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91화 (391/500)

보직 임명 (3)

1학기 마지막 기말고사일이 다가왔다.

시험문제와 답안지를 모두 준비한 민우는 강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종료된 강의도 많기 때문에, 인문관 안을 돌아다니는 학생들의 수는 부쩍 줄어 있다.

이제는 반팔을 입지 않으면 땀이 새어 나올 정도로 날씨가 더워졌다.

산으로, 혹은 바다로 떠나 잠시간의 여유를 즐기기에 좋은 날씨였다.

‘이제 총장 선거도 끝났고…… 문학상 준비도 다 끝났으니 어디 멀리 휴가나 가볼까?’

조만간 열릴 2차 이사회 결과와 상관없이 민우는 이번 학기 임무를 모두 완수했다.

자평하기에 나쁘지 않은 학기를 보낸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야. 서지훈 선생님이 총장으로 선임된다면 같이 해야 할 일이 많아지니까.’

아득한 설렘을 느끼며, 민우는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이 저마다 교재와 인쇄물을 들여다보며 막판 스퍼트를 올리고 있었다. 시험 기간에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맨 뒤 구석, 늘 앉던 자리에 있는 이소윤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은 왔구나.’

민우는 강의실로 들어올 때 느꼈던 설렘이, 서지훈 교수를 도와 대학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이소윤을 포함한 이곳의 학생들이 어떤 성취를 거두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지 기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번엔 좀 다르게 가보는 게 좋으려나? 학생들에겐 미안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결정을 내린 민우는 강단에 서서 마이크를 쥐었다.

“다들 피곤해 보이네요. 공부는 많이들 했습니까?”

“아니요…….”

“시험 한 주만 미루면 안 됩니까?”

“과제로 대체하고 싶어요.”

각종 청원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야 서먹했던 학생들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이 강의실에 섰을 땐 이러지 않았었는데.

인연이란 문득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이 들 만하면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찾아오니까. 그래도 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 누구와 다음 학기에도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지 기대되기도 했다.

민우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시험을 미룬다고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은데요. 과제로 대체하는 건 오히려 더 괴로울지도 모르죠. 그냥 오늘 깔끔하게 시험 보고 다 끝냅시다.”

그렇게 말을 마친 민우는 커다란 봉투에서 답안지를 꺼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모든 학생들이 답안지를 받고 나서야, 민우는 시험문제가 적힌 종이를 손에 쥐고 칠판으로 돌아섰다. 그가 펜을 쥐었다.

이번 시험엔 딱 두 문제만 준비했다.

― 인간에게 있어 교육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서술하시오. (30점)

― 자본주의 시대에 있어 인문학의 위상을 진단하고 전망을 서술하시오. (40점)

민우가 펜을 내려놓았다.

“뭐지?”

“문제가 왜 저래?”

“아…….”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돌아선 민우는 벙찐 표정을 짓는 학생들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들이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당연하다.

지금 민우가 낸 시험문제는 교재엔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에도 깊게 다루지 않은 테마였다. 이번 강의 주제와 약간 어긋나 있는 문제였다.

“조금 당황스럽죠? 음, 여러분들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원래 내려던 시험문제는 이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칠판을 보던 학생들이 경악했다. 민우는 미리 준비한 이야기를 하나둘 꺼냈다.

“이번에 강의하면서, 그리고 한 학기를 보내며 많은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고, 생각해 볼 문제도 많았죠.”

민우의 시선이 이소윤을 향했다. 그녀는 이미 답안지에 무언가 쓰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소윤이 출석부에 정식으로 등록된 학생이었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순위가 모두 하나씩 밀렸을 거다.

“칠판에 적은 시험문제도 그런 문제 중 하나입니다. 답안지로 여러분들을 평가한다기보다는,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평소 본인의 생각을 솔직하게 적어주세요. 감정적이어도 상관없습니다. 필터링되지 않은 온전한 여러분들의 의견을 보고 싶습니다.”

“그럼 어떤 기준으로 채점이 되는 걸까요?”

“좋은 질문이네요.”

민우는 질문을 던진 학생을 바라보며 대답을 이었다.

“평소처럼 답안의 논리적 정합성을 따지지 않을 겁니다. 저에게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주느냐에 따라서 배점이 될 겁니다. 주관적이라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이번 시험을 통해 학점 그 이상의 것을 얻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그 말이 끝난 이후로 누구도 민우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학생들이 하나둘 답안지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은 답안지와 칠판에 적힌 문제를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시험 종료는 앞으로 60분 후. 답안지를 완성하신 분들은 미리 내고 나가셔도 됩니다.”

민우는 강단에 서서 그들의 답안을 완성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굳이 돌아다니면서 시험감독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컨닝을 할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간단히 답안을 작성하고 나가는 학생들도 몇 있었다. 그래도 민우는 끝까지 웃으며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청강 허락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선생님.”

이소윤이 답안지를 내곤 꾸벅 인사했다. 얼핏 보니 앞뒤로 빼곡하게 글자가 적혀 있었다. 어떤 내용으로 채워졌는지 기대되었다.

“수고했어요.”

“저, 피드백은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다음 주 월요일에 연구실로 오면 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이소윤은 청강생이라 학점을 확인할 수 없다. 중간고사 때도 그러했듯, 민우는 따로 채점해서 시험지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이소윤이 나가고 민우는 그녀가 남긴 답안을 확인했다.

답안지를 가득 채운 그녀의 생각을 읽을 때마다 민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인문학의 자본화를 경계해야 하지만, 그 자체가 시대의 주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다라…… 소설의 이론을 접목시켰구나. 누가 보면 문학도인 줄 알겠어.’

만족스러운 답안이었다. 민우는 이소윤의 답안지를 한쪽에 내려두었다.

곧 시험 종료 시각이 다가왔고, 마지막 수강생이 답안지를 제출하고 강의실을 나갔다.

텅 빈 강의실을 잠시 둘러본 민우는 학생들의 답안지를 바르게 정리한 뒤 그곳을 나섰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보람찼던 한 학기가 모두 끝났다.

‘아니지. 아직 채점이 남았으니까. 성적 입력도 해야 하고, 정정 신청도 받아야 하고…….’

아직 일이 남았다는 사실에 왜 웃음이 나올까.

그는 천생 교수였다.

* * *

2차 이사회가 끝나고, 서지훈 교수가 총장실로 불려갔다. 서지훈 교수는 담담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없는 그곳에 앉아 있는 건 이태하 이사장이었다.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이사장님.”

“이쪽으로 앉지.”

“예.”

서지훈 교수는 옷깃을 바로잡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태하 이사장은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여름인데도 그는 뜨거운 녹차를 고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찻잔에서 더 이상 김이 올라오지 않을 무렵, 이태하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사회가 열렸던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아, 그랬군요.”

“뭐야. 모르고 있었나?”

“방학이 시작되긴 했지만 한가해지려면 아직입니다. 이번에 대학원 강의도 맡아서 채점해야 하는 논문이 많습니다.”

이태하 이사장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정말 얄밉군그래.”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됐네. 자네가 비위나 맞추고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내가 이렇게 따로 부를 일도 없었겠지.”

서지훈 교수는 웃었다. 그 한마디로 이사회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태하 이사장은 육성으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자네를 신임 총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네. 취임을 준비하게나.”

민우를 비롯한 제자들과 동료들이 들으면 환호성을 지를 일이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그런 결론이 나올 줄 알고 있었거든요.”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알고 있었다고?”

“그럼요. 제가 아는 이태하 이사장님이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실 테니까 말이죠.”

패기 넘치는 한마디에 이태하 이사장이 웃었다.

“기회? 자네가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가?”

“저는 제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서지훈이가 총장 자리에 앉지 못한다면 명인대는 큰 별을 잃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신 거 아닙니까?”

“…….”

“제가 낙선하고, 비주류로 밀려난다면 박 선생이 청문대나 다른 대학으로 가버릴 가능성이 크겠죠. 박 선생이 자리를 옮긴다면 그 손실을 예측하기 어려울 겁니다. ‘최초’ 타이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인대에서는 더더욱 그러겠죠. 거기에 학생들까지 참여한 선거에서 1순위를 얻은 상황. 보수적인 대학 이사회에서 그 정도로 모험을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뚫어지라 서지훈 교수를 노려보던 이태하 이사장이 돌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히 판을 읽고 있었군그래.”

“그 정도는 제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설예라 선생만 해도 같은 생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자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다네.”

서지훈 교수가 그게 무엇이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자네나 설예라 선생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학이 변화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말이야.”

“그건 정말 의외인데요?”

“대학과 재단이 부패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오는 희망과 욕심이지.”

그럼 그렇지.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로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네를 총장에 선임한 거라네. 그러니 우리 대학을 위해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네.”

“최선을 다해야지요. 비옥한 농토를 만들 생각입니다. 다음 총장을 위해서.”

“다음 총장?”

“다 아시면서 뭘 물으십니까? 제가 총장직에 앉는 이상 많은 것들이 변할 겁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는 제 다음 대에서 완성되겠지요.”

그제야 총장은 서지훈 교수가 말하는 다음 총장이 누구인지 짐작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사람’이라면 대학의 간판으로 내세우기 모자람이 없으니까. 아마도 다음 대에 총장이 된다면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겠지.

거기까지 계산을 끝낸 이태하 이사장이 흥미롭게 웃었다.

“그렇다면 자네 임기 동안 아주 혹독히 가르쳐야겠는데.”

“이미 근사한 자리도 하나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사회에서 간섭만 하지 않으신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겠지요.”

“간섭은 무슨. 대학의 인사권은 총장인 자네에게 있는데.”

그 말을 남긴 이태하 이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입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벌써 가십니까?”

“이곳은 총장실이네. 새 주인이 왔는데 비켜줘야지.”

곧 문이 열리고 이태하 이사장이 밖으로 나갔다.

돌아선 서지훈 교수는 교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놓인 자리를 바라보았다. 어느 때보다도 그 자리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