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377화 (377/500)

명인대학교 총동문회 (4)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자 민우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다른 사람에게 볼일이 있는 걸까.

그건 아니다.

시선이 조금도 엇나가지 않고 자신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나한테 볼일이 있나 보네. 누구지? 낯이 익긴 한데 이름이 생각이 안 나.’

점잖은 양복을 걸친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의미다.

민우는 웃으며 손을 잡았다.

“역시 명불허전이군. 이사장님과 이사진이 모인 이런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소신 발언을 하다니. 그 스승의 그 제자라고 할까?”

“실례지만 성함이…….”

“김종필이네.”

인연이 없었더라면 간신히, 어쩌면 아예 기억해 내지 못할 이름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누군지 알아챘다. 바로 얼마 전 서지훈 교수와 자얀이 만나고 온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바로 공과대학장 김종필이었다.

“아! 학장님. 반갑습니다. 서지훈 선생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저희 도와주시게 됐다고요.”

“으음.”

김종필 교수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했다. 도와준다는 표현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모양이다.

민우가 즉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한 모양입니다.”

“아니! 뭐 괜찮네. 어차피 지금도 파가 갈려서 서로 선거운동 하고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 하지만 괜히 오해를 사는 것도 좋지는 않으니, 적당히 부탁함세.”

그 말에 민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정 연설이 모두 끝났기 때문에 폐막까지는 자유 시간이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백성웅 총장은 경영학과 교수들을 공략하고 있었고, 서지훈 교수는 경제학과 교수들을 공략하고 있었다.

실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백성웅 총장은 서지훈 교수에게 자극을 받아서 그런지 정말 필사적으로 표심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데 저렇게 매달려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오히려 도움을 받는 건 엄밀히 말하면 우리 쪽이지. 내가 박 교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지 않나?”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서지훈 선생님 일이 곧 제 일이거든요.”

“호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때 같이 만나셨던 자얀이라는 친구도 투자 이상의 성과를 가져가겠죠. 크게 본다면 양국의 우호 관계에 도움이 되는 일일 겁니다. 일본을 밀어내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명인대 공대의 저력을 믿는다는 말이었다.

김종필 학장은 만족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뭔가 자네는 총장 선거 이후의 일도 계획하고 있는 것 같군그래.”

“하하하. 그건 그때 가봐야 알지 않을까요? 우선은 눈앞에 놓인 과제부터 처리할 생각에 조바심이 납니다.”

“조만간 식사라도 한번 하지.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감사합니다. 학장님. 조만간 연락 드리겠습니다.”

민우는 꾸벅 인사했다.

이후로도 여러 인사들이 찾아와 민우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민우의 생각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젊은 만큼 조심해야 하지 않겠냐는 충고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솔직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면전에 대고 중립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뭐,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지. 일이 좋게만 풀릴 수는 없는 거잖아? 그건 욕심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민우는 사람들과 인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연하고 어려웠던 일이었는데, 이제 마음먹고 하니까 한결 수월했다.

정치라는 게 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좋은 정책을 수립하는 게 아니라 결국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게 아닐까?’

그것이 바로 정치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헉.”

민우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어쩐지 찜찜하다 싶어서 와봤더니 아주 대형 사고를 치고 있네요.”

“…….”

민우의 안색이 도깨비를 본 것처럼 새파래졌다.

그럴 만했다.

불쑥 나타난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지음사의 이사이자 서지훈 교수의 아내이기도 한 송승현이었으니까.

근사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무섭게 다가왔다.

그 박력에 민우는 한 발자국 물러서야 했다.

“거 봐요. 내가 뭐랬어요? 우리 그이 선거 내보내지 말고 본인이 나가라니까? 아니, 그냥 총선에 나가지 그래요? 아니면 대선?”

“……다 들으셨어요?”

“조금 늦긴 했지만 다 들었죠. 아까 우리 자랑스러운 서지훈 교수께서 총장님이랑 이사장님하고 한판 붙은 것도 다 전해 들었고.”

범인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뒤쪽 너머에서 이수빈이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 뭐 비밀로 하라는 말은 안 했으니까.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어요?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찾아오라면서.”

“그거야…….”

“대체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이면 어쩌자는 건지. 휴.”

민우에게도 하는 말이었지만, 사실 서지훈 교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정작 총장과 이사장과 대립한 건 그였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보좌를 제대로 못 한 것 같네요.”

민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송승현 이사가 뭐라고 하려고 할 그때 서지훈 교수가 불쑥 나타났다.

“이봐. 당신. 회사 일로 바쁜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왜 애먼 사람 잡고 그래?”

“어머나. 서 교수님. 마침 잘 오셨네요. 이제 흥분은 좀 가라앉은 모양이네요? 듣기론 아주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다던데.”

“누구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투른데.”

“이수빈 선생이 그러던데요?”

“음.”

서지훈 교수도 말을 잇지 못했다.

이수빈이 말을 과장하거나 감정을 섞어서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결국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나란히 서서 송승현 이사에게 혼나는 꼴이 되었다. 둘 다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어휴, 아무튼 잘들 하네요. 그 스승의 그 제자라더니 하는 짓도 똑같아. 적어도 이런 자리에서는 조용히 앉아 있다 오면 안 돼요?”

“남편 일자리 잃는 거 싫어서 그래?”

“교수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그런 걸 무서워해요? 오히려 대학을 떠나면 견디지 못할 사람은 당신이면서.”

민우는 흠칫 놀랐다.

명인대 교수 월급이 적지 않은데 얼마나 된다고 하다니. 역시 대기업 이사는 다르다 이건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정답이었다.

서지훈 교수가 대학을 떠나는 그림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뼛속까지 선생이었으니까.

팔짱을 낀 송승현 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나도 손 놓고 있을 순 없겠네요.”

“도와주려고?”

“그럼 안주 곁들여서 한잔하러 온 걸로 보여요? 당신이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나도 뭐라도 해야지.”

“오, 든든하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송승현 이사는 글로벌 출판그룹으로 거듭나고 있는 지음사의 이사다.

당연히 명인대 신문방송이나 디지털콘텐츠 분야의 교수들과 안면이 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표심을 끌어올 수 있다.

서지훈 교수가 은근히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아주 아름다워. 이런 우아한 자태를 보니 장가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갑작스러운 칭찬에 방심하던 송승현 이사가 얼굴을 붉혔다.

“민우 씨도 있는데 이상한 소린 하지 말아요.”

“뭐 우리 사이에 가릴 거 있나?”

“그럼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부디 남은 시간 동안은 조용히 있다가 가길 바래요. 당신도. 민우 씨도.”

“넵.”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답했다. 송승현 이사가 걸음을 옮기다 말고 멈칫하더니 민우를 돌아보았다.

“아, 맞다. 민우 씨.”

“네?”

“전에 문학상 채점표 보낸 거 있죠? 그거 결제 올라와서 봤는데…… 진심인가요?”

무엇이 진심이냐고 묻는 건지는 분명하다.

바로 김태현 번역가를 공로상에 올린 것 때문이리라. 고두열 차장도 그렇고 송승현 이사도 그 문제를 언급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민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고민해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뭐, 막상 심사위원회 열면 다른 분들이 반대하실지도 모르긴 하겠지만요.”

“의외네요. 정말. 한편으로는 대단하기도 하고.”

그 뒷말에는 ‘나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텐데’라는 뉘앙스가 서려 있었다.

민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뭐, 자세한 이야기는 심사위원회가 열리고 나서 하지요.”

그 말을 끝으로 송승현 이사가 자리를 뜨자, 그제야 서지훈 교수가 민우만 들리게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문학상에 뭐 문제 생겼냐?”

“못 들으셨어요?”

“못 들었으니까 이렇게 묻지.”

“그게요. 이번에 박민우 문학상 번역 부문 공로상에 김태현 씨 이름 올려서 그러시는 걸 거예요.”

“뭐어?”

서지훈 교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 *

명인대 총동문회 정기총회도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민우를 비롯해 서지훈 교수의 관계자들이 열심히 발품을 판 덕분에 투표권을 가진 교수와 관계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뒤늦게 행사에 참석한 정연주도 엄청난 인맥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민우와 서지훈 교수가 떠드는 것보다, 그녀가 한마디를 할 때마다 표가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청문대 이사장이다.

체급으로만 본다면 백성웅 총장을 넘어 이태하 이사장과도 견줄 수 있었다.

“이제 학생 표만 남았네요.”

민우가 말했고, 곁에서 함께 걷던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주차장을 향해 앞장서서 걷고 있었고, 그 뒤로는 이수빈과 송승현 이사, 그리고 정연주와 유진태 실장도 따라오고 있었다.

유진태 실장은 정연주의 수행으로 따라온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도 명인대 출신이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행사를 즐기다 나왔다.

“교수들 표는 우리가 약간 앞서고 있는 느낌이야. 이대로 토론에서 백성웅 총장을 압도하고, 그 결과를 보여준다면 학생들 표도 어렵지 않게 가져올 수 있겠지.”

서지훈 교수의 분석은 민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진짜 선생님의 실력을 보여주실 차례입니다. 토론, 쉽지 않을 텐데 힘내세요. 제가 도와드릴 게 있다면 말씀하시고요.”

“필요 없다.”

“너무 자신감이 넘치시는데요. 예전에 학회에서 저랑 붙은 거 생각 안 나십니까?”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냐?”

서지훈 교수가 웃어넘겼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다르니까.”

누가 들으면 오만하다 하겠지만 민우는 그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하긴, 선생님은 학석박을 다 명인대에서 하셨으니 누구보다 잘 아시겠죠. 학교에 대해서. 어쩌면 그 부분이 어필이 될 수도 있고요.”

“그게 아니라, 이게 단순히 경쟁이라고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잠시 침묵하던 서지훈 교수가 문득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별 한 점 없는 컴컴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대학을, 그리고 학생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겠지. 토론의 승패를 떠나서 말이야.”

“……그렇기도 하겠네요.”

서지훈 교수는 큰일을 앞두고서도 수신(修身)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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