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90화 (390/500)

보직 임명 (2)

1학기 종강을 앞두고, 민우는 연구실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후드드득!

밖에서는 여름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는 조금 열려있던 창문을 완전히 닫았다.

‘선거 결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지난 1차 이사회의 결과에 대해서는 민우도 전달받았다. 이태하 이사장이 모두발언에서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대학을 위해 일할 사람을 뽑아보자고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은 명인대 교양학부장인 원순철을 통해 전해졌으며, 서지훈 교수도 똑같이 전달받았다.

‘선생님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그렇게 무사태평이시니.’

한숨이 나왔다.

최종 결과는 2차 이사회에서 결정이 나겠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만약 서지훈 교수를 마음에 두고 있었더라면 그런 발언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결정을 다음 이사회로 미룰 필요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정하셨겠지.’

즉, 서지훈 교수가 1순위가 된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투표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 상황인데도 서지훈 교수는 그저 껄껄 웃으며 이사장의 발언을 흘려버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한진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념에서 깬 민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우리 이 선생 생각하고 있었지.”

“이야! 준비된 남자! 로맨티스트! 역시 박민우!”

한차례 너스레를 떤 한진섭은 마치 연구실의 주인인 양 냉장고를 털었다. 요즘은 날씨가 무척 더워져서 드립 커피보다 시원한 음료를 찾는 편이었다.

적당한 캔음료를 집은 한진섭이 소파에 앉았다.

“뭐가 그렇게 고민이야? 이제 교무처장도 되겠다. 아주 인생이 순탄하겠구만.”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어?”

“선생님이 직접 말씀하시더라고. 부담이 많이 될 테니 옆에서 도와주라나 뭐라나.”

민우는 피식 웃었다. 서지훈 교수도 은근 츤데레다. 뒤로는 이렇게 잘 챙겨주니까.

민우도 냉장고에서 캔음료를 꺼내 마주 앉았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걱정할 사람 걱정을 해야지 낭비가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프로페서인데. 알아서 잘하실 거라고 말씀드렸어.”

“그렇군.”

마침 차민재가 도서관에 가 있는 터라 두 사람은 좀 더 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진섭이 물었다.

“이 선생 반응은 어때?”

“뭐 좋아하지. 남편이 출세한다 어쩐다 하면서.”

“하긴, 교무처장이면 처장급 중에선 제일 핫하니까. 아주 어깨가 무거우시겠어.”

“너는 따로 말씀 없으셨냐?”

“나야 뭐 팬카페나 잘 관리해야지. 학부 교수도 아닌데 나댈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딱히 욕심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출세욕 부분에 한해서는 민우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민우도 학부 쪽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권유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선생님이 자리 권하면 받아. 국제어학원에서도 할 만한 보직이 많잖아. 우리가 도와드려야 선생님도 편하게 일하시지.”

“하이고! 완전 우리 엄마처럼 잔소리하네. 그 정도는 나도 아니까 걱정 끄십쇼. 그런데 이사회 쪽 소식은 더 없냐?”

“없어.”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좀 투명하게 할 수는 없나?”

“한 번에 다 바꿀 수 있으면 아무도 고생 안 해. 뭐든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듣기로는 이사장님이 백 총장 병문안 갔다고 하던데……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네.”

“수상한데.”

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총장 선임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거야?”

“선생님께 한번 이사장님 만나보라고 권해드렸는데, 그냥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있냐면서.”

“그런가.”

“천천히 기다려 보자.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나선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결과가 나온 이후에 대응하면 되지.”

“음.”

한진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노크가 들렸다. 민우가 들어오라고 말하니 문이 열렸다.

의외의 사람이 서 있었다.

“이거 내가 자리 비켜줘야 하는 부분인가?”

“나중에 이야기하자.”

한진섭이 알았다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뜻밖의 손님, 혹은 초대받지 않은 그 손님은 한진섭이 나가자 문을 닫았다.

김명현이 말했다.

“담소 나누시는데 제가 방해를 한 것 같군요.”

“아닙니다. 앉으시죠.”

민우는 태연히 그를 맞았다. 총장 선거가 끝났으니 언젠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오늘이 그날이었던 것 같다.

그는 권력과 야합해 자신의 교육철학을 관철시키려는 인물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총장이 될 가능성이 커진 서지훈 교수 측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축하드립니다. 선거에서 멋지게 승리하셨더군요.”

민우는 여유롭게 웃었다.

“제가 축하받을 일은 아니죠. 다 서지훈 선생님의 덕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박 교수님이 전면에서 활약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드린 말씀입니다. 다들 총동문회에서 하신 연설을 기억하더군요.”

“고맙습니다.”

민우는 쿨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가 들려오더군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모른 척 물었지만, 아마도 교무처장직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서지훈 교수가 어느 정도로 소문을 냈는지는 모른다. 김명현도 교내 정보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바로 귀에 들어갔을 거다.

교무처장은 교원 인사 등 교무에 관련된 모든 일을 총괄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명인대 교육개발실도 그 아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곳의 실장이 김명현이니, 민우가 상사가 되는 그림이 되는 것이다.

잠시 뜸을 들인 김명현이 입을 열었다.

“박민우 문학상 말이죠. 저희 형이 이번에 공로상을 받게 됐다고 하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문학상 시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주에 발표된다고 했는데, 사전에 연락이 먼저 간 모양이다.

“벌써 연락이 된 모양이네요.”

“예. 방금 형에게 전화가 오더군요. 이번에 상을 받게 됐다고.”

“축하드립니다.”

“제가 상을 받는 건 아니지만…… 조금 의외였습니다. 아무래도 형과 박 교수님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흥미로운 미소를 짓는 김명현 실장. 그 미소는 오묘했다. 마치 제삼자가 된 것처럼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문득 예전에 이다혜에게 들었던 한마디가 떠올랐다.

김명현 실장과 김태현 번역가 두 형제의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고.

민우가 대답했다.

“제가 혼자 결정하는 건 아니니까요. 심사위원회가 열렸고, 합당한 자격을 가진 분들이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의외일 것은 없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민우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대답을 이어갔다.

“저는 번역가로서 김태현이라는 분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와는 조금 인연이 좋지는 않은 편이지만, 그건 구분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부분이 의외라는 겁니다. 다른 상도 아니고 박 교수님의 이름이 걸린 상이 아닙니까?”

민우는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 상은 제 이름이 붙긴 했지만, 제정되는 순간 이미 제 것이 아니게 되었죠.”

“생각보다 멀리 내다보고 계신 것 같군요.”

“혹시 노벨상에 수학 분야가 없는 이유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알지요. 연적설도 있고, 불화설도 있고, 무관심설도 있지 않습니까. 알프레드 노벨이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수학자에게 상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수학상을 만들지 않았다는 게 호사가들이 밀고 있는 학설이죠. 정확히 밝혀진 건 없지만 말이죠.”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맥락입니다.”

김명현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만약 제가 김태현 씨에게 상을 주지 않는다면 문학상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쨌든 그분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업계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김명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말을 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태현 씨에게 상이 돌아간다면, 오히려 제 이름을 건 문학상의 가치는 그만큼 높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선례도 생기겠지요.”

“동감합니다.”

그래서 김명현이 멀리 내다본 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민우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을 때도, 좋은 선례가 남아 있어 누구나 공정하게 수상할 수 있게끔.

“이번만큼은 제가 확실히 진 느낌이네요. 감탄했습니다. 그 나이에 그런 안목을 갖출 수 있다는 게 대단하군요.”

“하하하. 이거 김 실장님께 칭찬을 들으니 좀 어색한데요?”

“비꼬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마십시오. 이번만큼은 진심이니까.”

민우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김태현 씨는 어떤가요? 수상 소식을 듣고 기뻐하시던가요?”

“글쎄요. 통화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형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통화를 했는지는 그리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더군요.”

“그렇군요.”

“아시겠지만 저도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박 교수님을 향한 분노가 애꿎은 저에게도 튀었으니 말이죠.”

조금은 민우를 탓하는 어조였다.

하지만 민우는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능력이 뛰어나서 문제라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사람이 못나서 그런 거야.

그런 생각은 민우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창 일을 할 때는 주변을 돌아볼 여건이 되지 않았거든요.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고요.”

“저에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확실한 건…… 이번 계기로 번역계에 훌륭한 미담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겠군요.”

“김 실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타깝지만 번역은 제 전공이 아니라서.”

김명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그가 선거 결과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화를 마친 지금, 김명현의 어깨에 걸려 있던 짐이 들어올 때보다 훨씬 가벼워 보였으니까.

사소한 곳, 혹은 뜻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이런 진척을 보이는 것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래서 경험에 끝이란 건 없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스튜디오에 계속 나가십니까?”

“가끔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시즌도 끝나가니 다음에 나가면 당분간 나갈 일은 없겠네요. 실장님은 요즘 안 나가시죠?”

“시즌 마지막 촬영 땐 나가보려고 합니다. 클라이언트께서 마무리를 궁금해하셔서 말이죠.”

“그럼 그때 뵙겠군요.”

미소로 대신 대답한 김명현이 자리를 떴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이지.’

그래도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걸 보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밀린 숙제를 마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구실에 홀로 남은 민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지만, 기꺼이 창문을 열었다.

쏴아아아!

소리 때문일까.

민우는 가슴에 쌓인 먼지가 시원하게 쓸려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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