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방연 (2)
본인만 축하받을 일이 아니라는 건 다른 사람도 축하받을 일이 있다는 거다.
지금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
민우도 축하받을 일이 있다는 걸까?
‘로열티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것밖에는 축하받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뭐지?’
그렇다고 한정현 감독이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사람과 작품에 대한 욕심이 많으면 많았지, 돈 이야기를 하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다.
한정현 감독이 나직이 말했다.
“다음 시즌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주연들이 해외 스케줄을 소화하게 될 겁니다. 거기에 박 교수님도 같이 와줄 수 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제가요?”
“그럼요. 박 교수님이죠!”
한정현 감독이 술잔을 채우려고 하자, 민우가 재빨리 소주병을 낚아채 먼저 잔을 채워주었다. 한정현 감독은 고맙다며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대학을 배경으로 하는 독특한 드라마다 보니 다들 관심이 높습니다. 다른 나라는 뭐 주연 배우들 덕을 본 것도 있지만, 중국은 좀 달라요. 교육열이 어마무시하잖아요? 유럽 쪽으로 유학도 많이 가는 나라고.”
어느새 주연 배우인 허윤과 김보영도 이쪽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쁜 일은 아니라, 한정현 감독은 솔직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정현 감독이 민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친근함의 표시다.
“그래서 박 교수님이 오셔서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주요 대학 순방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는군요. 크으! 소주 맛 좋다! 하하하하! 아이고. 교수님 잔이 비셨네? 받으시죠.”
이번엔 한정현 감독이 민우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예전이었다면 얼떨떨한 느낌으로 정말이냐고 물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또르륵.
민우는 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근데 별로 좋아하시는 표정이 아니십니다?”
“아뇨.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요. 해외 출장이야 가끔 있는 일이거든요.”
“민우 형은 아랍에미리트에 국빈으로 초청도 받은 분이에요. 교수로 순방 가는 게 재미나 있을까요? 핵노잼이죠.”
허윤이 끼어들었다. 그 말을 듣곤 한정현 감독이 무릎을 탁 쳤다.
“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박 교수님은 어딜 가든 귀빈 대접을 받으시니 성에 안 차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걸 생각 못 했네.”
“아뇨. 그냥 익숙해서 그래요. 요즘은 해외에 잘 나가지 못하긴 했지만 예전에는 자주 나가곤 했거든요.”
명인대 교수에 임용되기 전, 민우는 바쁘게 오가며 해외 학회에 참석했었다. 연설도 하고, 학계의 유명 인사들과 친분을 다졌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 대학을 순방하는 것은 크게 부담스러운 일정이 아니었다. 예전에 칭화대에서도 강연을 한 번 한 적도 있었고.
허윤이 반색하며 말했다.
“예전에 형하고 아프리카도 갔다 왔잖아요. 그때 기억나요?”
“그럼, 당연하지.”
많은 일이 있었던 아프리카행이었다. 그때 자서전의 표지가 나오기도 했고, 정연주에게 장문의 편지를 받기도 했었으니까.
“그때 다시 가기로 애들이랑 약속했는데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워요. 형도 그렇지 않아요?”
“맞아.”
허윤도 소주잔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보영이 건배를 해주었다.
허윤의 얼굴을 보니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하고 있다.
민우는 그 이유를 안다.
아역배우 출신인 그가 지금까지 별다른 잡음 없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보다도 선하고 순진하기 때문이다.
그가 연예인이니 더욱 주목받는 거고.
“나중에 스케줄 비면 한번 가자. 안 그래도 알 카흐파 의장님께서 한번 오라시더라고.”
“그거 좋죠!”
“그때도 특집방송 편성해서 가든가.”
당시 허윤은 취재팀을 꾸려 아프리카 봉사활동 과정을 생생히 찍었다. 그 내용은 특별 방송으로 편성되어 전파를 탔다.
하지만 허윤은 고개를 홰홰 저었다.
“아뇨! 그냥 편하게 가고 싶어요. 옆에 카메라가 있으니 뭔가 가식적인 것 같아서요.”
“마음대로 해.”
“자, 우리 박 교수님을 위해 한잔할까요?”
김보영이 건배를 제안했다. 잔을 채운 사람들이 흔쾌히 잔을 들었다.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수많은 팬을 보유한 김보영은, 술을 조금씩 홀짝이며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러운데…… 저는 교수라는 직업에 대해 좀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거든요. 요즘 갑질 사건도 많고, 성범죄도 많고 하니까요.”
민우는 김보영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는 볼이 살짝 붉어졌을 뿐, 전혀 취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교수님을 보면 정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시고, 또 교육 봉사도 많이하시고. 따르는 제자들도 엄청 많다면서요?”
“그래 보여요?”
“굉장히 매력적인 분인 것 같아요.”
건강한 남자라면 한 번쯤은 설렐 만한 그런 대사였다.
대한민국 탑 여배우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 주변이 술렁거렸다. 허윤이 그걸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강적인데요? 이수빈 교수님께 전해드리고 표정을 한번 보고 싶은데. 다들 어떠십니까?”
“아,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구…… 인간적으로 굉장히 매력적인 분이라구요.”
“내일 조간신문 1면 예상합니다. 감독님. 우리 다음 시즌 무사히 제작할 수 있을까요? 기자회견부터 해야 할 거 같은데.”
“허…… 그러게.”
농담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소리 높여 웃으며 잔을 채웠다. 맑은소리와 함께 잔이 부딪치고 술이 막힘없이 들어갔다.
민우가 말했다.
“생각보다 좋은 선생님들 많습니다. 제가 좋은 교수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주변에 멋진 분들이 워낙 많아서요.”
“그래요?”
“갑질이니 뭐니 해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언론에서 다루지 않잖아요. 명인대 국문과만 해도 존경받을 만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다른 대학에도 많고요.”
여러 교수들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위대한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송현우 교수는 물론, 그 유지를 이어받은 서지훈 교수와 동료인 설예라 교수까지. 한때 자신을 괴롭히긴 했지만 스스로의 허물을 반성하고 마음을 고쳐먹은 민영환 교수도 그 범주에 포함된다.
그리고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런 편견은 버리시고 다음 시즌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넵! 다음 시즌 촬영 때는 자주 와주시는 거죠?”
“스케일이 커졌으니 저도 얼굴 자주 비춰야죠. 노력해 보겠습니다.”
밤늦게까지 술자리가 계속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주조연 가릴 것 없이 섞여 앉았다.
민우는 잠시 이수빈에게 전화도 할 겸 한숨 돌리려고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꺼낸 민우가 전화를 걸었다.
― 이제 끝났어요?
“아니. 오늘 좀 늦게 들어갈 거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 지금 소윤이 와 있어요. 나도 늦게 잘 거지롱~
이수빈이 놀리듯 말해서, 민우는 피식 웃었다.
“바쁜 사람 너무 자주 불러내는 거 아냐?”
―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먼저 연락 왔어요. 날도 덥고 시원한 거 먹고 싶다고.
“그럼 다행이고.”
― 그쪽은 별일 없어요?
민우는 한정현 감독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자랑하듯 꺼내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해외 순방 일정이라면 집을 오래 비워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수빈이 그만큼 고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 윤아가 학교에 가려면 1년 정도는 더 있어야 하니까.
― 잘됐다! 오빠 요즘 비행기 많이 못 탔잖아요. 바쁘긴 해도 웬만하면 거절하지 말고 한번 다녀와요.
“그래도 돼?”
― 안 될 건 또 뭐죠?
“학교 일이 좀 마음에 걸려. 서지훈 선생님도 불철주야 고생하고 계시는데 나만 놀러 다니는 것 같아서.”
―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지.
이수빈이 웃었다. 수화기 너머로 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소윤과 재미있게 놀고 있는 듯했다.
― 오빠는 학자잖아요. 대학원 입학할 때 세웠던 목표, 이제 흐릿해진 거 아니죠?
“그런 건 아냐.”
― 왜 우리가 만든 이론은 해외에 소개되기 어려운 걸까? 늘 그런 의문을 품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오빠가 학계의 거장이 돼서 한국인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고. 그럼 외국으로 나가서 교류도 하고, 친목도 다지고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예.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 혹시라도 내 눈치 보여서 고민하고 있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민우는 영악하게 웃었다.
“눈치 본 적 없는데?”
― 아…… 막상 들으니 되게 서운하네.
“하하하. 농담이야. 눈치 봤으니 이렇게 전화로 보고하는 거지.”
― 아무튼 꼭 가겠다고 하고 와요. 어차피 우리 윤아는 엄마를 더 좋아하니까~
“야.”
한차례 웃은 이수빈이 잘 놀다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 좀 떨어져 있던 한정현 감독이 담배를 물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수빈 교수님께 허락받으신 겁니까?”
민우는 핸드폰을 들어 이수빈이 어떤 별명으로 저장되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한정현 감독이 배를 잡고 웃었다.
“내무부장관이라니. 학계의 거장이신 교수님도 잡혀 사시는 건 어쩔 수 없군요! 하하하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 의미로 부럽습니다. 정말로요.”
“감독님도 빨리 결혼하셔야죠.”
“그건 좀.”
두 사람은 기다란 연석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한정현 감독은 민우를 배려해 담배를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사모님 반응은 어떠십니까?”
“거절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하네요.”
“그거 다행이군요.”
“그런데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감독님께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아! 오해하지 마십쇼. 지음사에서는 아직 조심하고 있을 겁니다. 완전히 결정된 이야기는 아니라서 말이죠. 중국 그쪽은 말 바꾸기로 유명하거든요.”
문화계는 물론 산업계에도 말 바꾸기로 유명한 곳이다. 학계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게 없다. 정권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실무자들이 일을 진행하고 싶어도 당국에서 허가하지 않는다면 백지가 되는 일도 허다하다.
그나마 <프로페서>가 정치색이 거의 없고, 한 사람의 교육적인 일대기라 허가를 받았을 거라 추측하고 있었다.
“게다가 뭐였더라…… 교수님 이름을 딴 문학상 시상식도 곧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쁘실 거라고 조심하는 것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교수님.”
한정현 감독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좀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아, 말씀하시죠.”
혹시라도 교수직과 관련된 청탁일까?
영화감독도 대학에 나가 교수를 하는 일이 많다. 영화예술학과가 없는 대학은 거의 드무니까.
하지만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괜찮으시면 그…… 주예린 작가님과 자리 한번 만들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주 작가요?”
“예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교수님과는 무척 각별한 사이라고 들었거든요. 처음 작가님이 센트럴 북스 쪽하고 계약할 때도 고민이 많았는데, 교수님이 조언을 해 주셔서 결심했다고 인터뷰에서 봤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민우는 잠시 고민되었다.
한정현 감독이 이런 부탁을 하는 이유는 뻔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전부터 주예린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요즘 주 작가가 새로 글 쓰는 건 없는 것 같던데. 모르겠네요.”
“저는 오히려 주 작가님의 등단작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등단작이요?”
“큰산대학문학상에 출품했던 단편 말입니다. 그걸 좀 영화로 만들고 싶어서요.”
큰산대학문학상은 국내 대학 및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매년 개최되는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예린은 제11회 큰산대학문학상에서 수상하여 등단했다. 그때 수상한 작품의 이름은 <방랑자들>로, 평론가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거라면…… 출간된 지 좀 됐으니 판권도 주 작가가 가지고 있겠네요. 장르소설이 아니니 센트럴 북스에서도 별 관심이 없을 거고.”
“바로 그거죠.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음, 알겠습니다. 한번 이야기는 해볼게요. 마침 시기도 좋네요.”
“시기가 좋다는 건 어떤 의미십니까?”
“최근에 주 작가한테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아마 협의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민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