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가까이에 있다 (1)
“그렇게 됐단 말이지?”
책상에 앉은 서지훈 총장이 물었다. 한옆에 서 있던 민우가 웃으며 답했다.
“예. <방랑자들> 영화 제작 확정됐습니다. 어제 주 선생이 직접 계약서에 서명했어요. 아마 제작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겁니다.”
한정현 감독은 연기력을 검증받은 배우 한 명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신인을 기용하겠다고 했다.
또한 컴퓨터 그래픽이나 해외 촬영이 필요 없는 장르였기 때문에 제작비도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무엇보다도 ‘한정현’이라는 이름만 보고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으니 캐스팅만 끝난다면 바로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예린이 입장에서는 어려운 선택을 했구나.”
“언제까지 도망칠 수는 없는 거니까요. 저도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써주기로 했습니다.”
“너무 깊게 관여하지는 마.”
“왜요?”
서지훈 교수는 결재해야 하는 서류를 잠시 미뤄두고 민우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진지한 표정에 민우의 손이 절로 공손히 모아졌다.
“학부생 시절에야 이래라저래라해도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소설로 일가를 이뤘고, 이제 어머니가 되었고. 여러모로 예민한 상황이니 본인이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맞다.”
“너무 오지랖 부리지 말라는 말씀이죠?”
“그래. 넌 가끔 그런 면이 있거든.”
민우는 납득했다.
겉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숨겨둔 상처였다. 최측근인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일이라면, 괜히 건드려 키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살다 보면 남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는 법이니까.
서지훈 총장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기특하네. 수익금을 모교에 기부한다니.”
“그러게요. 전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는데. 확실히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확 들더라고요.”
“상업 영화가 아니라서 얼마나 수익이 날지는 모르겠다만, 좋은 일임엔 분명하구나. 기부한다는 건 제작발표회 때 공개하나?”
“네. 한정현 감독이 새로운 영화를 만든다는 소문이 벌써 퍼져서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고 있다는데, 그냥 제작발표회 때 발표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아마 이번에는 한수영 선생도 가만히 있지는 못하겠지. 어느 쪽으로든 화답을 해야 할 거야. 주 선생이 먼저 손을 내민 거니까.”
“잘 풀리겠죠?”
“글쎄?”
서지훈 총장은 묘한 미소를 짓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뭔가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돌려 민우를 올려다보았다.
“맞다. 할 이야기 있다고 했지? 주 선생 일 때문은 아닐 거고.”
“시간강사 처우 개선 건에 대해서 좀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그렇군. 앉아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서지훈 총장은 중앙에 놓인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다리를 꼬고 여유로운 자세로 민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제가 자료를 살펴보니 생각보다 예산이 빡빡하게 쓰인 것 같았습니다. 알고 계셨어요?”
“알다마다. 강사법 시행 이전보다 더 많은 예산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지.”
“그 상황에서 예산을 더 늘리는 건 어려워 보이더라고요. 이게 한두 푼 늘어나는 게 아니라서요.”
“네가 하고 싶은 정책이 뭔데?”
민우는 안쪽 포켓에서 손바닥만 한 메모장을 꺼냈다. 그리고 첫 면을 펼쳐 필기한 면을 드러냈다.
“우선 방학 기간 중 임금 지급에 관한 규정을 바꾸고 싶습니다.”
“음. 그게 가장 핵심이겠지.”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지금은 삭감된 임금을 2주간 받는 걸로 끝이잖아요. 이래서는 생계유지조차 힘들 겁니다. 그렇다고 의료보험 가입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개정안을 본 관계자들의 반응도 고민해 본 거겠지?”
“규정을 바꾸자고 하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 아니, 반발이라기보다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맞겠네요. 예산이 부족합니다.”
서지훈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예산을 어디에서 끌어오느냐가 관건이 될 거야. 네 말대로 한두 푼 드는 사업이 아니거든. 방학은 못해도 8주 정도는 될 테고, 모든 강사들에게 100퍼센트에 해당하는 임금을 주려면 수십억은 눈 녹듯 사라질 거다.”
“지금 당장 재단전입금을 늘리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겠죠?”
“그건 아직 협의 중이야.”
서지훈 총장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이사장과의 협상이 순탄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애초에 재단전입금을 바라고 일을 추진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재원을 확보하면 그거 나름대로 문제가 될 테고…… 어려운 일이네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뭔가 방법이 있는 겁니까?”
딱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영악하게 웃을 뿐이다.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구나. 한번 잘 생각해 봐. 의외로 가까운 곳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까운 곳이라면…….”
머릿속만 복잡해질 뿐, 조금도 짐작이 가는 곳이 없었다.
“방학 중 임금 지급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그거야. 8주 내내 강의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보직을 받아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임금을 받아 가는 게 과연 정당하냐 이거지.”
“하지만 전임교원들은 방학이든 안식년이든 임금 보장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 차이가 있다면 전임과 비전임을 구분할 이유가 있어?”
민우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지훈 교수가 부정적인 입장에 선 것은 아니다. 예상 반론을 미리 꺼내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처장급 회의가 열렸을 때 나올 수 있는 반론을 미리 접하는 기회인 셈이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단계적으로 보수를 늘려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감성적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이거지. 예산이 필요한 일에는 숫자와 데이터로 접근하는 게 합리적이야.”
“선생님은 이미 답을 알고 계신 거 같은데.”
“생각해둔 방법은 있지.”
그렇게 대답한 서지훈 교수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은근한 표정으로, 마치 민우를 도발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떠먹여 줄 생각은 없다. 너도 명인대의 어엿한 교무처장이잖아? 그렇다면 방법을 청하는 게 아니라 네가 솔루션을 들고 와서 나를 설득해야지. 순서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 드냐?”
“음……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너도 중임은 처음일 테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대학본부의 요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마. 너는 물어보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
서지훈 총장을 만나 상의하다 보면 방법이 생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민우를 빤히 바라보던 서지훈 총장이 돌연 씨익 웃었다.
그가 힌트를 꺼냈다.
“추가 재원을 확보하면서도 시간강사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한번 잘 생각해 봐. 기한은 일주일. 그때 다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네. 알겠습니다.”
서지훈 총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우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총장실을 나섰다. 연구실로 돌아오는 내내 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 해답이라고?’
너무 가까이 있어 보지 못하는 걸까?
민우는 그런 의문을 품으며 연구실의 문고리를 돌렸다.
* * *
다음 날, 지음사 본사에서 ‘박민우 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첫 행사인 만큼 언론 등 여러 미디어에서 관심을 갖고 취재에 임했다. 공중파 방송국의 취재 차량이 줄지어 서 있을 정도였다.
차에서 내린 민우는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좋은 일로 받는 스포트라이트만큼 짜릿한 건 이 세상에 없으니까.
“박민우 교수님!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의 노벨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셨는데요. 전망은 어떻습니까?”
“일본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제되지 않은 질문이 쏟아졌다.
차 문을 닫은 민우는 기자들 앞에 잠시 섰다. 운전을 맡은 레아와 미리 나와 있던 경호원들이 그의 옆에 서서 기자들을 통제했다.
“질문이 너무 많네요. 음, 일단 이렇게 많은 관심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보인 반응은, 글쎄요.”
민우는 피식 웃었다.
시상식을 앞두고 일본 언론에서는 ‘한국의 열등감’이라는 자극적인 카피로 문학상을 연일 비판하기 바빴다.
한국이 일본에 비해 노벨상 수상자가 압도적으로 적다는 이유로,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을 만든 거라는 논조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민우는 그런 자극적인 기사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 전 시미즈 유이토 교수와 그의 제자인 이시카와 류타로가 전화로 대신 사과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할 줄 아는 지식인들이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해서, 민우는 일본 학계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감정적인 결단은 아니었다.
일본 언론이 자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교류를 하지 않겠다 결심한 상황이다.
“오히려 열등감을 표출한 건 일본 언론이 아닐까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잖아요. 딱 그 느낌 아닐까요?”
기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일까. 취재 경쟁이 좀 누그러졌고, 기자들도 질서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때 중년의 기자가 녹음기를 들이밀었다.
“이번 수상자가 발표되고 조금 논란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 교수님의 지인들이 수상자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인데, 어떻습니까?”
“아아, 그거요. 저도 봤습니다.”
상당히 예민한 질문이라 레아가 나서려 했지만, 민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말렸다.
민우는 피하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 고두열 차장과 수상자를 결정할 때도 몇 번 상의했던 내용이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긴 했다.
민우가 관여한 번역 부문에서는 이다혜 정도가 지인이라 할 만하지만, 다른 부문에서는 지인들이 꽤 많이 선정되었다.
소설 창작 부문에서는 주예린이 공로상을 받았고, 연구 부문에서는 민영환이 공로상을, 서강일이 신진연구자상을 받았다.
여기에 특별상 수상자로 청문대 이사장인 정연주가 이름을 올렸으니 지인들에게 상이 몰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만했다.
“이번 수상자 결정은 공정하게 이루어졌다 자부합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시고 신중히 수상자를 정했어요. 오랜만에 지인들 얼굴이나 보자고 상을 뿌린 건 절대 아니고요. 제가 관여한 건 번역 부문뿐입니다. 창작이나 학술 부분은 다른 위원장들께서 맡아 주셨어요. 제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인들이 많이 포함되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요.”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제 탓이 아니잖아요? 제 주변에 계신 분들이 워낙 뛰어난 거니까요.”
민우의 재치에 잠시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탁 하고 풀렸다. 시계를 확인한 레아가 나섰다.
“추가 질문은 시상식이 끝난 이후에 받겠습니다.”
레아가 주변을 정리해 준 덕에, 민우는 편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시상식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