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99화 (399/500)

역린(逆鱗)

민우의 주선으로 한정현 감독과 주예린의 만남은 빠르게 성사되었다.

민우와 한정현 감독은 명인대 근처 카페에 앉아 주예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정현 감독은 평소 잘 입지도 않는 정장을 걸치고 왔다.

“아우, 이거 떨리네요. 소문의 작가님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감독님은 국제영화제에도 초청받는 분인데, 유명 배우들하고 인증샷도 찍으시면서 작가 한 사람한테 왜 그렇게 쩔쩔맵니까?”

민우가 그렇게 반문할 만했다.

한정현 감독은 외국에서도 주목받는 젊은 감독이었다. 으레 감독이라면 개성 있고 자신감이 넘치곤 하는데, 그는 좀 별종이었다.

“배우하고 작가하고 같나요! 작가는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인데요. 신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감독이면 프라이드도 좀 있으셔야지. 그러다간 갑질당하기 딱입니다. 주 작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하하하. 각오하고 나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쇼.”

민우는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더니, 추레한 후드티를 걸친 주예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후드까지 눌러 쓴 데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어 마치 학부생 같았다. 그녀는 강의가 있는 날에도 이렇게 캐주얼하게 입고 오곤 한다.

덕분에 민우만 알아볼 수 있었다.

“왔냐?”

“안녕하세요.”

주예린이 도도하게 인사했다. 그제야 한정현의 눈이 번뜩 뜨였다.

“오오! 작가님! 안녕하십니까.”

벌떡 일어난 한정현이 주예린을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시선이 불편했던 그녀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보시죠?”

“명인대 학부생인 줄 알았지 뭡니까! 워낙 어려 보이셔서요. 이분이 작가님이 맞나 싶어 눈이 제멋대로 움직였네요. 죄송합니다.”

“누가 감독님 아니랄까 봐 아주 청산유수시네.”

주예린이 웃었다.

어려 보인다는 말을 싫어하는 여자들은 없으니까.

한정현 감독이 다시금 인사했고, 품에서 명함을 꺼내 공손히 건넸다.

“한정현입니다.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가워요. 감독님.”

명인대 교수 명함을 건넨 주예린이 자리에 앉았다. 한정현 감독도 마주 앉았다.

“<프로페서> 드라마는 재미있게 봤어요. 그런 지루한 원작을 그렇게 재밌게 만드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했어요.”

“지루하게 써서 미안합니다.”

“하하하하.”

동네북이 되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라, 민우는 그냥 맞장구쳤다.

세 사람은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한창 나눴다. 이미 해외 진출 소식을 들은 터라, 주예린은 심심한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너무 박 교수님 이야기만 했네. 실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교수님 부탁이라서 나온 거예요. 제겐 은인 같은 분이라서요.”

“그럼 제가 왜 뵙자고 했는지도 들으셨겠군요?”

“아뇨. 못 들었어요. 그냥 나와보라고만 하셔서.”

한정현은 의외라는 듯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는 그저 겸손히 웃더니, 계속 말을 이어가라고 손을 내밀어 재촉할 뿐이다.

주예린에게 민우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명문대 교수가 용건도 알지 못한 채 이렇게 약속장소로 나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작가님의 작품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읽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던 <세계수>는 물론이고, 후속작까지 모두 챙겨보았지요. 골수팬이라 자신합니다.”

“그래요? 그럼……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 어떤 거였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방랑자들>입니다.”

싱글싱글 웃던 주예린의 표정이 딱 굳었다.

제목을 말하는 것을 넘어, 한정현 감독은 한발을 더 내디뎠다.

“저는 이 작품을 꼭 영화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멋진 작품을 더욱 많은 분들께 소개하고 싶고요.”

“그래서 오늘 뵙자고 하신 거예요?”

“네. 맞습니다.”

주예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리는 것도 아닌 그런 애매한 표정으로.

“감독님…… 그게 저에게 어떤 작품인지 알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압니다. 큰산대학문학상 수상작이죠. 작가님께서 문단에 이름을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뇨. 그거 말고요.”

주예린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그간 잊고 지냈던, 당시 소설분과 지도교수와의 트러블이 떠오른 것이다.

원로 소설가이자 상아대 교수였던 한수영은 주예린이 가진 작가로서의 재능을 파악하고 그녀를 물심양면 지도했다.

그리고 당당히 문단에 이름을 날리게 됐는데, 이후 주예린이 장르소설 쪽으로 방향을 트는 바람에 사제의 연을 끊었다.

문단을 통해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한수영 교수에게는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건 주예린이 명인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임용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오래 흐른 지금도 두 사람은 교류하고 있지 않았다.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고 해서 과거의 아픔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처도 생기기 마련이다. 상처의 크기와 관계없이 말이다.

한정현 감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대충은 건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문단 활동을 하지 않으시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런데 <방랑자들>로 영화를 만들겠다고요? 무슨 의도이신지 모르겠는데.”

따지는 듯한 어조였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움찔하며 수그렸겠지만, 오히려 한정현 감독은 몸을 앞쪽으로 밀착시키며 주예린을 설득했다.

“이런 말씀 드리면 기분 나쁘실지도 모르겠지만요. 저는 작품의 외적인 것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을 어떻게 연출할지만 고민하지요. 그러니 자연스레 결심이 서더군요. 이 작품은 꼭 영상으로 담아야겠다고. 작가님께는 아픈 손가락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천하의 한정현 감독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저 인사하는 게 아니라, 주예린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고개를 들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중간에 낀 민우가 난처해졌다.

마침 한숨을 내쉰 주예린이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난처해하면서도, 주선자로서의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라는 말씀이에요?”

주예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였다면 벌써 계약서에 사인했어. 이렇게 찾아와서 고개 숙여 부탁하는 감독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있을 거 같아?”

“그건 그렇지만…….”

“작품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지. 그게 독자든 감독이든.”

그 와중에도 한정현 감독은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었다. 민우가 계속 말했다.

“나는 이 문제가 좀 정리된 줄 알았는데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네가 자리 좀 잡으면 자연스럽게 풀릴 줄 알았구만.”

“사람 사이에 생긴 문제가 어디 쉽게 해결되나요.”

“마지막으로 연락드린 게 언제야?”

“기억도 안 나요.”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모든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데, 신경 써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다독이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정면으로 부딪쳐 보는 건 어때?”

“어떻게요?”

“감독님하고 같이 멋진 영화를 만드는 거지. 그리고 멋지게 세상에 공개하는 거야. 선생님을 배신한 게 아니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그걸로 증명이 돼요?”

“적어도 묵혀두고 있는 것보단 낫겠지. 이대로 묻어버릴 생각이냐?”

“너무 모험인데.”

“뭐 어때? 판권 묶여 있는 것도 아니고 네 서재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 작품이잖아. 그런다고 한수영 선생님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작품이 무슨 죄냐?”

주예린이 빤히 노려보았다. 민우는 자신의 말에 틀림이 없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커피를 홀짝일 뿐이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정현 감독을 빤히 바라보던 주예린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민우의 말이 맞다.

죄가 있다면 자신에게 있지, 써진 작품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주예린이 감았던 눈을 떴다.

“고개 드세요. 감독님.”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이대로 있을 생각입니다.”

“그러다 목디스크 와서 고생하시지 마시고요.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에요?”

어조가 조금 누그러졌다. 한정현 감독이 반색하며 고개만 들었다.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조건이 있어요.”

“편히 말씀하시죠.”

한정현 감독이 똑바로 앉았다. 허리를 곧추세우면서.

“각본을 제가 따로 할 시간은 없어요. 그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감독님이 직접 해주세요. 배우 섭외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이 영화 제작에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을 거예요.”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겠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한정현 감독으로서는 반색할 만한 일이었다. 각본을 쓰는 거야 감독의 기본 소양이고, 캐스팅 권한도 본인에게 있으면 좋으니까.

당연히 한정현 감독이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주예린의 입에서 한마디가 더 흘러나왔다.

“영화 수익금이 발생하면 일부를 모교에 장학금으로 쓰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일부라면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감독님 의견을 먼저 듣고 싶은데요.”

“수익 전액. 어떻습니까.”

당사자인 주예린은 물론, 민우도 놀랐다. 일정 부분도 아니고 전액을 장학금으로 쓰겠다니.

한정현 감독이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돈 벌려는 목적으로 만드는 영화가 아닙니다. 저는 통장 잔고보다는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네요. 좋은 취미엔 원래 돈이 많이 들어가는 법 아닙니까?”

“진심이세요?”

“물론이죠. 그건 작가님도 마찬가지이실 것 같은데.”

처음으로 한정현 감독이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왔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주예린이 풋 하고 웃었다.

그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배우가 아닌 이상에야.

“좋아요. 그럼 수익 전액을 장학금으로 기부하죠. 상아대 국문과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학생들의 창작 장려금으로 썼으면 해요. 그게 제 마지막 조건이에요.”

한정현 감독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직각으로 인사했다.

“멋진 영화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아유, 쪽팔리니까 목소리 좀 낮추세요 제발!”

“하하하. 넵. 알겠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은 한정현 감독이 가방에서 서류 꾸러미를 꺼냈다. 바로 영화 제작과 관련한 계약서였다.

민우는 계약서를 꼼꼼히 검토하는 주예린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 나름대로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 같다.

상대가 화답하든 그렇지 않든, 이번 기회를 통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잠들어 있던 작품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으니까.

“아, 그런데 작가님. 박 교수님께 들었는데, 요즘 좋은 일 있으시다면서요?”

계약서를 살펴보던 주예린이 고개를 들었다.

“박 교수님이 그런 이야기도 했어요?”

“좋은 일이 있으셔서 협상이 잘될 거라고 하셨지요.”

“있긴 해요.”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음, 아직 말하긴 좀 부끄러워서요. 차차 알게 되실 거예요. 좋은 일이니까.”

한정현 감독은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예린의 서명이 계약서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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