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 심사위원회 (1)
연구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라고 할까. 방금 헤어지기 전에 서지훈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제 당분간은 내 일을 하면 되는 건가…….’
기다리고 있던 한마디였다. 지금까지 너무 총장 선거에 얽매어있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야심 차게 준비했던 휴머니티 캠퍼스도 몇 번 휴강할 정도였으니, 민우가 얼마나 선거운동에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민우의 일상에 변곡점이 생긴 것이 분명한 상황.
‘선생님 말씀이 맞아. 이젠 본업에 좀 집중해 보자!’
마음을 다잡은 민우는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흩어져 널브러진 자료를 차분히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다음 할 일이 절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아, 맞다. 민재 논문 봐줘야 하는데 깜빡했네?’
미안한 마음에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차민재는 한쪽 자리에 앉아 열심히 논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된 걸까.
기말고사 대체 논문이기 때문에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하지만 차민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조금이라도 빨리 지도를 받고 싶을 게 분명하다.
‘괜히 수업 중에 공격당하거나 지적당하면 마음 아픈 일이니까.’
그래서 가능한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 가는 게 좋다. 세상에 완벽한 논문은 없지만, 그래도 디펜스할 상황을 줄이는 게 낫다.
“민재야.”
“네.”
차민재가 돌아섰다.
“기말 과제 있지? 가져와 봐. 한번 점검해 줄 테니까.”
“아, 그래 주시겠어요?”
“그래. 전에 봐준다고 했잖아.”
“준비하고 있는 과제용 논문이 세 편인데, 세 편 다 드리면 혼나겠죠?”
“일단 한 편만 가져와 봐. 가장 자신 없는 걸로.”
차민재는 한번 봐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한쪽에 놓아둔 파일을 그대로 가져왔다. 즉, 보여줄 준비를 예전부터 하고 있었다는 거다.
민우는 논문을 받아들고 첫 장을 넘겼다.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웹소설의 역사와 전망이라.”
최근 국문학계의 떠오르는 화두 중 하나였다.
차민재는 석사 논문을 실존주의에 대해 쓰기로 했다. 그래서 민우에게 노트도 이어받았다.
하지만 지금 쓰는 것은 과제 및 학회 발표용이니, 트렌디한 연구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안 봐도 어떤 선생님 수업인지 알 것 같네. 설예라 선생님 수업이지?”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젊은 선생님이 아니라면 용인될 수 없는 논문 테마 같아서.”
차민재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이어 물었다.
“요즘 웹소설 쪽 서사 연구가 유행인가?”
“예. 정확히는 2019년부터 많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젊은 연구가들 사이에서 많이 연구되는 것 같더라고요. 웹콘텐츠 학회에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어서 앞으로도 주목받을 것 같습니다.”
“좋은 현상이네. 문학 연구계가 그만큼 젊어진다는 이야기니까. 거기에 학제 간 연구가 가능하다면 더 좋은 일이지.”
지금까지 문학 연구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수많은 온라인 게임들이 유행했지만 서사 연구로 관심을 받은 것은 기껏해야 ‘삼국지’ 시리즈였으니까.
하지만 젊은 연구자들이 약진하기 시작하면서 연구 생태계도 굉장히 젊게 바뀌었다.
기존에는 학위논문에 도표를 제외한 삽화나 그림 같은 것을 넣지 않는 추세였지만, 요즘은 소논문에도 적극 인용된다.
바야흐로 시청각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어디 보자…….’
민우는 루카치의 유품에서 이어받은 능력을 십분 활용했다. 번역 능력이 아니라 속독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15페이지가 넘는 소논문이었지만, 민우가 클리어하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엔 그저 슥슥 읽고 넘기는 것처럼 보여도 민우의 머릿속엔 논문의 약점과 강점이 모두 기록되고 있었다.
검토를 마친 민우가 논문을 닫았다.
“주된 논지는, 웹소설 유행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디바이스의 발전이라는 거구나.”
“실제로 2010년대 초반 스마트폰 보급률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웹소설 업계도 커졌으니까요. 그리고 형태적인 특성도 있습니다. 최근 웹소설을 보면 작은 화면에 서사를 담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보여요. 문장이 짧아지고 대사의 비중이 크거든요.”
“그렇지. 아무래도 이동하면서 보기에는 짤막한 글들이 좋으니까.”
민우도 즐겨보는 것까진 아니지만, 가끔은 챙겨보고 있는 웹소설들이 있다.
웹소설의 특징은 문장이 짧고 가독성이 뛰어나다는 거다.
“이 부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꽤 있더라고요.”
“문장 짧은 거?”
“예. 한국 사람들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에 야합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야합이라는 표현까지 써야 하나…….”
민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장이 길고 아름다우면 좋은 문학이고, 짧고 거칠면 나쁜 문학이라는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민재 네 생각은 어떤데?”
“오랜 웹소설 독자로서 저는 그 관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문해력이 낮은 독자들에게 집중한다기보다는, 형태적으로 유리하게 진화한 게 아닌가 싶어요.”
‘진화’라는 표현에 많은 것이 담겨있음을 느낀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형태에 맞게 문장의 배열이 변하는 건 당연한 현상이야. 문해력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독자의 편의성이 높아지는 쪽으로 해석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모빌리티를 생각해야 한다는 거지.”
“예. 그래서 앱별로 독자 편의 기능을 정리해서 논문에 넣어 보려고 해요. 아무래도 문해력을 언급하면 부정적인 뉘앙스라서, 좀 더 긍정적인 걸 찾아보려고 합니다.”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소릴 들으면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긴 하지.”
피식 웃은 민우가 읽던 논문을 돌려주었다.
“긍정적인 걸 찾는 건 좋아. 그래도 균형은 잘 찾아야 해. 너무 긍정적인 것만 찾게 되면 논문이 아니라 리뷰가 될 테니까. 네가 국문과 학생인 것 잊지 말고. 너무 웹콘텐츠 쪽으로 접근하게 되면 우리 문학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론 자체가 희미해지지 않겠냐?”
“명심하겠습니다.”
“보수적으로 접근한다면…… 디바이스의 발전으로 웹소설의 변화를 논하는 건 우리 국문과에서 할 일은 아니지.”
“그럼 관점을 바꿔야 할까요?”
민우는 잠시 고민했다.
논문의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까딱하면 지금 써둔 것들을 모조리 수정해야 할 가능성이 있었다.
차민재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세 과목을 듣고 있고, 영민한 탓에 교수들의 신임을 받아 이런저런 일을 부탁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성장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민우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디바이스의 발전은 약간 곁다리로 빼두고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 보는 건 어때?”
“텍스트 자체라면…… 하이퍼텍스트(hypertext)로 보라는 말씀일까요?”
“정확해.”
전통적인 의미의 텍스트는 선형적이고 고정적이며 유한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디바이스의 발전은 그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텍스트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하이퍼텍스트다.
“하이퍼텍스트의 핵심 개념이 그거잖아. 텍스트의 이동 능력.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건너뛸 수 있게 만드는 게 하이퍼텍스트가 실현된 어플리케이션 기술이고.”
“거기에 독자와 소통하는 일종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고려한다면 확실히 좋은 방법론이 나오겠네요.”
“맞아. 제대로 봤네.”
민우는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민재는 당장이라도 돌아가 논문을 수정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그게 눈빛을 통해 보였다.
“그럼 네가 처음에 기획했던 디바이스의 발전은 언급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텍스트적으로 접근해서 웹소설 분야의 발전을 논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이제 차이를 좀 알겠어?”
“와…… 사소한 것 같은데 관점의 차이가 이렇게 크네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차민재가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민우는 대수롭지 않게 응했다.
“너도 논문 몇 번 써봐서 그 정도는 알지 않냐?”
“물론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긴 한데…… 선생님이 새로 발표하시는 논문을 보면 그런 생각이 싹 날아갑니다. 날아가고 뭐 남았나 싶어서 뚜껑 열어보면 아직 멀었다는 느낌밖에 안 남아 있어요.”
“하하하. 무슨 판도라의 상자도 아니고. 아무튼 연구방법론 부분 좀 더 다듬어서 새롭게 써 봐. 시간이 좀 촉박하긴 하겠지만 너라면 해낼 거라고 믿는다.”
“넵!”
기합을 넣은 차민재가 자리로 돌아갔다. 아까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민우도 따라서 즐거워졌다.
논문에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는 사실보다, 제자가 공부에 대한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큰 보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자,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은?’
민우는 캘린더를 확인했다.
내일모레 항목에 중요한 이벤트가 하나 걸려 있다. 바로 지음사에서 열리는 ‘박민우 문학상 수상작 선정위원회’가 그것이었다.
* * *
이틀 후, 출근 준비를 마친 민우는 밖으로 나갔다. 늘 그 자리에서 레아가 차에 시동을 넣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날씨가 많이 더워져서 민우도, 그녀의 옷도 점점 얇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반팔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렇죠, 뭐.”
레아를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얼마나 스스로가 바쁘게 지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언론사 등 외부 접촉 부분은 레아가 많이 챙겨준 덕에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레아 씨는 별일 없었죠?”
“어제까지는 즐겁게 지냈는데, 오늘은 그리 즐겁진 않네요.”
“왜요?”
“제임스 사장님께서 한국에 방문하신단 소식입니다.”
민우가 살짝 놀랐다.
센트럴 북스의 최고 경영자인 그는 회사의 규모만큼 무척 바쁜 사람이다. 그런데 대뜸 한국에 온다니 이상했던 것이다.
“갑자기 무슨 일로 오시는 거래요?”
“두 가지 업무라고 하시더군요. 주예린 작가님과 신작 관련 미팅이 있고, 또 매니저님께 여쭤볼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 작가 신작이야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됐으니 그렇다 쳐도…… 저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요?”
“자세히는 말씀 안 해주시더라고요. 그 정도만 전해주면 매니저님께서 궁금해서 못 견디다 밤을 새우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말투가 쌀쌀맞았다.
민우에게 쌀쌀맞은 게 전혀 아니다. 제임스 사장에게 불만을 품었다. 민우를 놀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민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역시 제임스 사장님. 저에 대해 잘 알고 있으시네요. 궁금해도 참아야겠어요. 어떤 선물을 가져오실지 기대되긴 하지만.”
민우는 선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제임스 사장은 뭔가 볼일이 있다고 오면 근사한 프로젝트를 같이 가져왔으니까.
“다음 주 월요일 저녁 비행기입니다. 이번에는 저 혼자 마중 나가겠습니다.”
“아, 그게 좋을까요?”
“어떤 일인지 궁금한 나머지 잠이 부족해져서 댁에서 주무시고 계셨다고 하면 훌륭한 답변이 되지 않을까요?”
사무적으로 말하니 진심처럼 느껴졌다.
민우는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