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일행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행사가 막 끝난 터라 나가는 차량이 많아 혼잡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각기 차에 올랐다.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차에 오르기 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총장 후보 토론회는 다음 주나 되어야 할 거 같고. 이제 다음 스케줄은 이틀 뒤지?”
“맞습니다. 강유찬 학장님 뵈어야 하니까요. 소윤이 말로는 우리 쪽에 호감이 있으신 것 같아서 크게 어렵진 않을 거 같네요.”
“그냥 인사하는 느낌으로 뵙고 오면 되겠구나. 그럼 잘 쉬고 이틀 뒤에 보자.”
“예. 선생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인연이 인연으로
일찍 퇴근한 민우와 수빈은 윤아와 함께 오랜만에 TV 앞에 앉았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TV 드라마로 편성된 <프로페서>의 첫 방영일이 바로 오늘이다.
‘기대되네. 한정현 감독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변형시켰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2차 창작의 묘미는 원작을 교묘히 비트는 것에 있다. 원작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2차 창작이라 보기 어렵다. 새로운 창작물엔 그 창작물을 맡은 사람의 철학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스토리 라인이나 인물의 개성, 그리고 구도가 변할 수밖에 없다.
문학 전공자로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민우는 묘한 기대감을 품으며 채널을 돌렸다.
“드라마 어떨 것 같아요?”
이수빈이 물었고, 민우가 씨익 웃었다.
“엄청 재밌지 않을까? 원작이 워낙 뛰어나니까.”
“요즘 오빠 살찐 줄 알았는데 얼굴이 두꺼워진 거구나.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작품의 인기는 판매량이 말해주는 거야.”
이수빈은 반박하지 못했다.
민우의 자서전이기도 한 <프로페서>는 세계 각국에 번역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굳이 민우가 자화자찬하지 않아도 뛰어나다는 말을 해줄 사람은 널려 있었던 것이다.
“이거 아빠 드라마야?”
윤아가 물었고, 민우가 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아니야.”
“그럼?”
“우리 모두의 이야기지.”
윤아가 어떤 뜻으로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민우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것으로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한 시간 동안 세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TV에 집중했다. 주연을 맡은 허윤과 김보영이 어마어마한 케미를 발휘하며 재미를 선사했다.
드라마 <프로페서>는 원작에 있는 루카치의 유품 내용이 완전히 삭제된, 오리지널 느낌의 대학원 이야기였다.
자서전에서 주로 다뤘던 것이 루카치의 유고를 완성하는 것이었다면, 이 드라마에서는 노력파 대학원생이 주변의 편견을 극복하고 교수가 된다는 스토리를 그리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네.’
촬영장에서는 생생한 느낌을 받았다면, 편집되어 방송되는 장면은 완벽하게 잘 짜인 느낌이었다.
조연인 오정서도 캐릭터를 잘 잡았다. 한진섭 포지션인 그는 주인공 두 사람 사이에서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다 보니 본편이 끝나고 예고편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이수빈이 입을 열었다.
“우와. 진짜 재미있네요. 다음 편 기대되는 드라마는 오랜만이네!”
“그러게. 잘 만들었네.”
“확실히 원작하고는 많이 다른 느낌이에요. 캐릭터만 가져오고 중심 사건은 거의 바뀌었네요. 루카치 유고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없고.”
사실 이수빈도 루카치의 유품에 신기한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신비로운 푸른빛에 대해서는 민우만이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나온 정통 캠퍼스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요즘 시트콤 같은 게 안 나오니, 시기도 잘 탄 것 같고요.”
“한정현 감독님 세계관이 매력적이라서 그래. 어떤 장르든 재미있게 나왔을 거야.”
“서운하진 않아요? 원작이 약간 훼손된 느낌이라든지.”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서운하다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내보냈다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왕 한다면 새롭게 만드는 게 낫지.
“하긴, 오빠는 대본을 봤으니 마음에 안 들었다면 진즉 이야기했겠네. 그래도 본질은 같아요. 교수가 아니라 선생이 되려고 노력하는 주인공 박진수의 일대기니까.”
“노력하는 주인공은 어떤 곳이든 인기가 많잖아.”
“어…… 생각해 보니 그러네. 왜 그럴까요?”
민우는 간단히 대답했다.
“실제로 노력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드라마 주인공이 성공하는 걸 보고 대리만족을 느끼듯, 주인공이 노력하는 것으로도 대리만족을 느끼는 거야. 마치 내가 노력하는 느낌이 들게끔.”
“그건 또 신선한 해석이네.”
“사람은 하기 힘든 모든 것에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어 있어. 평론가 나으리라면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지.”
“흐응…….”
이수빈은 생각에 잠겼다. 다음 평론 테마가 떠오르기라도 한 걸까.
그사이 어느덧 9시가 되었다.
눈을 비비며 졸려 하는 윤아와 화장실로 간 민우는 함께 양치했다. 그리고 딸애를 방에 재운 뒤, 서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이수빈이 마실 걸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논문 써요?”
“아니. 그냥 책 좀 읽다 자려고. 드라마를 보니까 왠지 옛날 생각도 나고. 요즘 뭔가 내가 나태해진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네.”
컵을 민우 앞에 내려놓은 이수빈이 피식 웃었다.
“오빠가 나태한 거면 세상에 부지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걸?”
“그런가?”
“그래도 그런 느낌은 받았어요. 아, 공부하고 싶다! 이런 느낌?”
“수험생들이 보면 좋아하겠네.”
“아하하하!”
민우는 잠시 책을 덮어두고 이수빈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밤이 깊어져 갔다.
* * *
다음 날,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예정대로 명인대 의과대학장인 강유찬을 만나러 움직였다.
의대를 제외한 모든 학과엔 손을 써 놓았다.
물론 그들이 협조할지는 끝까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겉으로는 협조하겠다고 했지만 돌아설 수도 있으니까. 표를 까봐야 알게 될 거다.
하지만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은 학장실 앞에 도착했다. 민우가 노크하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그 찰나의 순간 눈빛을 한 번 주고받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학장실에 들어왔는데, 민우는 살짝 놀랐다.
내부 인테리어가 무척 소소하게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흔한 상장이나 트로피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영어로 된 의학서뿐이었다.
‘음…… 이런 경우는 보통 과시욕이 전혀 없는 사람들인데.’
아주 가까운 곳에 그런 케이스가 하나 있었다.
바로 서지훈 교수.
그는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상을 받았지만, 모두 짐짝처럼 창고에 때려 박았다고 했었다.
특별한 것 같지만 교수 중 그런 사람들이 은근히 있다.
“아아, 어서들 오십시오. 서지훈 교수님. 그리고 박민우 교수님도!”
초로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목소리가 탁하지 않고 맑았다. 강의실에서 들으면 좋을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자자. 어서 앉으시죠.”
민우는 얼마 전 이소윤이 말한 ‘천상 의사’라는 표현이 얼마나 훌륭한 표현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강유찬 학장은 왜소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빼빼 마른 체격에 주름져 거친 피부, 거기에 거무튀튀한 피부는 그가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간접적으로 알게 해주었다.
종종 아프리카나 오지에 가서 의료봉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낡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강유찬 학장이 간단히 마실 것을 준비해 주었다. 두 사람은 다시금 감사의 말을 전했다.
“안 그래도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왔군요. 정호순 병원장님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명인대 교수는 물론 학생, 거기에 환자들까지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학장님의 힘을 빌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하하하하. 벌써 본론입니까? 화끈하고 좋군요.”
서지훈 교수는 굳이 인사치레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 어떤 의도로 만나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강유찬 학장은 호쾌하게 웃었다.
“거두절미하시면서까지 강조해 주셨는데, 음…… 하지만 애석하게도 좋은 말씀은 못 드리겠군요.”
“예?”
민우가 놀라 되물었고, 강유찬 학장이 차분한 미소로 응대했다.
“다른 학과 분위기는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대는 좀 다릅니다. 독립적인 분위기죠. 학생들은 몰라도 소속 교수들이 제 청을 들어줄지 미지수라는 이야깁니다.”
“그렇군요.”
가볍게 대답한 서지훈 교수가 빙긋 웃었다. 마치 예상하고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상관없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표를 여러 개 얻는 것보다 강유찬 학장님의 지지를 받는 쪽이 더 좋으니까요.”
“그건 또 뜻밖인데.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총장 선거의 결과는 하늘에 달린 일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으로서 할 도리는 다하고 천명을 기다릴 뿐이지요. 그 와중에 학장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결과에 관계없이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민우는 낮은 탄성을 질렀다.
마치 철학서에 나오는 스승과 제자의 문답을 보는 것 같았다. 서지훈 교수는 물욕에 초월한 선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비슷한 사람끼리는 통한다는 말이 있다.
그 대답을 들은 강유찬 학장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구나…….’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었다. 벽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강유찬 교수가 무릎을 탁 쳤다.
“소문대로 대단하십니다. 서지훈 교수! 그릇이 남다르시군요. 확실히 총장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그쪽 일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시켜드리고 싶은데, 힘이 조금 모자라군요. 하지만 선거는 표를 까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지요. 우리 후배들을 위해서.”
그렇게 대답하며 강유찬 학장은 민우를 바라보았다.
후배들을 위한다.
그것은 얼마 전 민우가 총동문회 정기총회 연설 자리에서 강조한 말이기도 했다. 혹시 그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걸까.
마치 그 속마음에 긍정이라도 하듯 강유찬 학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지훈 교수님도 그렇지만, 저는 박민우 교수님에게도 흥미가 있어요. 예전에 소윤이를 도와주셨다고 들었는데…….”
“의대 본과 4학년이 제 강의를 듣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뿐이었습니까?”
“설마요.”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의사로서의 사명감으로 그 문제에 접근하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죠.”
“그땐 참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람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의사로 만들기는 더더욱 어려운 법이지요. 사람은 죽음의 무게를 이겨내지 않아도 되지만, 의사는 다르거든요. 타인의 죽음을 수없이 견뎌내며 오롯이 그 자리에 서야 합니다.”
민우는 마치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인상적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소윤과 양지모가 말했던, 의대 교수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으니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총동문회 말고도 우리 의대에도 강의를 나와 주시는 건 어떨는지요. 의사의 길을 걷는 학생들에게도 그런 철학적 질문이 필요합니다. 결국 그들이 다루는 것은 의술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이니까.”
“불러만 주신다면 기꺼이 달려가겠습니다.”
“그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뭔가 앞뒤가 바뀐 것 같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둔 미팅이었다.
짧은 환담을 마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인문관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이제 만날 사람은 전부 만난 거죠?”
민우가 물었고, 서지훈 교수가 대답했다.
“그렇지. 이제 투표까지는 한 달 남았다. 백 총장이 도망가지만 않는다면 토론회가 마지막 일정이겠지.”
“도망가면 어쩌죠?”
“글쎄.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니까. 도망갔을 때 닥쳐올 후폭풍이 어느 정돈지는 계산이 될 거야.”
인문관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 갈림길에 섰다. 서지훈 교수가 민우를 넌지시 불렀다.
“당분간은 내 일에서 신경 끄고 너도 일 봐라. 문학상 심사 건도 있고 논문도 쓰고 정신없을 텐데.”
“그래도 필요한 일 생기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필요한 일이 없어야 좋긴 하지만…… 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콜하지.”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헤어진 두 사람은 각자의 연구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