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88화 (388/500)

결승전 (2)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민우와 이수빈, 그리고 한진섭과 주예린이 간단히 먹을 것을 싸 들고 서지훈 교수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는 의자에 눕듯이 앉아 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민우가 웃었다.

“이야. 정말 태평하시네요. 지금 한가롭게 야구 볼 땝니까?”

“오늘은 놓칠 수 없는 경기란 말이지. 한화 호크스가 꼴찌에서 탈출하냐 마느냐가 걸린 경기란 말이다.”

“어차피 가을야구 못 하잖아요.”

민우의 팩트 폭격에 서지훈 교수가 정색했다.

“언젠 너도 호크스 편이라더니. 성과를 못 내니까 그새 다른 팀으로 갈아탔냐?”

“전 요새 메이저 봅니다. 이제 김현진도 곧 은퇴잖아요.”

“아, 그렇지. 시간 빠르네. 메이저 간다고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러게요.”

서지훈 교수는 인터넷 중계를 끄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민우와 친구들도 하나씩 자리를 맡았다. 그리고 준비해 온 음식을 펼쳤다.

매콤달콤한 냄새가 연구실에 가득 찼다.

“오. 떡볶이 좋지. 오랜만이네.”

서지훈 교수가 반색했다.

민우는 떡볶이와 튀김, 그리고 순대같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준비했다. 서지훈 교수의 입맛 정도는 꿰고 있었다.

한편 한진섭은 봉지에서 캔맥주를 꺼내 하나씩 돌렸다.

그러다 보니 근사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분식에 맥주라…… 옛날 생각 나는구만.”

“옛날이면 언제요?”

이수빈이 물었고, 서지훈은 나무젓가락을 가르며 답했다.

“상아대에 있을 때 박 선생, 주 선생하고 자주 먹었지. 학교 근처에 떡볶이 맛집이 있었거든.”

“명인대로 안 옮기시는 게 그 떡볶이집 때문이라고 하실 정도로 좋아하셨잖아요.”

주예린이 새침하게 덧붙였다. 민우와 서지훈 교수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내가 그랬나? 하긴, 지금도 가끔 생각날 정도로 좋아했었지.”

“그렇게 생각나시면 다음에 한번 가시죠. 간 김에 조성진 선생님도 뵙고요.”

민우를 밖에서 여러모로 도와줬던 조성진 교수는 어느덧 상아대 국문과에서 제일 연차가 높은 사람이 되었다. 그만큼 힘도 생겼다.

매번 동문 초청 특강에 나와달라고 사정하는 것 빼고는 상아대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 중 하나였다.

반면 번역 사업으로 민우와 대립각을 세웠던 유희윤 교수는 지원사업 서류 조작 건으로 낙마하여 주류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고 들었다.

‘권선징악’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 케이스였다.

서지훈 교수가 말했다.

“안 그래도 조 선생님이 박 선생 이야기 많이 하시더라. 후배들을 위해서 시간 좀 내는 게 그렇게 어렵냐고 말이지.”

“어려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도껏 해야죠. 3년 전에도 갔었는데 또 가는 건 좀 그렇잖아요. 상아대 국문과에도 훌륭한 선배들이 많은데.”

민우가 은근슬쩍 주예린을 쳐다보았다. 떡볶이를 집어먹던 주예린이 사레에 걸렸는지 켁켁거렸다.

한진섭이 캔맥주를 따서 손에 쥐여주었다.

“어휴, 좀 적당히 좀 먹어. 목에 걸릴 정도로 밀어 넣으면 어쩌냐.”

“요새 매콤한 게 땡기는 걸 어떡해.”

“매콤한 게? 설마…….”

분위기가 싸해졌다.

얼굴이 시뻘게진 주예린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만 더 이상 마시진 못했다. 한진섭이 캔맥주를 압수했던 것이다.

“시작하는 거 같습니다.”

“오, 드디어!”

민우가 핸드폰으로 중계방송을 틀어 거치대에 올려두었다.

― 안녕하세요. 명인대 가족 여러분. 많이 기다리셨죠? 지금부터 총장 선거 개표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교내 방송국 아나운서의 멘트와 함께 화면이 전환되었다.

다섯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개표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뒤에는 참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다.

처음에는 전자 투표를 하자, 자동 집계 시스템을 도입하자 말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유권자들이 갑자기 늘어난 것도 있어 첨단 시스템은 천천히 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 개표 완료 예상 시간은 저녁 9시입니다. 10분 간격으로 집계 상황을 보여드릴 텐데요. 오늘 도움 말씀 주실 홍주희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 네, 안녕하세요.

― 오늘 선거, 정말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가했습니다. 84퍼센트라는 기록을 세웠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홍주희 교수는 예의 그 차분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해 나갔다.

― 글쎄요. 아무래도 명인대 재학생분들이 투표에 참여한 첫 선거이기 때문에 기록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아마도 앞으로 투표율을 점차 높여서, 민주적으로 완성된 방식으로 대학의 수장을 뽑는 게 중요한 거겠지요.

― 그렇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출구 조사 결과를 보실 텐데요. 우선 재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출구 조사입니다.

화면이 전환되고 표가 띄워졌다.

역시 서지훈 교수와 백성웅 총장 2강 체제였다. 나머지 후보는 볼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의 거의 모든 표를 독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와아아아!”

“해냈다!”

주예린과 한진섭이 벌떡 일어났다.

서지훈 교수가 85.1% 비율을 차지하며 1위를 달리고 있다. 그에 비해 백성웅 총장은 11.6%에 머물고 있는 상황.

실로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

“이 정도면 안 봐도 결과는 뻔한 거 아닙니까? 오늘 2차 가시죠!”

한진섭이 제안했고, 서지훈 교수가 피식 웃었다.

“설레발 치지 마라. 아직 개표 시작도 안 했다.”

“출구 조사면 거의 확실하지 않아요?”

“이건 좀 다르지. 학생들의 표 하나가 10퍼센트의 가치가 있는 거니까 좀 더 지켜봐야 해.”

“아, 맞다. 100퍼센트 다 반영되는 게 아니었죠?”

“학생들 표에서 우세하다고 해도 교수나 교직원들 표에서 갈리게 되면 지게 되는 거지. 교수와 교직원들 한 명이 학생들 열 명분을 하는 셈이니까.”

그렇게 대꾸한 서지훈 교수는 묵묵히 어묵을 간장에 찍어 먹으며 화면을 주시했다. 정말이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태연했다.

잠시 후 첫 집계 결과가 나왔다.

― 기호 1번 백성웅 후보: 175.1표

― 기호 2번 서지훈 후보: 162.6표

― 기호 3번 정용진 후보: 22.0표

― 기호 4번 도진수 후보: 15.0표

“아…….”

들떠 있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이 싸늘히 식었다.

서지훈 교수가 웃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설레발 치지 말라고 했지.”

“생각보다 차이가 좀 나는데요? 저는 서지훈 선생님께서 압도적으로 앞설 거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지켜봅시다.”

그렇게 말한 서지훈 교수는 캔맥주를 내밀었고, 제자들은 건배하며 차분히 방송을 지켜보았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환호성을 지를 때도 있었고, 안타까운 한숨을 내쉴 때도 있었다.

그리고 저녁 9시.

아나운서와 홍주희 교수가 나란히 앉아 있는 스튜디오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 지금까지 오래 기다려 주셨는데요. 최종 개표 결과 보내드립니다. 본 결과는 명인대 선거관리위원회의 최종 승인을 받은 유효한 결과임을 말씀드립니다. 우선 상위 세 분의 후보자들의 득표수를 알려드립니다.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모두가 두 손을 모으고 숨죽여 결과를 기다렸다.

― 가장 많이 득표한 후보는 서지훈 후보입니다. 1541.5표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는 백성웅 후보로…….

2순위까지 들을 필요가 없었다. 당선은 서지훈으로 확정되었다.

“이야아아아!”

“해냈다!”

“축하드려요! 선생님!”

“우리 선생님이 총장님이 되셨어!”

제자들이 벌떡 일어나 서로를 얼싸안았다. 서지훈 교수는 그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감추고 감췄던 안도의 한숨이었다.

“고맙다.”

“아니, 소감이 그것뿐이에요? 좀 더 솔직해지세요!”

주예린이 따지듯 말하자 서지훈 교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좋은 날 한잔해야지? 나가자. 오늘은 내가 사마.”

“아, 근데 사모님하고 같이 보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좋은 날에…….”

그때 문이 열렸다.

화려한 꽃다발을 든 송승현 이사가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당신…….”

“축하해요.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을 거 같아서. 당선됐죠?”

“그래.”

송승현 이사가 꽃다발을 건넸다.

서지훈 교수가 두 손으로 꽃다발을 받았다. 여자에게 꽃다발을 받는 게 얼마 만일까. 스승의날을 제외하고는 기억나지도 않았다.

서지훈 교수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당선될 거라는 거.”

“당신은 어딜 가던 난사람이었잖아요. 총장 선거도 예외는 아니었겠지. 하물며 내 사람인데요.”

“꺄악 내 사람이래! 로맨틱!”

옆에서 주예린이 깐죽거리자 한진섭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때 민우가 물었다.

“혹시라도 당선되지 않으셨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했어요?”

“그럼 위로의 뜻으로 주면 되는 거고. 꽃은 늘 받기만 했는데, 이렇게 주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와, 서지훈 선생님이 꽃도 사 주세요? 그런 남자인 줄 몰랐는데.”

“은근 로맨티스트라니까.”

송승현 이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서지훈 교수는 꽃다발을 연구실 한쪽에 놓았다. 어느 꽃병이 어울릴지 생각하면서.

민우가 말했다.

“그럼 저희는 슬쩍 빠지겠습니다.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어딜 빠져나가려고 그래요?”

송승현 이사의 한마디에 민우와 친구들이 얼어붙었다. 마치 지음사의 임원이 아니라, 명인대 선배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날 먼저 빠지면 곤란하죠. 오늘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는 거예요. 다들 준비됐죠?”

“네!”

그때 슬그머니 문이 열렸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재환과 최민식, 그리고 강예진이 나타난 것이다.

“그 모임, 우리도 껴 주지?”

이재환이 대표해서 말했다.

여기에서는 이재환이 가장 선배였다. 서지훈 교수보다도. 씨익 웃은 서지훈 교수가 그에게 다가가 악수한 뒤 가볍게 포옹했다.

“축하한다. 지훈아.”

“선배님 덕분이죠. 오늘 축하주 얻어 마실 수 있는 겁니까?”

“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총장 후배 둔 거 기념해서 오늘은 내가 쏜다!”

한때 대학원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동료들이 모두 모였다.

민우는 생각했다.

좋은 일로 이렇게 모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 * *

“망할…… 빌어먹을!”

쨍강!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선거관리위원회 측의 최종 통보를 받은 백성웅 총장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탁자에 올려져 있던 유리잔을 던지고 말았다.

“아아아……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별수 있겠습니까?”

“허억!”

갑작스레 나타난 김명현 덕에 백성웅 총장이 깜짝 놀랐다. 그는 말 그대로 귀신처럼 나타났다.

“이제 눈에 뵈는 것도 없나? 노크도 안 하고 말이지!”

“했습니다.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대답은 없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서 들어온 겁니다. 불편하셨다면 용서하시길.”

그의 어조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백성웅 총장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흥. 이제 쓸모없어진 주인을 버리고 다른 주인을 섬기시겠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뭬야?”

“저는 명인대 교육개발실의 책임자입니다. 명인대의 교육정책을 수립하는 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지요. 주인을 섬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김명현이 비릿하게 웃었다. 백성웅 총장은 화를 이기지 못했다.

“꺽…… 꺼어어…….”

결국 백성웅 총장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말았다.

한때 명인대를 주름잡았던 권력자의 초라한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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