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방연 (1)
길었던 1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이 찾아왔다.
날이 본격적으로 더워지자 사람들은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휴가를 떠났다.
하지만 민우는 이번 휴가를 반납해야 했다.
서지훈 총장도 휴가를 반납하고 매일 출근하고 있는데, 제자가 마음 편히 여행을 떠나긴 어려웠다.
여행이야 언제든지 가면 그만이지만, 시간강사 처우에 대한 새로운 규정은 빨리 만드는 게 좋다.
“오셨어요?”
차민재는 오늘도 여전히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 학기에 성공적으로 세 편의 논문을 발표한 그는, 한 학기 만에 교수들의 인정을 받으며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난 루카치의 유물을 얻고 나서야 겨우 인정을 받았는데. 참 대단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석사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으면 명인대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민우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민재야. 넌 휴가 안 가냐?”
“대학원생한테 휴가가 어딨어요. 도서관에서 에어컨이나 쐬고 있어야죠. 괜히 나가 봐야 덥고 고생만 하죠.”
“누가 들으면 대학원생이 대역죄인인 줄 알겠네.”
“그런 이야기도 있잖아요. 학부 때 잘못을 저지르면 감옥이 아니라 대학원으로 끌려오는 거라고.”
민우는 피식 웃었다.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정장 재킷을 벗었다. 민재가 일찍 에어컨을 틀어놓은 덕분에 시원했다.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니 내가 악덕 교수가 되는 거 아냐? 계곡에 가서 물놀이나 하고 와. 박사까지 갈 길이 구만리다. 재충전도 제때 해야지.”
“알겠습니다.”
“말만 알겠습니다 하지 말고 이번 주는 좀 쉬어라. 응?”
“넵.”
자리에 앉은 민우는 일전에 김명현이 정리해 주었던 자료를 꺼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이나 검토한 이 자료는, 이제 민우의 머릿속에 온전히 들어가 있었다.
‘문제는 개선안을 어떻게 내냐 이건데.’
자료를 검토하고 다방면으로 생각한 민우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시간강사 처우를 좀 더 좋게 하려면 예산 확보가 우선이라고.
이 문제는 교무처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재무과와 먼저 협의가 되어야 한다.
무작정 시간강사 복지 증진을 위해 10억을 지출해 달라는 결의안을 올려봐야 돌아오는 것은 퇴짜밖에 없을 것이다.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자얀이었다. 그는 민우의 대학 개혁안을 지지했고,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구비가 이공계 쪽으로 다 흘러가서 아쉽긴 해도 손을 벌릴 순 없지.’
이유는 간단했다.
서지훈 교수는 재단전입금, 즉 재단에서 대학 운영을 위해 출자하는 액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대규모 외부 자본을 들여온다면, 재단은 놀란 거북이처럼 단단한 갑각 안으로 숨어버릴 거다.
그렇게 되면 운영은 쉬워도 본질적인 개혁과는 멀어지게 된다.
즉 외부에서 연구사업을 따내거나 기금을 조성하는 것은 좋은 방책이 아니었다.
‘역시 선생님하고 좀 상의해 보는 게 좋겠어.’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서지훈 총장에게 다이렉트로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이내 집어넣고는 전화기를 들어 내선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네, 총장실입니다.
“안녕하세요. 국문과 박민우입니다. 총장님과 통화하고 싶은데 자리에 계실까요?”
― 안녕하세요. 박민우 교수님. 죄송하지만 지금 손님이 와 계셔서요. 통화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메모 남겨드릴까요?
“예. 부탁합니다.”
역시 서지훈 총장은 쉴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원칙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측근이라고 해서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서지훈 총장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될 것이기에.
‘선생님께 연락 올 동안 계획 좀 세워봐야지. 어차피 제대로 된 기획서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전화를 끊은 민우는 옆에 놓여 있던 빈 노트를 집었다. 그리고 만년필을 꺼냈다.
그것은 루카치의 만년필이 아니었다.
동료들이 선물해준 만년필이었다. 루카치의 만년필은 그의 조카인 페렌츠에게 돌려주었고, 후에 헝가리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선물 받은 만년필이 루카치의 만년필을 대신하고 있었다.
민우는 현재 명인대의 시간강사 관련 규정을 떠올리며 계획을 세워갔다.
‘강사들 보수 자체는 나쁘지 않아. 오히려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게 문제지. 1년 단위로 계약한다고 해도 강의가 없는 방학에는 보수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어.’
현재 명인대 시간강사는 강의가 없는 방학이 되면 2주 치의 보수를 받게 된다. 그것도 삭감된 금액으로.
강사법 시행 이전보다 나아진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대학의 방학 기간은 보통 2개월이 넘는다.
혼자 생활하는 강사들이라면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가정이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게 된다.
수업이 없는 기간의 보수 지급은 개별 임용 계약에서 정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
‘정부에서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하려는 것 때문에 역효과가 나고 있어. 보수를 올리는 것보다 방학 때 안정적으로 강의료를 가져갈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해.’
하지만 민우는 선뜻 펜을 움직일 수 없었다. ‘방학 기간 중 보수 지급’이라는 글자에서 멈춰 있다.
‘그러려면 예산을 훌쩍 초과해 버릴 텐데. 못해도 수백에 달하는 시간강사들의 임금을 6주 치 이상 지급해야 하니까. 시급이 지금 8만 원 정도니…….’
단순 계산으로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가게 된다.
돈이 아까워서 고민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좋은 기획안을 가져간다고 해도, 현실성이 없다면 승인되지 못한다.
‘어려운 일이야.’
고민이 길어지는데도 마땅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건 좀 천천히 봐야겠다. 지금은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좋겠어.’
이후로 민우는 다른 방향에서 시간강사들의 강의 및 연구 활동을 독려할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만년필이 바쁘게 움직였다.
전용 연구실 확충, 연구비 지원 등 다양한 방책이 노트에 기록되었다.
‘기자재를 활용하는 건 특별히 예산이 들지 않는 거니 추진하기 쉽겠지. 총무처장님을 한번 만나봐야겠는데. 반응이 어떠려나.’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으나,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위해 전용 공간을 확충하는 사례는 없다고 봐도 좋다. 민우가 계획한 것은 2인 1실이라도 전용 연구실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조금 과격하게 비유하자면 노비에게 주인집 방을 한 칸 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 내부 시설을 관리하는 책임자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뭐, 한번 부딪쳐 봐야지. 비웃음 사는 것밖에 더하겠어?’
그나마 석사 1학기 때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그때 받았던 조롱과 멸시보다는 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 * *
결국 그날 서지훈 총장을 만나진 못했다. 그는 다음에 보자는 간단한 톡만 보내왔다.
‘정말 바쁘신가 보네.’
민우는 알겠다며, 더운데 건강 조심하시라는 톡을 남겼다.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을 번 것 같아서 홀가분했다. 무엇보다도 서지훈 총장이 바쁜 것이 대학과 후학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그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먼저 간다. 적당히 하고 일찍 들어가.”
“예. 선생님. 내일 뵙겠습니다.”
“오냐.”
연구실을 나선 민우는 버스를 타고 전에 안내받은 장소로 향했다.
그가 내린 곳은 KBC 방송국이었다.
민우는 조금 더 걸어 근처에 있는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굉장히 크고 넓은 곳이다.
한쪽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프로페서> 시즌 1의 종방연을 축하하는 현수막이었다. 그래서 연기자와 스태프가 한 층을 다 차지하고 앉았다.
못해도 50명은 넘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술을 마시는 사람도 없었고, 고기도 굽지 않은 채 한쪽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박 교수님!”
“이제야 오셨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한정현 감독이 벌떡 일어나 민우를 상석으로 안내했다. 민우는 손을 내밀며 사양했다.
“감독님이 상석에 앉으셔야죠. 제가 옆에 앉겠습니다.”
“제가 원작자님을 상석에 앉히는 버릇이 있어서 말이죠.”
“오늘은 그 버릇을 고치셔야겠는데요?”
스탭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쩔 수 없이 한정현 감독이 상석에 앉고, 민우가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맞은 편에는 허윤과 김보영이 보였다.
두 사람은 작중 주인공인 박진수와 이수연을 연기했다. ‘우주 제일의 캐미’라는 찬사를 받으며 열애설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당연히 두 사람은 싱글벙글이다. 그만큼 작품이 잘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해요? 다들 한창 먹고 마실 시간인데.”
“주인공이 안 오셨는데 어떻게 시작합니까?”
“주인공은 여기 계시잖아요.”
민우가 허윤과 김보영 두 사람을 정중히 가리켰다. 호탕하게 웃은 한정현 감독이 테이블을 툭툭 쳤다.
“진짜 주인공은 박 교수님이죠. 원작자 아닙니까?”
“……이제야 왜 작가들이 감독님하고 작품을 하려고 하는지 알겠네요. 전 그냥 고기 한 점 주워 먹고 가려고 했는데.”
“그건 곤란하죠. 오늘은 5차까지 가셔야 합니다. 자자! 잔들 채우자고!”
한정현 감독의 허가가 떨어지자 그제야 모두가 술을 잔에 채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보니 오늘은 일찍 가기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십니까? 한 말씀 하셔야죠?”
“제가요?”
한정현 감독이 손짓하며 재촉했다. 민우는 어쩔 수 없이 헛기침을 한번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일단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시즌 촬영이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고, 다음 시즌도 잘 부탁드립니다.”
“에이, 노잼이다. 대학교수들은 다 그럽니까?”
허윤의 한마디에 민우가 움찔했다. 그를 빤히 노려보던 민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기사를 보니 지난 화 시청률이 9.7퍼센트더라고요. 최종화는 두 자릿수를 넘겼으면 좋겠습니다. 제 작품이 그래도 나름 글로벌 베스트셀러인데 그 정도는 나와야 하잖아요?”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왠지 농담이 진담으로 들린 것 같은 분위기다.
건배사는 정말 어렵구나. 민우는 속으로 자책하며 잔을 들었다. 겉으로는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아, 오해는 마세요. 다음 시즌에서는 저도 두 팔 걷고 도와드리겠다는 의미니까요. 하하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쯤 건배하실까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건배!”
잔이 부딪치고, 고기를 굽고, 그간 밀렸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우는 한정현 감독과 가까이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시청률은 무난하게 두 자리는 넘어갈 겁니다. 오히려 지금 걱정해야 하는 건 다른 문제죠.”
“걱정해야 할 일이 또 있었습니까?”
“좋은 의미로 해야 하는 걱정이랄까요. 아직 소식 못 들으셨죠?”
“예.”
한정현 감독이 민우의 빈 잔으로 소주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잔을 들어 건배했다.
“우리 드라마 말이죠. 중국을 포함해 해외 3개국에 수출되기로 결정된 모양입니다. 그러니 다음 시즌 제작은 지금보다 더 빡세지겠지요.”
“아, 축하드립니다!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다 감독님 덕분입니다.”
“글쎄요. 저만 축하받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한정현 감독이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으며 민우를 은근히 바라보았다.
그에겐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