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94화 (394/500)

금기어 (1)

전임교원 자료도 아니고 시간강사 관련 자료를 모조리 준비해 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창민 주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민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난처해하는 것은 단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좀 어려운 부탁일까요? 규정이나 다른 서류는 이미 나와 있을 테니 취합만 해주시면 될 텐데.”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좀 시간이 필요해서요.”

“교무처의 수업과에서 총괄하는 일 아닙니까? 이미 자료는 정리되어 있지 않나요?”

“시간강사 계약서는 저희가 보관하고 있지만, 이력서 같은 서류는 학과 조교실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취합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민우는 그저 변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책임자인 과장이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자료를 취합해 윗선에 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니.

“그렇군요. 그런 시간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빠짐없이 준비해 주세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뒤쪽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우와 이창민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김명현이 삐딱하게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허락도 없이 처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품에는 서류 꾸러미가 가득 들려 있었다.

순간 이창민 주임은 심장이 주저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교무처 사람이라면 민우와 김명현 실장이 서로 상극이라는 걸 누구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일촉즉발의 상황.

그저 신임 처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서서 이곳으로 안내한 것인데, 이런 결과가 도출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반면 민우는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김 실장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 임기를 시작하신다 들었습니다. 아마 업무에 필요한 자료가 있으실 것 같아서 찾아왔지요.”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신 것 같군요.”

비꼬는 게 아니었다. 민우는 진심으로 놀랐다. 김명현이라는 사람이 이 자리에 괜히 올라온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과, 업무에 필요한 자료라는 말은 그가 들고 온 서류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짐작하게 해주었다.

김명현이 답했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가는 길이 좀 다를 뿐이죠.”

“그건 또 신선한 해석이네요.”

“이 주임. 그렇게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이것 좀 받지?”

“아, 예.”

이창민 주임이 서류 뭉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눈을 큼지막이 떴다.

무게가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민우가 원하던 시간강사 관련 서류였다.

중간에 낀 이창민 주임만 난처해지는 상황이었다.

그가 서류 뭉텅이를 든 채 얼어붙었다.

“저, 처장님…….”

“괜찮으니 가져와 봐요.”

민우가 손을 까딱거리자, 이창민 주임이 서류를 조심스레 책상에 올려두었다. 민우는 손을 뻗어 검토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민우가 피식 웃었다.

“이야, 이건 정말 의외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 실장님이 이런 자료를 직접 준비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강사 처우 개선이야말로 박 처장께서 심혈을 기울이던 것이 아닙니까? 당연히 필요하실 거라 생각했지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이게 순순히 제 앞에 놓인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민우가 서류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김명현도 물러섬이 없었다.

“처장께서 필요한 자료를 가져왔는데 무슨 해석이 필요하겠습니까? 교육개발실장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그냥 자료를 넘기려고 오신 것 같지는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시간강사의 처우 문제는 김 실장께서도 관심을 갖던 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김명현은 전임 총장인 백성웅 총장의 오른팔로서, 대학을 효율적으로 경영하는 것에 의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효율적인 경영이란 최소한의 자본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을 말한다.

즉 지금까지 명인대는 시간강사들의 대우와 복지를 대폭 축소시키는 것으로 효율을 끌어올렸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경력을 쌓아야 하는 시간강사들의 약점을 틀어쥐고서.

“정권이 바뀌었는데 본인의 과오를 이렇게 직접 들고 오실 줄은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을 끊은 민우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이창민 주임을 향해 손을 홰홰 저었다. 이만 나가보라는 의미였다.

꾸벅 인사한 이창민 주임이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처장실에는 민우와 김명현만이 남았다.

“과오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명현이 물었고,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어휘력이 좀 부족해서 말이죠. 다른 적당한 표현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기꺼이 듣겠습니다.”

“업적은 어떻습니까?”

태연하게 제안하는 김명현. 민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하하하! 업적이라…… 늘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부럽습니다. 정말로요.”

그렇게 대꾸한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김명현과 마주 보는 자리에 멈춰 섰다.

“안타깝지만 다른 사람의 약점을 쥐고 불행하게 만들어 얻은 성과는 업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좀 편하자고 다른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김명현의 어깨를 다독인 민우가 돌아서 처장실을 나섰다.

* * *

“주 선생 이야기 들었어요?”

연구실로 돌아오니 이수빈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채우고 있던 커피잔을 민우에게 건네고, 본인은 다른 컵을 쥐었다.

“들었지. 진섭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더라고.”

“주 선생도 좋아하더라고요. 왠지 옛날 생각나고 나도 좋더라. 오늘 저녁 다 같이 먹는 거죠?”

“그래야지.”

한숨을 내쉰 민우는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 하루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이대로 엎드려 한숨 자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몸이 힘든 것보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전폭적으로 지지해줄 줄 알았던 서지훈 교수가 묘하게 밀당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김명현은 떳떳하게 자료까지 챙기고 왔다.

‘선생님이야 큰일을 하시니 그렇다 쳐도…… 김 실장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과오가 아니라 업적이라고?’

얼마 전 비가 많이 오던 날이 생각났다.

김명현은 불쑥 찾아와 자신의 형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뭔가 잘 풀렸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김명현은 여전히 날카롭게 벼려낸 무기 같았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었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인드로는 일을 할 수가 없겠는데.’

학생들을 가르치고 논문을 쓰고 학회에 참석해 발표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명인대 교무처장이라는 직급은, 아직 민우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마음 독하게 먹어야겠다. 선생님이 권한 이야기까지 하시면서 기회를 주셨는데 내가 물러터지면 곤란하지.’

민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오래도록 함께 지낸 이수빈이 그 기색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가 머리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엄청 진지해 보이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가 아닌데?”

이수빈이 옆으로 다가와 민우의 어깨를 주물렀다. 안엔 둘밖에 없어서, 애정표현을 하는 것엔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수빈이 뭔가를 깨달았다.

“혹시…….”

“혹시?”

“주 선생 이야기해서 부담 갖는 건 아니죠?”

그녀는 부끄러운지 조심조심 물었다. 하지만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진짜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모른 척을 하는 거예요?”

“진짜 몰라서 그래.”

“전에 이야기한 적 있잖아요. 윤아 동생 만들어 주자고. 그래서 그 뭐냐, 그걸 부담스러워하는 거 아니냐고.”

“…….”

민우의 표정이 더욱 피곤해졌다.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린 사람처럼. 덕분에 이수빈이 오해라며 손을 격하게 내저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녜요! 그냥 친구로서 축하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라구!”

“완전 헛다리 짚은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그럼 다행이고.”

“오늘 좀 일이 있었거든. 그래서 좀 피곤해. 정신적으로.”

“안 좋은 일이에요?”

“좋은 일이었다면 적어도 정신적으로 피곤하진 않겠지.”

이미 표정을 읽힌 상황에서 말해주지 않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민우는 총장실과 처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평소에는 맞장구를 잘 쳐주던 이수빈이었는데, 오늘은 좀 조심스러웠다.

“음…… 권한을 주신 건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책임도 늘어나겠네요. 힘들어 보이는 이유가 있었네.”

“그런데 둘째 이야기나 꺼내는 철없는 부인을 옆에 뒀으니 오죽하겠어?”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누가 들어? 우리 둘밖에 없는데.”

“아무튼!”

이수빈이 버럭했지만, 민우의 엄한 표정을 보고는 스스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내가 보기엔 서지훈 선생님이 좋은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김명현 그 사람을 이렇게 오냐오냐해주는 것도 결국은 오빠를 위해서가 아닐까…….”

“나도 그 정도는 압니다. 그냥 투정 부리는 거지 뭐.”

“실컷 부려요! 오늘만큼은 내가 다 받아줄 테니까.”

이수빈이 팔을 휘저으며 관심을 끌었지만, 민우는 금방 다른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이수빈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민우의 눈이 반짝였다.

“국문과에서 교수 충원 계획이 있었나?”

이수빈의 고개가 다시 민우 쪽으로 돌아갔다.

“글쎄요? 설예라 선생님께서는 별다른 말씀 없으셨는데. 오히려 오빠가 잘 알지 않아요? 어제까진 서지훈 선생님이 학과장이었잖아요.”

“없었으니까 물어본 거지.”

“서지훈 선생님이 임기 동안은 강의를 못 하시니까, 못해도 그 자리는 채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그래야지.”

머리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 있던 이수빈도 따라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요?”

“휴머니티에. 우리 잘난 학장님 좀 만나고 와야겠어.”

“아!”

그 저의를 파악한 이수빈이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 잘하고 와요. 너무 늦지 말고. 오늘 주 선생네랑 밥 먹는 것도 잊지 말고.”

“식당 잡히면 톡 줘.”

두 사람은 함께 연구실을 나섰다.

* * *

휴머니티에 도착한 민우는 바로 교수 연구실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서강일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학기가 끝난 데다가, 공식적으로 서강일은 더 이상 한일대에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초빙교수 계약이 종료된 것이다.

이대로라면 2학기에는 외부 출강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

“강의 자리 알아보고 있는 거야?”

“깜짝이야. 언제 왔어?”

“지금.”

서강일은 잠시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그는 뭔가를 유심히 읽고 있었다.

계약이 종료된 비전임 교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겐 ‘구직 시즌’이었다.

“이력서 내려고? 하긴, 너 정도면 오라는 데 많을 거 같은데.”

“오라는 데 많으면 뭐 하냐? 비전임이야 어딜 가든 마찬가진데. 그리고 이력서 내려는 거 아냐. 다른 거 보고 있었다.”

“뭔데?”

“우리도 2학기 강의 계획 세워야지? 초안 만들고 있었다.”

“아아.”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그만큼 신경을 쓰지 못한 거다. 그 모습을 보던 서강일이 비웃었다.

“아주 그냥 날 자리 못 잡아서 안달 난 사람으로 보고 있구만?”

“그럴 리가요. 요즘 학장님의 몸값이 치솟고 있어서 조심스레 드려본 말씀이지.”

“돌려 말하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오늘 임기 시작한 녀석이 연락도 없이 찾아온 건 다 이유가 있겠지.”

의자를 돌려 앉은 서강일이 삐딱한 자세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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