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가까이에 있다 (3)
제1회 박민우 문학상 시상식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민우와 인연이 있든 없든 트로피를 쥔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민우의 사회적 지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특히 민영환 교수의 수상 소감이 압권이었다.
“제자에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받게 되다니…… 허허허. 솔직한 심정으로 이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서지훈 총장이 아니라 제가 시상대에 올라왔다는 건 그만큼 이 상이 공정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어지는 민영환 교수의 유머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민우와 한진섭은 웃지 못했다.
오히려 표정이 진지해졌다.
“야. 저거 농담 아닌 거 같은데? 말 속에 뼈가 있는 거 같지 않냐?”
“그러게 말이다.”
“왜 하필 민영환 선생님을 뽑아가지고 사서 고생을 해? 차라리 공로상은 서지훈 선생님께 드리지.”
“학술 분과는 내 소관이 아니었다니까. 그리고 앞뒤를 따지면 민영환 선생님이 받으시는 게 맞지.”
“히야, 하긴. 직장 생활이 쉬운 게 아니지.”
“그러게.”
민우와 한진섭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석사과정 때의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돌이켜보면 민영환 교수와도 많은 일이 있었다.
호랑이보다 더욱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왠지 은퇴한 옆집 아저씨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세월이 그만큼 무상한 것이다.
그들이 앞에서 종알거리는 것도 모른 채 민영환 교수의 소감이 이어졌다.
“그래도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제가 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제 밑에서 자란 제자가 이런 상을 저에게 줄 만큼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지요. 그야말로 모든 스승들의 꿈 아니겠습니까? 청출어람.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제는 정말 여한이 없군요.”
환하게 웃은 민영환 교수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모두에게 진심이 전해져서일까. 박수가 쏟아졌다. 하나둘 사람들이 일어서더니, 종국엔 모든 사람이 기립해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동일한 분야에서 신진연구자상을 받게 된 서강일은 꽃다발을 한 아름 끌어안고 진지하게 소감을 밝혔다.
“올해는 저에게 상당히 의미심장한 한 해였습니다. 학문을 시작하면서 목표로 삼았던 것을 되돌아봐야 했고, 또 비전임 강사들이 으레 그렇듯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저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은 그분들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서강일은 트로피를 객석으로 들어 보였다. 정확히는 강민희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해서. 그녀의 미소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제 저는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서강일의 시선이 움직였고, 열정이 담긴 눈동자에 민우의 모습이 잡혔다.
“힘들고 외로운 길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받은 이 상을 등불 삼아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우는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친구를 위해 기꺼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창작 부문의 시상식이 이어졌다.
평소 즐겨 입던 후드티 대신 근사한 정장을 걸친 주예린은 도도하게 연단에 올라 상을 받았다.
다른 수상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터졌다.
“대상도 아니고 공로상이라고 해서 원래는 안 받으려고 했어요. 아시죠? 제가 어떤 사람인지. 하지만 그러면 박 교수님이 실망하실까 봐 어쩔 수 없이 나왔네요. 질긴 인연이죠.”
갑자기 시상식이 연예대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우와 주예린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도 새롭네요. 제가 소설을 써서 공로를 세웠다고 인정을 받은 거잖아요? 지금까진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독자님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런 고민만 해왔는데, 공로상을 받는 입장이 되니 다른 고민이 드네요. 이제는 나의 글이 아니라 모두의 글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말하자면 ‘책임감’이다.
주예린은 그 단어의 무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녀는 2세를 임신했지만 사실 늘 임산부의 입장이었다. 작품을 쓰는 과정을 출산에 빗대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고의 과정을 거쳐 원고지의 마지막에 마침표를 찍을 때. 그리고 그것을 묶어 세상에 공개할 때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느낀다.
이제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니 그만큼 책임감을 더 느낄 터.
그 와중에 받은 상이라 더욱 의미가 깊었다.
“앞으로는 제 작품을 쓰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고, 저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고 싶어요. 그게 이 상을 주신 진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고마워요.”
주예린은 모교에 장학금을 전달하는 것에 대한 복선을 던졌다.
아마 그것은 시작에 불과할 거다.
어쩌면 재단이나 협회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작가 후원에 나설지도 모르지.
주예린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수상 소감이었다.
다음은 특별상을 수상하게 된 정연주를 대신해 유진태 비서실장이 무대에 올랐다. 대리 수상이기도 해 특별한 멘트는 없었다.
‘두 사람은 잘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정연주와 유진태와의 관계, 정확히는 유진태가 품은 연심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던 민우는 문득 궁금했다.
‘이따 말할 기회가 있을 테니 한번 물어봐야겠다.’
<프로페서> 1부의 각본을 수정하면서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응원했던 민우였다. 그 정도는 물어봐도 양해해줄 것이다.
아마 두 사람이 맺어질 확률은 굉장히 낮을 거다.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정연주는 대한그룹의 영애였고, 유진태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대한그룹의 회장은 물론 일가 모두가 그와 맺어지는 것을 반대할 것이다. 현실은 드라마와는 전혀 다르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현실에서 드라마를 원한다.
‘그래도 후회를 남기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민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무대의 조명이 바뀌고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다음으로 번역 부문 신인상 시상이 있겠습니다. 이번 시상에는 지음사의 송승현 이사님께서 진행해 주시겠습니다.”
민우와 친분이 있는 사람 중 마지막으로 시상대에 오른 것은 번역가 이다혜였다.
송승현 이사가 트로피와 꽃다발을 건네며 축하 인사를 전했다.
이다혜는 마이크를 잡기도 전에 펑펑 울었다.
오죽하면 사회자가 달려가 손수건을 건넬 정도였다.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한진섭이 아니었다. 팔꿈치로 민우를 툭툭 건드렸다.
“네가 얼마나 부려먹었으면 저렇게 서럽게 우냐? 하여간 박 선생 갑질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래. 많이 부려먹었지. 그래도 저렇게 보니 대견하지 않냐?”
“많이 크긴 컸지.”
눈물을 훔친 이다혜가 마이크 앞에 섰다.
“상을 받게 되었다고 연락을 받았을 땐 괜찮았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울먹이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훌쩍거리며 호흡을 가라앉힌 이다혜가 소감을 이었다.
“제 은사님이기도 한 박민우 선생님을 만나게 된 그때가 떠오르네요. 만약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듣고 있던 민우도 코가 찡해졌다. 한진섭도 마찬가지였는지, 손으로 코를 슥슥 비볐다.
“집에서 일 좀 하라고 구박받고 있을 때 <인문과학총서> 한국어판 번역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어요.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그런 행운 덕분이었어요. 저도…… 이젠 그런 행운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이다혜가 꾸벅 인사했다.
투박해서 멋스럽지는 않았지만 가장 감동적인 수상 소감이었다. 어느새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상식이 마무리되고, 축하 파티가 열렸다.
* * *
축하 파티엔 수백 명이 넘는 인사들이 참석했다.
단순히 수상자들만 축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친목 도모든 비즈니스든 뭐든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와인을 손에 든 민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접시에 음식을 덜고 있는 유진태 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실장님.”
“아, 박 교수님.”
유진태가 묵례했다. 민우도 따라 인사했다.
“이사장님은 잘 계십니까? 요즘 저도 정신이 없어서 안부도 못 물었네요.”
“하하하.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똑같은 말이요?”
“이사장님께서도 출국하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바빠서 경황이 없으니 가서 박 교수님께 안부 잘 여쭤보라고 말이죠.”
“그랬군요.”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학계 동료가 아니라 친동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마음이 잘 통했으니까.
유진태는 옆에 잔뜩 놓인 와인잔을 하나 들고 민우와 건배했다.
“좀 어색합니다. 유 실장님 옆에는 늘 연주가 있었는데 말이죠.”
“아, 그러게요. 저도 어색하네요. 이렇게 혼자 파티를 즐겨본 게 얼마 만인지.”
“요즘은 좀 어떻습니까?”
묘한 질문이었지만, 유진태 실장은 가벼이 웃었다. 이미 민우에게 여러 번 속마음을 들킨 적이 있었다. 둘러댈 필요는 없다.
“글쎄요. 아시다시피 제가 선뜻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라서 말이죠.”
“역시 그렇군요.”
“교수님도 그런 생각을 하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괜히 나서서 지금의 관계를 망치기보단 그냥 흘러가듯 지금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낫다는 생각 말이죠.”
“당연히 있죠. 남자라면 누구나 하는 생각 아니겠습니까?”
“역시 교수님과는 말이 잘 통해서 좋습니다.”
“하하하.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좋은 소식 꼭 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민우가 다시 움직였다. 그때 누군가가 팔을 붙잡았다. 엉망이 된 화장을 다시 고친 이다혜가 생긋 웃고 있다.
“울보냐?”
“아, 아니거든요?”
이다혜는 삐친 척 아랫입술을 툭 내밀었다. 그러더니 접시에 담은 음식을 포크로 푹 찍어 입에 밀어 넣었다.
“아까 진섭이가 그러더라. 얼마나 널 부려먹었으면 저렇게 서럽게 우냐고.”
“정말요? 역시 제 마음을 알아주는 건 진섭 오빠밖에 없네요!”
“이야. 다행이다. 혹 하나 뗄 수 있어서. 앞으로는 한진섭 선생에게 지도를 받도록.”
“흥. 소심하시긴.”
그때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근처에서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태현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이제야 오빠가 왜 한발 물러섰는지 알 것 같아요. 생각보다 업계 사람들 반응 좋더라고요. 앞으로 업계 분위기도 좋아질 거 같고요.”
김태현에 관한 이야기였다. 민우는 싱겁게 웃었다.
“단어 선택이 잘못됐잖아. 그때는 한발 물러섰다고 하는 게 아니라 한발 나아갔다고 하는 거야.”
“그런가요?”
“내가 손해 본 건 없잖아? 몇몇 사람들은 자존심도 없냐, 왜 남 좋은 일만 하냐 그런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어쩔 수 있나. 나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인데. 억지로 나쁜 사람 코스프레할 필요 있나.”
이다혜의 눈이 반짝였다.
“이럴 때 보면 수빈 언니가 참 부럽다니까요. 남편 잘 만난 거 같아서요.”
“너도 옆에 좋은 사람 있으면서 그러냐.”
“누구요?”
“희석이.”
이다혜가 정색하며 입을 가렸다.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죠?”
“맨날 투닥거려도 사이 좋잖아? 솔직히 말해서 난 네가 희석이 따라서 영국으로 갈 줄 알았는데.”
“유학은 쪼렙이나 가는 거죠! 저 같은 시니어는 필요 없어요.”
“시니어는 개뿔. 나중에 희석이한테 밀렸다고 울지나 마.”
놀리듯 한마디 던진 민우는 이다혜의 접시에 놓여 있던 오렌지를 하나 뺏어 먹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