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03화 (403/500)

답은 가까이에 있다 (4)

“어디 갔나 했더니 두 분 다 여기에 있었네요.”

지음사의 송승현 이사였다. 그녀는 민우와 이다혜에게 용건이 있는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 중이다.

“어때요. 파티는 만족스러우신가요?”

민우가 답했다.

“아주 멋집니다. 음식도 맛있고, 분위기도 끝내주네요. 외신 기자들까지 부른 이유가 있었네요.”

“이것도 마케팅의 일부니까요. 회장님께 인사하는 거 잊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송승현이 와인잔을 들었고, 민우가 잔을 부딪쳤다.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이다혜도 끼고 싶었지만 잔을 들고 있지 않았다.

순진하게 허둥대는 모습을 바라보며 송승현 이사가 웃었다.

“수상 축하합니다. 이다혜 씨.”

“가, 감사합니다. 이사님.”

“왜 그렇게 떨어요?”

“말씀으로만 듣다 이렇게 실제로 이야기 나누는 건 처음이라서요!”

“악담이라도 들었나 보네.”

송승현 이사가 민우를 힐끗 바라보자, 이다혜가 깜짝 놀랐다.

“아녜요! 저도 박민우 선생님처럼 이사님하고 작품 같이 해보는 게 꿈인걸요.”

“그래요?”

고개를 끄덕거린 송승현 이사가 은근한 눈으로 이다혜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들어 이다혜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럼 작품 하나 해볼래요?”

“제, 제가요?”

“마침 좋은 작품이 하나 있거든요. <그림자꾼>이라고…… 이번에 출간 예정인 작품이 있어요.”

“처음 듣는 제목이네요. 어떤 분의 신간인가요?”

“김영화 작가.”

눈을 껌뻑거린 이다혜가 말문을 잇지 못했다.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그녀가 아는 김영화 작가는 문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특히 민우가 그의 <태엽시계>를 번역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 이후로 김영화 작가의 작품은 민우의 손에서 번역되어 세계 각국으로 출간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형 작가의 작품을, 그것도 전 세계의 독자들이 주목하는 신작을 같이하자니.

이다혜가 자신의 볼을 꼬집어 주욱 늘려볼 만했다.

“박 선생님…… 이거 꿈은 아니겠죠?”

“아프면 꿈 아니다.”

“아프긴 해요. 그런데 아픈 것까지도 꿈이면 어쩌죠?”

피식 웃은 민우가 송승현 이사에게 말했다.

“이사님. 이 친구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는 것 같은데 그냥 그 작품 제가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음. 어쩔 수 없네요. 역시 민우 씨에게 부탁해야겠군요.”

“하, 하, 할게요! 제가 할게요!”

이다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으로 쏠렸다. 이다혜는 굽실거리며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그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보던 송승현 이사가 팔짱을 꼈다.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왜 이런 제안을 이다혜 씨에게 하는지.”

“솔직히 궁금해요.”

“다혜 씨가 신인상을 받긴 했지만 아직 김영화 작가님의 작품을 손대기에는 커리어가 부족하죠. 해외에서도 그만큼 기대치가 높으니까요.”

“아…… 그럼 역시 박 선생님이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번엔 민우가 한소리 했다.

“그렇게 쉽게 주눅 들어서 어떻게 해외에 진출하려고 그래? 언제까지 영한번역만 잡고 있을 수는 없잖아. 번역의 꽃은 역시 외국인과 소통하는 거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

잠시 잊고 있었던 말을 떠올린 이다혜가 눈에 힘을 주었다.

“맞아요. 무섭다고 벌벌 떨기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이사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기회가 된다면 제가 꼭 해보고 싶습니다!”

“좋아요. 그럼 다음 주쯤 한번 연락 줄게요. 그때 회사에서 자세히 이야기 나누죠.”

“근데요. 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송승현 이사가 얼마든지 하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다혜는 잠시 민우의 눈치를 살피더니,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까 하신 말씀이 덜 매듭지어진 거 같아서요. 제가 왜 이런 제안을 받게 되었는지요.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건 아녜요! 그냥 궁금해서…….”

“역시 이건 민우 씨가 말해주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그럴까요?”

고개를 끄덕인 송승현이 자리를 떴다. 그러자 민우가 말했다.

“나는 번역도 제2의 창작이라고 생각해.”

“알고 있어요. 오빠 이론서에서도 줄곧 나온 말이었죠.”

“그러려면 작품을 잘 이해하고 느껴야 하는데, 이번 작품은 내가 손대기 조금 난감하더라고.”

“어떤 점에서요?”

“주인공이 여자야. 그것도 20대 여자.”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민우가 하는 이야기는 간단했다.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창작은 물론 번역에서도 중요한 것이 바로 감정 이입이다.

캐릭터에 감정 이입이 되지 않으면 감정선을 잡기가 힘들다. 마치 속재료가 흩어진 김밥을 따로 주워 먹는 느낌이 든다.

“내가 욕심을 부린다면야 무난하게 해낼 수 있겠지. 영어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번역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플러스 알파를 넣는 건 자신이 없어. 그건 나보단 네가 잘할 것 같아서 이사님께 추천한 거야.”

“오빠가 추천해주신 거였어요?”

“그럼 감히 누가 추천을 해? 김영화 작가님은 내 전담이나 다름없는데.”

이다혜가 놀라면서도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웃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네요. 생각지도 못했어요.”

“오해는 하지 마. 결국은 네가 실력이 있어서 맡긴 거니까. 김영화 작가님께도 이미 말씀드려놨다. 미팅 때 뵙게 되면 제대로 인사드려.”

“네! 꼭 좋은 성과 내도록 노력할게요!”

민우는 짐을 하나 던 느낌이었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와인이 여느 때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 * *

자정이 되기 전 파티가 끝났다. 민우는 한진섭과 주예린과 함께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잠시 잊고 있었던 손님이 나타났다.

바로 가디언지의 조슈아 벨라미였다.

「와우, 프로페서. 오늘 거하게 마셨나 보네요?」

「좋은 날이니까요. 파티는 어땠어요?」

「끝내주는 파티였습니다. 이런 맛에 한국 온다니까요. 좀 자주 불러주시죠.」

민우는 한진섭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한진섭은 주예린과 함께 먼저 차에 올랐다.

「잠깐 인터뷰 괜찮으시죠?」

「그러려고 초대했는데요. 편하게 하시죠.」

「그러려면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좋을 텐데.」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기자들이 냄새를 맡기 전에 몰래 물어보려는 심산이었다. 민우는 흔쾌히 비상계단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라면 조슈아가 녹음기를 꺼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간단히 하나만 물어볼 건데요. 그전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쉬의 부탁이라면 안 들어드릴 수 없죠.」

조슈아에게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신세를 많이 졌다. 폴라리스의 설립을 시작으로 루카치의 조카를 찾는 일까지 전부 그가 해결해 주었다.

조슈아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제가 드릴 질문은 아마 다른 기자들도 물어볼 만한 건데요. 저를 제외한 다른 기자들에게 노코멘트 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한해서만요.」

「좋습니다.」

「역시 화끈해서 마음에 든다니까!」

껄껄거리며 웃은 조슈아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박민우 문학상은 한국인만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현재로서는요. 하지만 제가 아는 프로페서는 야심가지요. 이 계획이 언제쯤 수정될 것 같습니까?」

「그러니까, 언제쯤 외국인들도 수상자가 될 거냐고 물어보시는 거죠?」

「정확합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조슈아만이 아니라 국내 기자들도 관심을 두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대한민국의 노벨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한 적은 없었다.

「솔직히 아직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결정된 것도 없고요. 하지만 ‘조만간’이라는 힌트를 드리고 싶네요. 나중에 결정된다면 조쉬에게 제일 먼저 연락할게요.」

「믿고 있겠습니다. 프로페서.」

「대답이 싱거워서 어쩌죠?」

「성과가 없진 않습니다. 제가 아는 프로페서는 약속 하나는 끝내주게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하하하. 그럼 가실까요.」

두 사람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조슈아는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민우는 기자들이 다가오기 전에 한진섭의 차에 탑승했다.

운전석에는 한진섭이 앉아 있었다.

“일단 출발합시다.”

“예이.”

시동이 걸렸다. 한진섭은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몇몇 기자들이 눈치채고 달려왔지만, 차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곤한 숨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주예린이 잠들어 있었다.

“뭐 물어보디?”

“언제쯤 외국인들한테도 상 주냐고.”

“오, 그건 나도 좀 궁금한데?”

“쉬운 일이 아니야. 지금보다 인력이 배는 더 들걸? 전담 부서도 필요하고. 지음사 혼자서 감당하기는 좀 어려운 면이 있지.”

“그래도 언젠간 해야 하는 일 아닌가?”

“그건 그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늦은 시간이라 도로는 뻥 뚫려 있었다. 한진섭은 경쾌하게 엑셀을 밟았다.

“그나저나 그 인간 안 왔더라?”

“누구?”

“누구긴 누구야. 김명현이지.”

민우는 그다지 관심 없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 야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민우가 말했다.

“두 사람, 생각보다 사이가 좋지 않은 거 같았어.”

“그런데 지 형 복수를 직접 한다고?”

“복수가 아닌 거지. 그냥 우연의 일치였던 게 아닐까? 김태현 씨와 악연이 없었더라도 지금과 똑같은 일을 했을 것 같은 느낌이야.”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놓칠 한진섭이 아니었다. 그의 눈이 힐끔 민우 쪽을 향하더니,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강사 임금 문제 아직도 해결 못 한 모양이구만.”

“예산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서지훈 선생님 총장 임기도 이제 막 시작했는데 재단에서 쉽게 전입금 던져주겠냐?”

“그건 그렇지. 서지훈 선생님하곤 이야기해본 거야?”

“선생님은 답을 알고 계신 것 같았어. 생각해둔 게 있다고 하시더라고.”

“뭐지?”

“내 주변에 힌트가 있다던데, 도대체 뭐가 힌트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음…….”

낮게 신음을 흘린 한진섭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민우는 눈이 뻑뻑해 눈꺼풀을 잠시 닫았다.

“그냥 쉽게 생각하면 안 되나?”

“쉽게 생각해서 답이 나왔으면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습니다. 한진섭 선생님.”

“아니. 생각해봐. 모든 문제는 강사들이 맡을 강의가 없어서 그런 거잖아? 학기 중에는 강의료가 제때 나가니까. 그럼 강의를 하게끔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어?”

순간 민우가 눈을 부릅떴다. 어렴풋한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생각 없이 던진 것 같은 한진섭의 한마디가 마치 나비효과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럴듯한 플랜이 민우의 머릿속에 세워졌다.

“아…… 그런 의미였나.”

“에헤이! 혼자만 알지 말고 좀 공유합시다. 어째 보니 내가 어시스트한 거 같은데?”

“전에 서지훈 선생님이 도움이 필요하면 김명현 실장하고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셨거든.”

“레알?”

“아무래도 김 실장이 답을 쥐고 있는 거 같아. 이번 문제에 한해서는 말이지.”

민우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모두 끝났다. 가로등을 품은 그의 눈빛이 점점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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