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95화 (395/500)

금기어 (2)

깍지 낀 민우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강일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는 선에서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는 문학도다. 단어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곧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추고, 민우의 입이 열렸다.

“일단 그 전에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해 봐.”

서강일이 손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하라는 제스처다.

“다음 학기에 외부에서 강의할 생각 있냐?”

“일시적인 걸 말하는 거야, 아니면 한 학기 채워서 하는 걸 말하는 거야?”

“굳이 말하면 후자에 가깝지.”

서강일은 최근 많은 기업체와 단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성공적으로 비영리 교육 단체를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잡지나 뉴스에 출연한 것은 물론, 각종 대기업에서도 강연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고 들었다.

휴머니티는 이제 공교육을 대신할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성공 비결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후자라면 대학일 텐데…… 딱히 생각은 없어. 누군가 떠먹여 줄 정도가 아니라면 할 생각은 없다. 좀 지쳤거든.”

“마음이 뜬 거야?”

“떴다기보다는 너무 바빠서 말이지. 누군가 무책임하게 학장 자리를 던지고 도망갔잖아? 민희와 약속한 것도 있고. 2학기에는 휴머니티에 집중해 볼 생각이야. 단발성 외부 강의 나가면서.”

잠시 뜨끔한 민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대했던 것처럼 서강일은 대학 전임 교수에 대한 미련을 서서히 벗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대학 전임 교수가 아니라 한일대 정교수지만.

지금 짓고 있는 저 여유로운 표정이 증거다.

그만큼 휴머니티의 존재가 그의 인생을 서서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람직한 일인지는 아직 모른다.

수십 년이 지나고, 자신의 일생을 돌이켰을 때 그때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테니까.

“실은 명인대에 자리가 하나 날 예정이야. 서지훈 선생님 자리가 비었거든.”

“아, 너 교무처장이었지?”

서강일이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하지만 속으로는 긴장했다. 서지훈 총장의 자리가 비었다는 것은, 즉 명인대 국문과에 자리가 하나 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서강일도 국문학, 그것도 현대소설 전공이다.

만약 채용이 진행된다면 자신도 그 자리에 도전할 자격이 주어진다.

물론 명인대 국문과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바로 학부가 명인대 출신이 아니라면 임용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그 룰은 민우가 깨버린 상황.

기회가 자신에게 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말하는 건 나한테 자리 하나 주려고 그러는 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민우가 선선히 대답하자, 서강일은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일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지훈 선생님 뒤를 잇는 자리인데 내가 어울리기야 하겠어? 손가락질만 안 당하면 다행이지.”

서강일은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전했다. 하지만 민우는 그저 웃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강일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대체 뭐야? 감투 하나 받더니 이렇게 멋대로 날뛰고 말이지. 국문과 인원 충원이라면 그쪽 학과장 선생님 통해서 진행해야지 이렇게 독단으로 나서도 되는 거냐?”

“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 총장님께서 특권을 주셨거든.”

“무슨 특권?”

“내가 추천하는 사람은 형식적으로 면접만 보고 바로 임용하시기로. 내가 이야기 안 했던가?”

“뭐?”

깜짝 놀랄 만한 한마디였다. 민우가 변한 모습도 어색한데, 그 냉철하기로 소문난 서지훈 총장이 그런 말을 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럼 네가 뽑는 사람들은 모조리 정교수가 된다는 말이야?”

“당연하지. 명인대 교무처장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장난은 이쯤 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서강일을 설득하는 거니까.

“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게 있는데, 서지훈 선생님 후임은 전임이 아니라 시간강사로 데려올 생각이야.”

“시간강사?”

서강일의 표정이 불쾌해졌다.

“그럼 나를 시간강사로 데려간다는 거야? 초빙교수도 아니고?”

“우리 대학 초빙교수는 그나마 대우가 좋은 편이거든.”

“무슨 소리야? 대우가 좋으면…….”

“대우가 좋기 때문에 너를 초빙교수로 데려올 생각은 없다 이거지.”

민우는 서지훈 총장의 충고를 떠올렸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주변에 얼마든지 조언을 구하라고. 그래서 서강일을 찾아온 것이다.

한편 서강일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화를 내기 전에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교무처장직을 수락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제일 먼저 시간강사 처우에 관한 규정을 뜯어고치고 싶었기 때문이야. 알지?”

“그럼 바로 뜯어고치면 되는데 뭐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급여나 보험, 퇴직금…… 이런 문제야 내가 서류만 보고도 처리할 수 있지. 하지만 나는 더 큰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볼 수 없는 부분에 있는 것들. 직접 부딪쳐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그제야 서강일은 민우가 이렇게 서론을 길게 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를 시간강사로 꽂아 넣고 그걸 파악하려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를 꽂을 수는 없잖아. 이제 석사과정인 애를 강사로 쓸 순 없으니. 거기에 진섭이도 국제어학원 소속이고. 믿을 사람은 너뿐이지.”

“하아. 진짜 어마어마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만…….”

등줄기로 소름이 뻗어나가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민우가 색다르게 보였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 같은 그였는데, 이제는 망망대해의 꿈틀거리는 파도와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재수 없게 들려도 어쩔 수 없는데, 나처럼 명망이 높은 사람들은 솔직한 이야기를 듣기가 힘들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거든. 뭔가 일이 생기면 속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참는 편이지. 대학은 그게 굉장히 심한 편이야.”

민우는 부드럽게 말하면서도, 서강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강일은 그 눈빛에서 압도당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걸 경계하는 거야. 그래서 친한 친구이자 동료가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이렇게 찾아와 부탁을 하는 거고.”

“너는 참…….”

한숨을 내쉰 서강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무리하는지는 잘 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학계와 후학을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자신도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서강일이 물었다.

“채용 공고는 언제쯤 올라가냐?”

“빠르면 다음 주?”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가만있을 순 없지. 초빙교수 자리도 아니고 시간강사 자리인데 설마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진 않겠지? 그럼 쪽팔린데.”

민우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하지 말고 이력서나 준비해 줘.”

“알았다. 그런데 너.”

돌아서려던 민우가 멈칫했다. 서강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공방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제 굵직한 일도 끝났는데 휴머니티에 신경 좀 쓰지? 요즘 박민우 교수님이 안 보인다는 말이 계속 들려오던데.”

“아아, 그건 걱정하지 마. 조만간 뺀질나게 드나들 테니.”

민우는 손을 슥 들어 보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 * *

다시 명인대로 차를 돌린 민우는, 이수빈과 친구들이 자리를 잡은 식당으로 향했다. 굉장히 비싸기로 유명한 소고깃집이었다.

민우가 합석하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누가 쏘길래 여기에 왔어?”

“제가요.”

“당신이?”

이수빈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벽에 걸린 메뉴판을 빤히 바라보던 민우는, 오늘은 좀 적게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우가 반색하며 주예린을 바라보았다.

“축하한다. 주예린.”

“감사요!”

오늘의 주인공, 주예린은 무척 신나 보였다.

단순히 신났다고 하기에는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기대감뿐만 아니라 묘한 불안감까지 섞여 있었다.

이미 민우는 한차례 겪은 일이라 주예린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걱정되지?”

“아, 넵…….”

“나도 그랬어. 막연히 언젠간 아빠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윤아가 생겼으니까.”

민우는 옆에 앉아 있던 이수빈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래도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잖아? 특히 넌 작가니까 경험이 재산이잖냐.”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고…… 그냥 그래요.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더라고.”

“왜요?”

“아이가 태어나고, 잠도 못 자면서 키우다 보면 어느새 쑥쑥 자라 있어.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속 편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지. 차라리 그럴 시간이 있다면 아이랑 놀아주는 게 훨씬 나을걸?”

멍하니 민우를 바라보던 주예린이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러니까, 그냥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건가요?”

“최선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하면 돼. 애 키우는 건 일이 아니잖아?”

“우와…… 이것이 애 딸린 유부남의 위엄인 것인가!”

주예린이 감탄했다. 민우는 피식 웃으며 고기를 뒤집었다.

“나는 박사 논문 심사받느라 하마터면 윤아 태어나는 것도 못 볼 뻔했어. 서지훈 선생님이 배려해 주시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나쁜 아빠가 됐겠지. 그런 후회는 남기지 말라고.”

“넵!”

“그러고 보면 좀 이상해요.”

이번엔 이수빈이 끼어들었다. 무슨 말이냐는 듯, 나머지 셋이 이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배려해 준 건 서지훈 선생님인데…… 선생님은 아이도 없으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건가요?”

“아이가 없긴 뭐가 없어? 여기에만 네 명이 있는데.”

“아. 그런가?”

“아주 말 안 듣는 악동 같은 자식들만 모여 있구만.”

한진섭이 한마디 거들었다. 넷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이름은 정한 거야?”

민우가 물었고, 한진섭이 답했다.

“예진이.”

“너무 딸 이름이지 않아?”

이수빈도 고개를 끄덕거렸고, 주예린이 말했다.

“이름을 한 글자씩 따다 보니까 그나마 정상적인 이름이 저렇게 나오더라구요.”

“진섭, 예린…… 하긴. 나머지는 좀 조합이 이상하긴 하네.”

“아들이면 다른 이름 생각해 봐야죠.”

“아들이든 딸이든 우리 윤아한테 귀여운 동생이 생기는 거니까 좋은 거 아닌가?”

한진섭의 한마디에 민우가 움찔했다. 한진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본인들만 좋다면 나중에 사돈을 맺어도 좋다고 한 사람인데 갑자기 움찔하는 게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래? 기름이라도 튀었어?”

“그게…… 동생은 당분간 금기어거든요.”

이수빈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대신 말했다.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달은 한진섭과 주예린은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고! 우리 박 선생. 순 허당이구만! 우하하하하!”

“수빈이가 불쌍해. 힝.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소박을 맞다니…….”

점입가경이었다.

민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가 쥐고 있던 집게가 뚝 멈췄다.

덕분에 한진섭과 주예린은 웃음을 그치고 얌전히 바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명인대 교무처장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교수 연봉 책정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에.

민우가 엄숙히 말했다.

“고기 다 익었다. 먹자.”

“넵.”

양처럼 얌전해진 세 사람이 고기를 한 점씩 집었다.

교무처의 능구렁이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교무처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민우는 아침 일찍 교무처장실로 출근했다. 어제 미처 자료를 챙기고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못 보던 사람이 황급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처장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교무과장 변호영입니다.”

“아! 과장님. 반갑습니다.”

50줄에 들어선,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사내였다. 고분고분한 느낌이었는데, 민우는 방심하지 않았다. 으레 이런 사람들이 능구렁이 같은 법이니까.

대학본부의 과장이면 교수를 제외한 일반 교직원이 올라갈 수 있는 거의 최고의 자리다.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것이 그리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사건 사고를 거쳐 왔겠지.

민우는 기꺼이 손을 내밀어 변호영과 악수를 했다.

“어제 외근 나가신 것 같더라고요. 오시면 인사 좀 드리려고 했는데,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일찍 나갔습니다.”

“아뇨. 아닙니다! 제가 자리를 지켰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보통 처장님들은 임기 첫날에 잘 안 나오셔서, 밖에서 일 좀 처리하고 오느라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변호영 과장은 연신 굽실거리며 사과했다. 오히려 민우는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그래요? 전 그것도 모르고 첫날부터 나왔네요. 그런데 지금까지 처장님을 몇 분이나 모셨습니까?”

“어…… 박 처장님까지 포함하면 아마 여섯 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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