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가까이에 있다 (2)
식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민우는 줄곧 즐거워 보였다. 격무에 시달리던 그가 이렇게 즐거워하는 건 오랜만이라, 레아가 물었다.
“기분 좋으신가 봐요. 웃음이 떠나질 않으시네요.”
“좋다기보다는 좀 기대되는 게 있어서요.”
“어떤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민우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 제 이름이 걸린 상을 받으니까 뭔가 좀 특별한 느낌이 드네요. 그중 민영환 선생님 반응이 제일 기대돼서요.”
“민영환 선생님이라면 매니저님 석사과정 지도교수시죠?”
“예. 정말 무서운 분이죠.”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무뎌진 건지 예전만 한 포스를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조용히 정년퇴임을 기다리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 입학한 학부 및 대학원 신입생들은 민영환 교수의 무서움을 모른다.
하지만 민우는 그의 진가는 제자를 키우는 것보다 연구 업적에 있다고 생각했다.
각 대학의 수많은 학부생들이 그가 써낸 교재를 가지고 전공기초 수업을 듣는다.
즉 그는 명인대 말고도 대부분의 국문과에 자신의 제자를 두고 있는 셈이다.
“제자 된 입장에서 연구 업적을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만, 민영환 선생님은 국문학계에서 송현우 선생님과 버금가는 업적을 세우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공로상에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뭔가 좀 뒤바뀐 거 같네요.”
“그쵸?”
“보통은 지도교수님이 지도하는 제자를 끌어주기 마련인데, 이번 경우는 뭔가 바뀐 거 같네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부분이 재미있는 것이었다. 제자의 이름을 딴 상을 지도교수가 받는다. 이건 매우 희귀한 사례다.
“한편으로는 좀 죄송스럽기도 하고요. 더 큰 상을 받으실 수 있도록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은 알아주지 않을지 몰라도, 앞으로 ‘박민우 문학상’은 노벨상을 뛰어넘는 멋진 상이 될 거예요.”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에요.”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고급스러운 느낌의 블랙 앤 골드 톤으로 통일된 무대가 펼쳐졌다. 생각지도 못한 인테리어에 민우는 입을 쩍 벌렸다.
“이야…… 준비 제대로 했네.”
“그러게요. 아카데미 시상식 보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평소 냉정하기로 유명한 레아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지음사의 대강당은 연회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근사한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복도를 거닐고 있다.
앞쪽으로는 레드카펫이 깔렸고, 그 주변으로 원목 패턴의 테이블과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한 테이블에 여러 명이 앉아 무대를 감상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음사가 ‘박민우 문학상’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와 함께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이 나타났다.
지음사의 송승현 이사였다.
“일찍 왔네요?”
“안녕하세요. 이사님.”
민우가 인사했고, 모든 임무를 끝마친 레아는 두 사람이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한쪽으로 비켜주었다.
송승현 이사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평소 정장같이 깔끔한 옷만 입고 다니는데, 이렇게 꾸미는 것도 상당히 잘 어울렸다. 마음 같아선 기념 사진을 찍어 오늘 참석하지 못한 서지훈 총장에게 대신 보내주고 싶었다.
송승현 이사가 대강당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고급스럽게 잘 꾸며져서요. 아까 레아 씨가 그러더라고요. 아카데미 시상식 같은 느낌이라고.”
“신경 좀 썼어요. 예산이 좀 초과됐는데, 다행히 회장님께서 도와주셨네요.”
“나중에 인사 좀 드려야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죠.”
송승현 이사가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직접 안내해 주겠다는 제스처였다. 민우는 송승현 이사와 나란히 걸었다.
무대로 나아가는 도중 많은 사람들이 민우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길을 가로막을 정도는 못 됐다. 옆에 있던 송승현 이사가 계속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요즘 어때요? 듣기론 학교 일 때문에 많이 바쁘다고 하던데.”
“선생님께서 말씀 많이 하시나요?”
송승현 이사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이는 학교와 관련된 일은 별로 이야기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그래도 민우 씨를 많이 걱정하고 있는 거 같더라고요.”
“아직 배우는 입장이라 힘들다는 말씀 드릴 처지가 아닙니다.”
“처장 일이 쉽지는 않겠죠. 밑에 직원을 두고 부리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무대 앞쪽에 도달하니 수상자들이 VIP석에 앉아 있었다.
그중엔 눈에 익은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이다혜는 물론, 서강일과 민영환 교수의 모습까지 보였다.
이름만 들어보고 얼굴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민우는 긍정했다. 오늘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모두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정연주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늘 정연주 이사장은 불참인가요?”
“대리 수상하겠다고 연락 왔어요. 아마 지금 해외 출장 중인 걸로 알고 있네요.”
아마 대리 수상이라면 유진태 비서실장이 참석할 가능성이 크다. 문득 궁금해졌다. 두 사람 사이는 아직 진전이 없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우 씨 이름이 걸린 상인데 직접 못 받아서 너무 아쉽다고 말씀하셨어요.”
“정연주 이사장 외엔 모두 참석하시는 겁니까?”
“예. 그럴 거예요.”
송승현 이사는 수상자들과 인사를 나누라고 손짓한 뒤 자리를 떠났다.
민우는 제일 먼저 민영환 교수를 찾았다.
좌우로 주예린과 서강일이 보좌하듯 자리하고 있었다.
주예린은 몰라도 서강일은 민영환 교수와 크게 인연이 없다. 인사를 나눴는지 모르겠다.
“선생님. 수상 축하드립니다.”
“크흠!”
민영환 교수는 헛기침하며 민우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민우는 뭔가 말실수라도 했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거 기분이 묘하구만. 제자의 이름을 딴 상을 지도교수가 받다니.”
민우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그건 옆에 있던 주예린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레아와 이야기했던 내용이 현실이 된 것이다.
“선생님이 수상 거부하시면 어쩌나 조마조마하고 있었습니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가 수상자를 고른 게 아니라고 해서 받은 거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넵.”
이번엔 민우가 옆에 있는 서강일을 주목했다. 민우는 서강일을 가리키며 민영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 혹시 서강일 선생하고 이야기는 좀 나누셨을까요? 다음 학기 국문과 시간강사에 지원했습니다. 서지훈 총장님 후임입니다.”
“아아, 그 이야기는 설예라 선생한테 들었다. 사정이 좀 딱하게 됐더군.”
비웃는 태도는 결코 아니었다.
민영환 교수도 서강일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석사과정 때 민우와 학회에서 두 번이나 토론하며 우수함을 입증했으니까.
그런 인재를 단순히 대학 내 정치 싸움으로 내친다는 현실이 딱했던 것이다.
민영환 교수는 서강일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장소필 선생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엔 실수를 제대로 했어. 이렇게 아까운 인재를 놓치고 말이지.”
“임용 과정에는 제가 개입하지 못하니 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그러기로 이미 약조했지. 걱정하지 마라.”
옆에 있던 서강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도착하기 전 민영환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다행이었다.
“선배. 저는 축하한다고 말씀 안 해주시나요? 차별 쩌네 진짜.”
“쩌네가 뭐냐 쩌네가. 다른 선생님들도 계시는데 말 좀 조심해.”
“수상 거부할 걸 그랬나.”
주예린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움찔 놀란 민우가 살살 웃으며 그녀의 심기를 달랬다.
“무슨 섭섭한 말씀을…… 우리 주 작가님이 안 받으시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쫌 잘하라고요.”
“예예.”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민우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의 등단작인 <방랑자들> 때문이겠지.
부디 영화가 잘 풀려 그녀의 앞날이 더욱더 찬란하게 빛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박민우 교수.”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민우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돌아서니, 캐주얼한 블레이저를 걸친 김태현 번역가가 서 있었다.
가장 우려스러웠던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민우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몇십 번이나 이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보았으니까.
민우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입니다. 김태현 씨.”
“그러게 말입니다. 진짜 오랜만이군요. ‘번역인의 밤’ 때가 마지막이었죠 아마?”
“그럴 겁니다.”
김태현은 민우의 악수를 받았다.
드라마틱한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그의 표정에는 불만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민우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실패했던 그간의 세월 때문인지는 모른다.
어찌 되었든 상관은 없다.
민우는 그저 이 순간을 즐길 뿐이다.
“수상 축하드립니다. 김태현 씨를 첫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습니다.”
“진심입니까?”
“그럼요. 진심이지요. 이야기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역 부문 공로상 수상자에 김태현 씨를 추천한 건 접니다. 그리고 다른 심사위원들도 김태현 씨가 이룩한 업적을 인정해 주었고 말이죠.”
조명이 움직여서 그런 걸까. 순간 김태현의 눈에서 반짝이는 일렁임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
민우는 손을 뻗어 그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는 압니다. 하지만 이 자리와는 별로 어울릴 거 같지 않네요. 부디 시상식을 마음껏 즐겨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당신은 대체…….”
말을 잇지 못하던 김태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들어 민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제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건 저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은 아닌 거 같습니다. 본인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렇지. 그렇군요.”
고개를 주억거린 김태현이 미소를 지었다. 민우도 처음 보는, 악의가 담기지 않은 그런 순수한 느낌의 미소였다.
“필사적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상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면 말이죠. 이 부족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박 교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그럼 시상식 때 다시 뵙지요.”
“잠깐만.”
돌아서려던 민우를 붙잡았다. 김태현은 더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순간 민우는 자신과 김태현 사이에 놓인 또 다른 인물을 떠올렸다.
“동생이 박 교수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이번에 같은 부처에 발령을 받았네요.”
김태현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동생을 위해서. 하지만 그는 말을 고르고 골라 딱 한마디만 꺼냈다.
“동생은 삐뚤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박 교수께서 도와주시면…… 그 녀석도 즐겁게 일했던 그때의 추억을 되찾을 수 있겠죠.”
“김명현 씨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민우가 돌아섰다. 그는 김태현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전 기본적으로 사람의 천성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선설을 믿는 셈이죠. 사람이 악하게 보이는 것은 환경의 영향일 테고요. 그래서 전 그 환경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와 김태현 씨의 관계처럼 뭔가 긍정적인 변화가 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민우의 희망 섞인 한마디에 김태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