고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켤 것이다. 그리고 기획서를 쓰겠지.

그 장면이 생생히 그려지자 이수빈이 풋 웃고 말았다.

민우가 물었다.

“왜 웃어?”

“아뇨. 그냥. 야식 먹을래요? 오늘 늦게 잘 거 같은데.”

“좋지.”

이수빈이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했다. 기지개를 켠 민우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눈이 예전과는 다르게 침침하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지만 하나만큼은 달라진 게 없었다.

바로 열정과 집념.

워드를 켠 민우는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민우는 연구실로 출근하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밤새 쓴 기획서를 출력했다.

우웅거리는 기계음을 내며 프린터가 약 10장 분량의 기획서를 뽑아냈다.

‘반응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학의 명예와 실적을 높이는 일이라고 해도, 재정적으로 득보다는 실이 많은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할 게 뻔했다.

‘그래서 김 실장을 먼저 설득해야 해. 가장 심하게 반대할 사람이니까.’

각오를 단단히 한 민우는 서류를 가지런히 모아 철한 뒤 바로 연구실을 나섰다. 목적지는 김명현이 있는 곳이었다.

김명현과의 약속은 오는 길에 잡아두었다.

그는 별다른 일이 없으니 아무 때나 오라는 말을 남겼다.

곧 민우는 명인대 교육개발실로 들어갔다.

안쪽에 따로 나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김명현이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셨군요.”

“바쁘신데 뵙자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보다야 처장님께서 더 바쁘실 텐데 말이죠. 이쪽으로 앉으시죠.”

민우는 김명현과 독대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민우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제는 시상식에 오지 않으신 거 같더군요. 그래도 친형이 큰 상을 받으셨는데.”

“공교롭게도 어제는 중요한 비즈니스가 있었습니다. 축하 인사를 꼭 만나서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형제 사인데요.”

“그렇군요.”

김명현은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민우는 김태현을 위해 결단을 내린 일이 별로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실망하진 않았다.

어차피 수상자 결정에 김명현과의 관계가 걸쳐 있지 않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좀 봐주셔야 할 게 있네요.”

민우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김명현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시간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기본 기획서입니다. 처장급 회의에서 발의하기 전에 실장님과 좀 상의하고 싶어서 말이죠.”

“의외인데요.”

“어떤 부분이 의외라는 말씀입니까?”

서류를 받아든 김명현이 씨익 웃었다.

“우리는 정치로 따지면 정적이나 다름이 없는데, 이렇게 소중한 무기를 대뜸 내놓으실지 몰랐다 이거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민우도 씨익 웃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민우가 답했다.

“아쉽지만 그 말은 이번 건엔 해당되지 않을 거 같네요. 김 실장님과 저는 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백 번 싸울 일이 없지요.”

“적이 아니다. 그건 또 색다른 해석이군요.”

민우는 무슨 말이 필요하냐며 손을 뻗어 읽어보라 권했다. 김명현이 서류를 펼쳤다.

중간중간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는지 김명현의 눈썹이 움직일 때도 있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오셨군요. 예상했던 것도 있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있군요.”

김명현이 서류철을 덮었다. 그리곤 얌전히 민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민우가 물었다.

“감상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래 준비하신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얼마나 걸리신 겁니까?”

“기획서는 오늘 새벽에 작성한 겁니다.”

김명현이 살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웃음으로 그 놀라움을 감췄다.

“시도는 좋습니다. 명분도 훌륭하고요. 하지만 관록 있는 처장들과 실무자들을 설득하기에는…… 글쎄요. 좀 모자라지 않을까 싶은데.”

“그럼 다음 질문을 드리죠.”

김명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부정적인 의견을 남겼는데도, 민우는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히 말했다.

“그렇다면 그 모자란 부분을 같이 채워보는 건 어떻습니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민우는 자신의 앞으로 돌아온 기획서를 다시 돌려 김명현 쪽으로 들이밀었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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