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93화 (393/500)

취임, 그리고 (2)

그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그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봐야 할 서류 잔뜩 준비해 놨는데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있어. 여기저기서 뭔 전화가 이렇게 많이 오는지 원. 따로 메모를 안 해 놓으면 이름도 기억 못 할 지경이다.”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으니 당선사례는 제대로 하셔야죠.”

“네 말이 맞다. 반성해야지.”

“그래도 기분은 좋아 보이시는데요?”

그제야 서지훈 총장이 픽 웃었다.

“너도 내 나이 되면 알겠지만 말이야. 이 나이 때엔 뭔가 새로운 일을 하기 힘들거든. 끽해봐야 낚시 가거나 등산 가는 게 전부지. 그마저도 마음 맞는 사람 없으면 어려운 거고.”

“새로운 놀이터가 생겼네요. 선생님만 들어갈 수 있는 아주 크고 좋은 놀이터요.”

“지옥인지 놀이터인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

아직 게임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호의적인 시선을 보일 테지만,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다 보면 분쟁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민우는 얼마 전 서지훈 총장이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총장 자리가 지닌 무게에 대해서.

그때 비서가 차를 내왔다. 얼음이 담긴 시원한 녹차였다. 잔을 든 민우가 감탄했다.

“이야, 역시 선생님 포지션이 바뀌니까 컵에 얼음도 담아 나오네요? 좋네.”

“부러우면 너도 총장하든가.”

서론이 끝나고, 녹차로 목을 축인 서지훈 총장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도 이제 교무처장 임기 시작했으니 슬슬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

“안 그래도 오늘 교무과에 가볼 생각입니다. 직원들하고 인사도 좀 하고 업무도 파악하려고요.”

“정보는 좀 있고?”

“특별히 없습니다. 교무과가 어떤 일을 하는지만 숙지하고 있어요.”

서지훈 총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민우를 조용히 응시하며 말했다.

“교무과, 정확히 말하면 교무처지. 교무 행정과 관련된 여러 유닛이 합쳐 있는 곳이다. 직원은 모두 22명. 업무분장은 네가 출근하면 책상에 놓여 있을 테니 확인해 보면 될 거고.”

“직원이 22명이면 상당히 많은 편이네요.”

“우리 대학 내에서 가장 파워가 센 곳이니까. 업무량도 많고 잡음도 많지. 학적이나 수업분과도 있으니 학생들하고도 얽힐 문제도 있고.”

“아무래도 교원 인사를 하는 곳이니 청탁도 많이 들어오겠죠?”

서지훈 총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탁’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한마디로 능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어도 어려운 판인데, 행정 실무 경험이 전무한 민우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지훈 총장은 그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고 민우에게 드러내었다.

“요즘 시국이 시국이라 옛날처럼 뒷돈 찔러주며 임용 청탁하기는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대부분의, 아니 모든 과에서 교수를 충원해달라 목소리를 높일 거고, 너는 그게 합당한지 판단해야 하는 입장에 선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니 피부에 확 와닿네요.”

“지금까지 대학본부에서 어떻게 해 왔는지는 너도 알지?”

민우는 그렇다고 답했다.

“충원 공고를 올리고 실제로 뽑지 않았잖아요. 어차피 2차까지 통과한다고 해도, 총장 면접에서 떨어트리면 그만이니까. 그렇다면 충원 요청을 올린 과에서도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죠. 어쨌든 충원 과정은 이행한 셈이니까요.”

“그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편법이지. 실제로 모든 대학에서 그렇게 하고 있기도 하고.”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자연스러운 질문이지만, 서지훈 총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

민우는 입을 다물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민우가 질문했다.

“교수 임용권은 총장에게 있다, 이게 명인대 학칙이잖습니까.”

“나도 알아. 사립학교라면 학교의 장이 최종 승인을 하게 되어 있지.”

“설마 바꾸시려고요?”

서지훈 총장이 피식 웃었다.

“바꾸는 건 너무 과격하지 않겠어? 또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야. 결국 학칙을 바꾼다는 건 이사회의 의결이 필요한 거니까. 총장선거법까지 바꾼 마당에 이것저것 다 뜯어고치면 기존 구성원들의 불안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야. 선생님께서 엄살을 부리시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쓰셨잖아요?”

서지훈 총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무서워서 그런 걸로 보이냐?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게 하는 것도 지도자의 덕망이니까 그렇지.”

“그럼 어떻게 하시게요?”

“간단하지 뭐. 교무처장의 승인을 받은 임용 건이라면, 내가 따로 검토하지 않고 바로 도장을 찍어줄 생각이다. 면접은 형식적으로만 보고 말이야.”

“예?”

민우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만큼 서지훈 교수의 제안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교수임용권을 교무처장에게 일부 양도하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으니까.

“왜, 겁나냐? 후폭풍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전쟁으로 비유하면, 자신이 선봉에 서서 부대의 사기를 책임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전투의 양상에 따라 상이나 벌을 받게 된다. 어중간히 끝나는 건 없다. 이기거나 패배하거나. 둘 중 하나다. 무척 위험한 자리인 셈이다.

하지만 민우는 그런 걱정은 쉽게 날려버릴 수 있었다.

애초에 서지훈 총장을 도와 대학을 개혁하려고 할 때부터 그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으니까.

민우가 물었다.

“그것보다……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엄한 사람 추천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

서지훈 총장이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그것은, 대화의 페이스가 완전히 자신의 것일 때 하는 그만의 버릇이기도 했다.

“실수한 것에 대해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 사람에게 믿음만 주는 게 아니라, 권한도 같이 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너도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으려고 나 도와준 거 아니지 않나? 그럼 권한을 갖고 뭐라도 해야지.”

“그건 그래요. 그래도…….”

“그렇다고 네가 네 주변 사람들로만 채울 거 아니잖아. 그러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도 많을 거고. 딴생각하지 말고 일단 한번 해봐. 너에게 미래를 건 후학들이 한둘이 아니잖냐? 그런 사람이라면 중심을 잘 잡아야지.”

“음, 알겠습니다.”

서지훈 총장이 몸을 가까이 내밀었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한마디 꺼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김명현 실장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설마 여기에서 김명현의 이름이 거론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그럴 기미가 있긴 했다.

전에 서지훈 총장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는 김명현을 ‘안티테제’로 명명하며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으니까.

“김 실장 연임시킬 생각입니까?”

“딱히 내칠 명분이 없는데? 백성웅 총장의 최측근이라고 해도, 그가 대학에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았어. 오히려 기발한 프로젝트를 연이어 성공시켰지.”

민우는 서지훈 총장의 속내를 읽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서지훈 총장이 갑작스레 변한 건 아니고, 오히려 그에게 어떤 계획이 있음을.

어떤 계획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서 지금까지 손해 본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저 그 말을 따라가 볼 뿐이다.

거인의 어깨를 짚고 세상을 내다보는 것은 으레 그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김 실장에게 도움을 청해 볼게요. 필요하다면.”

“오, 생각보다 반발이 적은데?”

“까라면 까야죠. 일개 교수인 제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하긴. 김태현 씨에게 상을 준 마당에 누굴 용서 못 할까?”

서지훈 총장이 핵심을 짚었다. 민우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순진한 제자의 모습을 보곤 서지훈 총장은 껄껄 웃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아무래도 강사 처우에 대한 문제겠지?”

“예.”

고개를 끄덕거린 서지훈 총장이 진지하게 충고했다.

“지금까지는 그 문제를 멀리서 지켜봐 왔을 거야. 제삼자의 입장에서 말이지. 어쨌든 넌 시간강사가 아니라 정교수잖아? 그것도 정년 보장을 받은.”

“그렇죠.”

“하지만 이제는 온전히 네 일이 되었다. 그만큼 너와 문제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걸 뜻하지. 이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가까워졌기 때문에 오히려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어질 수 있다는 거야.”

“어떤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사소한 거라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할게요.”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으니, 그럴 때는 동료들과 의논하면서 하도록 해.”

“예.”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서지훈 총장은 나가보라 손짓했고, 민우는 일어나 꾸벅 인사하고는 총장실을 나섰다.

그 와중에 민우는 방금 서지훈 총장과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오히려 가까워졌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들.’

민우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우웅, 하며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 너무 감정 이입하지 말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따져보자. 이제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움직일 때야.’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민우는 성큼 한 발을 내디뎠다.

* * *

총장실에서 내려온 민우는 바로 교무과에 들렀다.

연구실에 먼저 간 다음 생각을 정리할까 싶었지만, 일단 직접 부딪쳐 보기로 했다.

민우가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들이 모두 기립했다.

몇 명을 제외하고 모든 직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처장님.”

“다들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시니 다행입니다. 낙하산이라 걱정하고 있었는데.”

“……예에?”

깜짝 놀란 직원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민우는 이곳이 지음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괜히 농담했나? 수직관계가 생각보다 명확한 곳인 듯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처장실 구경하러 왔는데, 안내 좀 해주시겠어요?”

“아, 예. 이쪽으로 오시죠!”

보통 대학 부서엔 처장실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곳 교무과에도 처장실이 교무과 안과 밖에서 각각 연결되어 있었다.

“밖에서도 바로 처장실로 들어올 수 있는 건가요?”

“지금은 잠가두었습니다.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교무처 사무실과 연결된 출입문만 열어두었습니다.”

“그렇군요.”

말이 효율적인 관리지, 직원들도 처장이 누굴 만나는지 체크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처장실은 상당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들여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화분도 있었고, 고급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도 있었다. 전임 처장의 취향이 반영되었는지 꽤 올드했다.

민우는 자리에 앉았다. 푹신한 쿠션이 허리를 감싸 무척 편했다.

그러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민우가 자세를 바로 했다.

“아, 미안합니다. 이렇게 편한 의자를 써본 적이 없어서. 생각해 보니 성함도 안 여쭤봤네요.”

“괜찮습니다. 처장님. 저는 이창민입니다.”

“직급이?”

“주임입니다. 교수업적평가와 전임교원 채용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어째 젊어 보였는데 책임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질문이 이어지자 이창민 주임이 긴장했다.

“과장님은 외근 나가셨습니까?”

“오늘 외부 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웠습니다. 연락해 볼까요?”

“아뇨. 그럴 필요까진 없고, 좀 봤으면 하는 자료가 있어서.”

“말씀하시면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시간강사 관련 서류를 좀 갖다 주시겠어요? 계약서는 물론이고 관련 규정까지 전부 다.”

“전부 다…… 말씀입니까?”

“네!”

민우는 쾌활하게 대답하며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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