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96화 (396/500)

그만큼 오래 근속했다는 이야기였다.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분이라니 굉장하네요! 오히려 제가 과장님께 배워야 할 게 많을 것 같습니다.”

“별말씀을요.”

“아시겠지만 총장님도 새롭게 오셨고 우리 대학의 많은 부분이 바뀔 겁니다. 앞으로 도와주실 일이 많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제가 드릴 말씀이지요. 필요하신 것들이나 시키실 일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 주십시오.”

“그래서 말인데, 지금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교무처 직원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해졌다. 모든 직원이 자신에게 호의적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중에는 이사회와 연이 닿아 있는 사람도 있고, 전임 총장에게 포섭된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민우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과정이 순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편히 말씀하십시오.”

앞으로 손을 공손히 모은 변호영 과장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민우가 물었다.

“어제 김명현 실장이 시간강사 관련 자료를 정리해 가져온 건 들으셨지요?”

어제 처장실로 안내해 준 이창민 주임이 뜨끔하는 게 보였다.

처장실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실무 책임자에게 보고가 안 올라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변호영 과장이 조심스레 답했다.

“예. 들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뇨. 문제는 아니고요. 자료 파악에 도움이 좀 필요해서요. 아무래도 예산과 직결된 부분이 많다 보니까 혼자서 보기 어려울 것 같네요.”

“그런 거라면 제가 잘 아니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민우는 안으로 손짓했고, 고개를 숙인 변호영 과장이 민우의 뒤를 따라 처장실로 들어갔다.

* * *

‘생각보다 예산이 타이트하게 집행됐구나.’

민우는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오전부터 두 시간 동안 변호영 과장의 도움을 받은 덕에 현재 명인대의 현황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예상하던 것과는 다른 부분들이 많이 나왔다.

민우가 가장 신경 쓴 것은 바로 예산 집행 부분이었다.

정확히는 시간강사에게 들어가는 비용, 좀 더 세부적으로는 임금이나 기타 복지에 대한 비용을 가장 먼저 확인했던 것이다.

‘강사법 시행 전보다 지출이 30퍼센트 정도 늘었어. 이러면 상황이 좀 달라지는데…….’

변호영 과장의 설명으로는, 강사법이 시행되기 이전보다 오히려 지출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된다면 강사법을 빙자해 대학이 예산을 줄였다는 논리는 펼치기 어렵다.

숫자로만 따지면 오히려 시간강사들의 대우가 훨씬 좋아진 것이다.

‘그렇다고 변호영 과장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5년 전 작성된 예산 자료를 요구한 뒤 그것만 확인하더라도 사실인지 거짓인지 뻔히 알 수 있으니까.

민우를 포함해 여섯 명의 처장을 모신 사람이다. 그런 허튼 수로 상대를 기만하려는 짓은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김명현 실장이 자신 있게 자료를 정리해 온 이유가 있었네. 어디 한번 해 볼 테면 해 봐라 이건가?’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 민우의 손엔 여전히 낼 수 있는 패가 몇 개 있었다.

‘연주 통해서 다른 사립대들 상황을 살펴봐도 되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밀어붙여도 되고. 방법은 많지. 어느 타이밍에 패를 내느냐가 중요할 뿐.’

똑똑.

그때 변호영 과장이 열려있는 문을 노크했다. 민우는 굳이 문을 닫아 놓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누구나 들어오라는 의미였다.

“처장님. 곧 점심시간인데 식사 안 하십니까?”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민우가 새삼스럽게 물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정오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약간 출출한 것 같기도 하다.

민우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좀 봐야 할 게 남아서요.”

“오는 길에 간단히 뭐라도 좀 사다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따 연구실에 가봐야지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가려던 변호영 과장을 민우가 불러세웠다.

“과장님. 조만간 날 잡아서 저녁 식사라도 하시죠. 오자마자 일만 하려니 직원분들하고 좀 가까워질 기회가 없네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날짜만 정해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웃으며 묵례한 변호영 과장이 밖으로 나갔다. 직원들이 하나둘 식사하러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개의치 않고 다시 서류를 집었다.

그때 얌전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박 선생.”

“아, 선생님. 어서 오세요.”

민우가 재빨리 일어날 정도의 관록을 가진 사람이었다. 청록회 멤버이자 국문과 교수인 설예라였다. 민우는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찾아가야 하는데 직접 오시게 했네요.”

“무슨 말씀을. 처장님이 부르시면 집에서라도 달려와야지요.”

“너무 놀리지 마세요. 안 그래도 힘들어요.”

“그래서 부른 건 아닐 테고?”

설예라 교수는 서지훈 총장의 뒤를 이어 국문과 학과장을 맡고 있다. 시대가 변해 학과장의 지위가 예전 같진 않지만, 그래도 학과의 대소사를 결정할 정도의 위치에 있다.

“그런 건 아니고요. 뭔가 사후 보고 느낌인데, 좀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요.”

“으응? 뭔데?”

“서지훈 선생님 후임을 모시려고 합니다.”

그 말에 설예라 교수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네. 교수 임용권 가져가더니 벌써 자기 사람 채우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요. 어차피 서지훈 선생님도 연임하실 거 아니면 다시 강단으로 돌아오실 테니, 그때까지 시간강사로 빈자리를 대체할 생각입니다.”

“응? 시간강사?”

설예라 교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민우의 속내를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청록회’의 핵심 멤버다.

민우와 서지훈 교수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 어떤 모양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거구나? 하긴, 혼자 짊어지기엔 조금 무거운 짐이긴 해. 그래도 시간강사보단 초빙교수 쪽이 좋지 않아?”

“아뇨. 현장에서 목소리를 전해줄 믿음직한 사람이 필요해요. 그렇다고 진섭이를 시간강사로 보낼 순 없잖습니까.”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되나?”

“서강일 선생이요.”

“서강일 선생이라면…… 지금 한일대에 있지 않아?”

“좀 일이 있었어요. 아마 한일대엔 당분간 강의 못 나갈 겁니다.”

설예라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고, 깊게 캐묻지 않았다. 초빙교수가 당분간 강의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서강일 선생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사람이 시간강사로 오려고 할까?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 그쪽 선생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었구나.”

민우는 대답 대신 미소를 그렸다. 이내 설예라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명분은 충분하니 서류 준비해서 올릴게. 이거 총장님하고 상의 된 건가?”

“아뇨. 그 정도는 선생님 선에서 정리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잘했어. 가뜩이나 총장님 신경 써야 할 일도 많은데 우리가 짐 덜어 드려야지.”

“그래야죠.”

“더 할 이야기는 없고?”

“예. 지금 연구실로 바로 가실 거죠? 같이 가시죠. 저도 가봐야 해서요.”

민우는 책상에 놔둔 서류 꾸러미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대학본부 건물을 나서 인문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근황을 주고받으면서.

* * *

연구실로 돌아오니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음사의 고두열 차장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전해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연구실에 계실 거 같아서 지나가다 들렀죠.”

“그럼 전화를 하시지.”

“새로 보직도 받으셨는데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민우는 싱겁게 웃었다.

고두열 차장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대우가 조금 달라짐을 느꼈다. 명인대 교무처장 자리가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업무는 어떠십니까?”

“아직 잘 모르겠어요. 열심히 해 봐야죠. 요즘 문학상 마무리 때문에 많이 바쁘시죠?”

“이제 바쁜 건 다 끝났습니다.”

고두열 차장이 커다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민우는 그것을 받아들고 안에 든 종이를 꺼냈다.

‘박민우 문학상’ 최종 수상자 명단이 적힌 종이였다.

“아마 지금쯤 수상자들에게 연락이 갔을 겁니다. 지음사 홈페이지와 언론에도 공지가 될 거고요. 이달 말에 본사에서 시상식을 열 계획입니다.”

민우는 설명을 들으며 번역 부문 수상자 명단을 향했다.

공로상 부문에 김태현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수상 거부는 하지 않은 모양이네요.”

“혹시 몰라서 제가 얼마 전에 다시 통화했었는데 덤덤히 받아들이시는 거 같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제1회 시상식에 수상 거부가 나오면 그것도 나름 오명이었다.

그가 수상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어, 최종 명단이 나오기 전에 그에게 수상 사실을 알린 적이 있다. 그때는 확답을 하지 않았는데 얼마 전엔 상을 받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시상식 때 마주치는 게 좀 부담스럽지는 않으신지…….”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진심으로 축하드릴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면 묵었던 오해도 좀 풀리겠죠.”

“정말 대단하시네요. 교수님은. 저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다고 뭐 안 나와요.”

“하하하.”

고두열 차장은 시상식 순서와 절차에 대해 설명했다.

각 부문의 대상은 민우가 직접 시상하고, 나머지는 지음사 임직원이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우리나라 대표 언론은 물론, 해외에서도 현장 취재를 나올 예정입니다. 초대장을 발송할 계획인데요. 인터뷰 괜찮으시죠?”

“가능하면 가디언의 조슈아 벨라미 씨도 초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간단히 메모한 고두열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우가 그를 배웅했다.

“송 이사님은 요즘 어떠세요?”

“요즘 기분 좋아 보이시더군요. 아무래도 부군께서 요직에 오르셨으니 말이죠.”

“이사님 도망가지 않게 잘 잡으셔야 합니다. 한때 교수가 꿈이었던 분이니까. 판이 제대로 깔렸으니 차장님 버리고 도망 오실지도 몰라요.”

“하하하하. 알겠습니다. 안부 전해드리죠!”

고두열 차장이 꾸벅 인사하고 계단을 내려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민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제1회 박민우 문학상 번역 부문 신인상을 받게 된 이다혜의 전화였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던가.

그런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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