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92화 (392/500)

취임, 그리고 (1)

어젯밤까지 몰아치던 비바람이 그치고, 오늘은 해가 쨍쨍했다.

마치 하늘도 서지훈 교수의 총장 취임을 축하하는 듯했다.

오늘은 명인대학교 총장 취임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음. 그렇군요. 학생의 생각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30분 정도 시간 괜찮은데 잠시 연구실에 들르겠어요? 답안지 같이 보면서 이야기 나누죠. 예. 괜찮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할 말을 모두 마친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서지훈 교수의 최측근이자 교무처장으로 발령된 그는 오늘 행사를 진두지휘해야 했지만, 아직 성적 정정 기간이 끝나지 않은 터라 연구실에 붙들려 있었다.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기말고사인 만큼 시험을 잘 치지 못한 학생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점수를 줬다. 그런데 점수에 이의를 제기한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학생들을 설득하는 것은 강의실에서 수업하는 것보다 배는 힘들다.

‘이걸로 다섯 명째인가? 내 업보지 뭐. 시험문제를 그렇게 내버렸으니 학생들이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지난 한 학기 동안 직면했던 여러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젊은 만큼, 그리고 가치관이 다양한 만큼 재미있는 의견을 많이 적어 냈다.

그래서 민우는 조금 더 유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김명현 씨를 이해하려고 이러는 건 아니지만…….’

인문학과 자본의 논리, 그리고 그사이에 끼이듯이 놓인 교육에 대한 문제를 나름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명쾌한 해답을 얻진 못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어떤 일을 하게 된다면, 좀 더 유연해진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은 큰 성과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민우는 전화를 걸어온 학생이 연구실로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전화했던 학생이 아니라 한진섭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하긴, 학생이 노크도 없이 문을 열 리가 없지.

“이봐요. 교무처장 나으리. 식장에 안 가심까? 이제 취임식 한 시간밖에 안 남았다고.”

“괜히 내가 현장 휘젓고 다니면 다들 불편해할 거야. 시간 맞춰서 갈 테니 네가 먼저 가 있던가.”

“또 뭐 때문에 여기서 짱박혀 있는데?”

민우는 대답 대신 시험답안지를 슥 들어 보였다. 한진섭이 혀를 내둘렀다.

“어휴, 독한 놈! 진짜 강의 평가가 사람 하나 배렸다니까.”

“알면 좀 도와주던지.”

“싫은데? 억울하면 국제어학원 강의 뛰십쇼!”

국제어학원 시험은 대부분 객관식으로 출제되고, 단답형 서술 문제는 조교들이 채점하기 때문에 한진섭은 다른 동료들에 비해 널널한 편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그가 소파를 차지하고 앉았다.

“곧 학생 올 거야.”

“알아서 비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셔.”

문득 민우는 한진섭이 시비나 걸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답안지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진섭이 헛기침을 했다.

혹시 그도 보직을 받은 걸까?

“6주째란다.”

“6주?”

잠시 멍해 있던 민우가 반색했다. 얼마 전, 서지훈 교수의 개표방송을 보면서 먹었던 떡볶이 생각이 난 것이다.

그때 주예린이 요즘 매콤한 게 당긴다는 말을 했었다.

거기에 6주째라면 의미하는 건 하나밖에 없다.

“이야! 축하한다 한진섭! 한다면 하는구만! 드디어 아빠가 되는 거야?”

“하핫. 어째 요즘 와이프 떡볶이 타령만 해서 혹시나 했는데 그렇게 됐네.”

“그렇게 됐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기쁜 일이잖아.”

한진섭은 손으로 코를 슥슥 문지르며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그냥. 뭔가 어색해서 말이지. 애가 잘 안 생겨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덜컥 생기니 얼떨떨하기도 하고.”

“주 선생 반응은 어떤데?”

“생각보다 좋아해. 애들 안 좋아해서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막상 생기니까 좋은가 봐.”

“주예린이 엄마가 된다니. 크. 이거 실감이 안 나는데?”

민우는 껄껄 웃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배라고 부르면서 졸졸 따라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엄마가 된단다. 옛날 생각을 쉬이 그칠 수가 없었다.

민우가 물었다.

“또 누구한테 이야기했어?”

“네가 처음이야. 이따가 와이프가 단톡방에 이야기할 거고.”

“왜 본인이 안 오고 남편을 보냈대?”

“선배는 부끄럽다나 뭐라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털털하지만 내심 여린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문득 주예린의 작품세계가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경험이니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작가는 경험하지 않으면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없다.

그간 주예린의 작품세계에서 약점으로 취급되었던 모성애와 어린아이에 대한 감정선은 이로써 극복될 것 같다.

“그럼 한번 모여야겠구만.”

“말도 마. 떡볶이 파티한다고 벌써 각 재고 있다.”

“싸게 먹히는 거니까 좋은 거 아냐?”

“이쯤 되면 떡볶이 가게 인수한다고 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이지.”

“가능성 있지. 충분히.”

서로 낄낄거리며 웃고 있을 때, 노크가 들리더니 아까 전화한 학생이 안으로 들어왔다. 약속대로 한진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세한 이야기는 취임식 끝나고 하자고.”

“시간 비워 놔. 저녁 같이 먹게. 이 선생한테는 내가 이야기할 테니까.”

“오케이!”

한진섭이 재빨리 연구실을 비워주었다. 그가 보직을 받는 것보다 훨씬 기쁜 소식이었다. 웃으며 한숨 돌린 민우는 일어나 학생을 맞았다.

* * *

명인대학교 총장 취임식은 아주 조촐하게 열렸다.

흔히 볼 수 있는 화환이나 장식은 하나도 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 만큼, 최대한 간소하게 하자는 신임 총장의 뜻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지금 근사한 학위 가운을 걸친 채 연단에 오르고 있다.

서지훈 교수가 입은 것은 명인대 박사들만 입을 수 있는 가운이었다. 학위수여식 때나 볼 수 있는 장면인데, 이렇게 보니 새로웠다.

앞쪽으로 명인대 재단 이사들과 귀빈들이 자리를 채웠다. 그 뒤로 서지훈 교수를 지지했던 동료와 학생들이 많이 찾아왔다.

거기에 언론사에서도 취재를 나왔다.

서지훈 교수와 백성웅 총장의 토론회가 생중계된 덕이다. 토론회 동영상은 클립영상으로 만들어져 백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대학 구성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관심을 이끌어야 한다는 민우와 참모진의 전략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대학 총장 취임식에 손님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모두가 서지훈 교수를 반가워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명인대에 찾아올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람들 진짜 많네. 무슨 대선 치른 느낌이지 않냐?”

옆에 있던 한진섭이 중얼거렸다.

“좋아하기만 할 일은 아니지. 그만큼 선생님이나 우리들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거야.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지는 거니까.”

“그럼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닌가?”

민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한진섭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 관종이니까 그런 거 좋아할 거 아냐.”

“하…… 내가 살다살다 한진섭에게 관종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나대는 거랑 관종은 엄연히 다르다고. 나는 관종까진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그때 연단으로 이태하 이사장이 올라 축사를 시작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힘차게 도약해야 하는 시기에 뛰어난 지도자를 만난 것은 대학 구성원들에게 큰 행운이자 기회라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뻔한 느낌의 축사였다.

이어 서지훈 교수의 소감이 시작되었다.

“존경하는 명인대 구성원 여러분.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먼저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서지훈 교수가 옆쪽으로 나와 청중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가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서지훈 교수는 다시 마이크를 잡고 담담히 발언을 이어갔다.

“총장 선거를 준비하며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다 보니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지요. 주제넘지만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 대학은 무엇입니까?”

공교롭게도 서지훈 교수의 시선은 민우를 향하다가, 방향을 바꿔 한쪽에 앉아 있는 김명현 쪽으로 돌아갔다.

마치 그들을 향해 묻듯, 서지훈 교수가 말을 이었다.

“학생이나 교수, 그리고 행정가들이 생각하는 대학의 의미는 각각 다를 겁니다. 취업의 도구냐, 학문의 요람이냐, 생계의 수단이냐. 요약하면 이런 문제가 되겠죠. 하지만 전 본질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조직이든 의사결정 과정이 합리적이며 공정하지 않으면 오래 존속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우리 대학이 비밀주의로 경영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여러분들께 약속드립니다.”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하지만 민우와 한진섭은 동시에 이태하 이사장을 주목했다.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이 장면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거 선전포고 아니냐?”

한진섭이 물었고, 민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까지 투명하지 않았다는 걸 꼬집는 거니까. 하여간 선생님 배짱이 장난 아니시네. 나라면 그런 말 못 하지. 그래도 이사장님 표정 관리는 잘하시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잖아. 재단 이사장 정도 되면 표정 관리 잘해야지.”

“연주는 안 그렇잖아?”

“아, 그러네.”

그러다 문득 뜻밖의 생각이 민우의 뇌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설마 하고 넘기기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민우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어쩌면…… 이게 진짜 이사장님이 원했던 그림인 건가?”

“무슨 헛소리야?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일 없을걸? 송충이는 뭐다? 솔잎을 먹어야 한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쯧쯧. 많이 피곤한가 보구만. 그러니까 시험문제는 좀 쉽게 내라. 학생들이 무슨 죄야?”

옆에서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축사가 끝날 때까지 이태하 이사장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취임식이 끝날 때까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도대체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 * *

총장 취임식이 끝나고, 민우는 홀로 총장실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 물리치고 혼자 오라는 서지훈 총장의 명령을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축하의 의미로 화분이라도 하나 사 들고 가고 싶지만, 이제는 이해관계가 분명해진 사이라 그러기가 어렵게 됐다.

“총장님 뵈러 왔습니다.”

“박민우 교수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비서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서지훈 교수는 통화하고 있었다.

다시 나갈까 했는데, 서지훈 교수가 손짓하더니 소파를 가리켰다.

민우는 한쪽에 앉아 그가 통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교수 연구실이 총장실로 바뀌었을 뿐인데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백성웅 총장이 있을 때와는 실제로 많이 달라지기도 했다.

서지훈 총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불필요한 장식품을 모두 치우는 것이었다. 값비싼 도자기는 물론, 고급스러운 화분까지 싹 치웠다.

그래서 총장실 내에는 간단한 집기와 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때마침 서지훈 총장의 전화가 끝났다.

“대체 몇 번째 오는 전화인지. 휴, 미안하다. 사람 불러다 놓고 기다리게 만들었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는 교수님이 아니라 총장님인데요.”

“비꼬는 거냐?”

“하하하. 설마요.”

서지훈 총장은 민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