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대학교 총동문회 (2)
그날 밤, 명인대 리셉션홀에 수백의 명사들이 모였다.
모두 명인대를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나이가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젊은 편이었던 민우와 이수빈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말 그대로 호화로운 파티였다.
한쪽에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간식과 음료가 놓여 있었고, 고급 와인 또한 준비되었다.
사람들은 각기 손에 잔을 쥔 채 돌아다니며 행사를 즐기고 있었다.
아직 본식은 시작되지 않은 상황.
사실 명인대 총동문회에서 본식은 크게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이런 자유 시간에 서로 어울리면서 면식을 다져놓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게 바로 인맥이 되는 거니까.
‘이제 슬슬 움직여 보자.’
민우는 서지훈, 설예라 교수 무리와 헤어져 혼자 남았다. 이수빈도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그나저나 이사장님은 아직 안 오신 건가?’
예전에 명인대 임용 절차를 밟은 이후 이사장과 길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 하지만 얼굴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다소 무례할 수 있는 행동이었으나, 상대는 화이트 와인이 담긴 잔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동문회는 처음이시라면서요?”
김명현이었다.
도시적인 느낌의 체크 무늬 정장을 걸친 그는 마치 이곳의 주인공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물론 민우는 그런 저급 도발에 흔들릴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예. 처음입니다. 그간 너무 공부에만 몰두한 게 아닌가 싶어서 바람 좀 쐬러 왔지요. 이제는 좀 사람들도 만나고 다닐까 합니다.”
“변하셨군요.”
“요즘 많이 듣는 말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웃기만 했다. 서로의 저의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물론 민우도 가만히 앉아 당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나저나 김 실장님이 동문회 자리에 나오실 줄은 몰랐군요. 외국에서 대학을 나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아. 학부는 명인대를 나왔습니다. 저는 엄연히 명인대 출신 사람이지요.”
‘저도’가 아니라 ‘저는’이라는 표현을 썼다. 다분히 민우를 의식하고 한 말이다.
자신은 명인대 학부를 졸업했지만 민우는 아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대학원보다는 학부 서열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 점을 짚고 시비를 건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러셨구나. 매번 초대를 받았는데 안 오는 것도 실례이고 해서 말이죠. 막상 와보니 좋네요.”
“그러십니까.”
“요즘 촬영장에서 뵙기 힘들던데. 바쁘신 모양이죠?”
잔을 한번 휘저은 김명현이 씨익 웃었다.
“저야 뭐 회장님 대리이니 굳이 가서 분위기 흐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바쁜 거야 박 교수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다음엔 강의실에서 뵈었으면 하네요. 전에 청강하신다고 들은 것 같던데 영 안 보이셔서.”
“시간이 허락되면 그렇게 하지요. 부디 끝까지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쪽도.”
담백한 한마디와 함께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때 민우의 눈에 재미있는 장면이 들어왔다. 바로 현 총장이자 차기 총장 후보로 나선 백성웅 총장과 총장 후보 서지훈 교수가 마주한 것이다.
민우는 재빨리, 하지만 그들의 의식하지 못하게끔 다가갔다.
대화가 시작되었다.
“요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총장이 그렇게 말했다.
불쾌할 만한 발언이지만, 서지훈 교수는 피식 웃어넘겼다.
“그래서 그런지 벌떼가 꼬이는군요. 귀찮게 말이죠.”
“지나치게 나서지 않는 게 좋아. 내가 연임한다는 가능성은 남겨둬야지?”
“와우, 무섭군요! 연임하시면 저를 내치시기라도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어려우실 텐데요.”
서지훈 교수는 당당히 어깨를 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지훈급의 교수를 내치려면 적지 않은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그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진 말이다.
하지만 내쫓지는 못하더라도 괴롭힐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
백성웅 총장은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가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지켜보도록 하지.”
“그 전에 학생들 그만 선동하고 제대로 일하십시오.”
돌아서려던 백성웅 총장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라고 했나?”
“일 제대로 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서지훈 교수의 목소리가 꽤 높아졌다.
주변이 웅성거리더니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몰렸다. 일이 커지고 있었다. 백성웅 총장을 보좌하던 김명현이 재빨리 다가왔다.
민우도 서지훈 교수 옆에 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편 가르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지금 일어나는 상황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학내 사정에 조금이라도 밝은 사람은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다.
“홈페이지에 연일 팝업 공지가 뜨더군요. 별 시답잖은 공약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실 계획이십니까?”
“서 교수!”
“그렇게 흥분하시는 거 보니 뭔가 음흉한 계획이 있으신 모양이네요.”
얼마 전 김명현에게 ‘오더’를 내린 백성웅 총장은 총장 명의로 여러 공지를 남발하고 있었다. 홈페이지는 물론 학부모에게 문자까지 날리고 있었다.
취업률을 높이겠다. 연구시설에 투자하겠다. 등록금을 인하하겠다.
하지만 구체적인 플랜은 없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제안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일부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서지훈 교수는 그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한 해 재단전입금이 50억도 안 되는 대학이 무슨 발전을 논합니까? 등록금 인하요? 후원 계좌라도 만들어서 구걸할 생각입니까? 전입금도 없이 등록금을 어떻게 내리려고요? 당장 이사회에 건의해서 재단전입금 확충하고 시설에 투자하시죠. 그래야 등록금도 낮추고 대학 순위도 착실히 올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재단전입금은 대학 운영을 위해 사학재단에서 대학으로 지원하는 금액을 말한다.
사학재단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재단전입금을 줄여 대학 운영비를 줄이면 그 부담이 고스란히 학생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재단전입금이 0원인 학교도 있으니 실로 대학생들이 공부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고 있다.
백성웅 총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서지훈 교수가 뇌관과도 같은 부분을 건드릴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의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재단은 대학이나 부속기관을 위해 일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학에 투자할 생각은 없고, 주식이나 채권 같은 것만 매입해서 뭘 어쩌자는 걸까요? 설마 그것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총장 후보로 나서신 건 아니겠지요.”
“이이…….”
“이이 뭐요. 율곡이요?”
서지훈 교수가 도발하자 주변에서 웃음이 들렸다. 그 웃음에 반응한 백성웅 총장이 얼굴을 붉혔다.
토론의 장이 열렸지만,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지훈 교수가 팩트로 후드려 패고 있었으니까.
김명현이 나섰다.
“두 분, 좀 격앙되신 것 같은데 이쯤 하시죠. 손님들이 들으십니다.”
“들으라고 한 말입니다. 곧 선거인데 토론 한번 해야죠. 어느 쪽이 더 총장이라는 자리에 어울리는지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일부는 대답하지 않았고,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훈 교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곁에 있던 민우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차분했던 사람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사고를 칠 줄 몰랐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치밀하게 계산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론화를 시키고 문제를 일으킨다면 가장 큰 부담을 느끼는 건 백성웅 총장이 될 테니까.
“저야 총장님처럼 대학의 높은 사람도 아니고 특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정책 홍보와 설명은 발로 뛰어야겠네요. 좋으시겠습니다. 총장이셔서.”
“그만두십시오!”
“제삼자는 빠지세요. 그쪽이 총장님 비서라도 됩니까?”
김명현이 움찔했다. 그를 밀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온 백성웅 총장이 씨익 웃었다.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서지훈 교수.”
“백성웅 후보자에게 공개 토론을 제안합니다. 무투브와 커뮤니티에 생방송으로 송출해서 누구나 다 볼 수 있게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누가 총장 재목으로 어울리는지 겨뤄봅시다.”
“공개 토론을……?”
백성웅 총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래서였구나!’
그제야 민우는 서지훈 교수가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지 깨달았다.
토론회는 오늘 오전에 연구실에서 다 같이 모였을 때 나왔던 아이디어였다. 주요 후보를 초청해서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토론회를 내보내자고.
하지만 일방적인 방식으로 제안한다면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대학교수, 그것도 국문과 교수가 말빨에서 밀리지 않을 거야 자명하니까.
그래서 서지훈 교수는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면박을 주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 것이다.
민우는 소름이 돋았다.
서지훈 교수가 이렇게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긴, 이건 정치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기 모호한 것이다.
애초에 투쟁에 재능이 있는 거겠지.
“…….”
뭔가 이상함을 느낀 백성웅 총장이 대답하지 못하자, 서지훈 교수가 빙긋 웃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토론회는 합니다. 대학이라고 못 할 거 있습니까?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도 토론회는 하는데 말이죠. 아니면 설마…… 두려우신 겁니까?”
“하지! 하면 될 것 아닌가!”
“좋습니다. 그럼 시일은 저희 쪽에서 정해서 하지요. 방송 장비와 스트리밍 지원은 신방과 학과장님께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러지!”
백성웅 총장이 콧방귀를 뀌며 한쪽으로 물러갔다. 그의 곁에 있던 추종자들도 그를 따라 사라졌다.
하지만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그 뒤에 있던 사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태하 이사장이었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멀어져가는 백성웅 총장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 서지훈 교수. 박민우 교수도.”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그리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아.”
간접적인 질책이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드는 게야? 총동문회장이 당황했겠어.”
“주먹을 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선거를 앞두고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논쟁입니다.”
“자네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제부터 아시면 되겠지요.”
기 싸움이 팽팽했다.
대학 총장과 사립대학 이사장은 클래스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마치 자리라도 건 사람처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재단전입금 발언은 경솔했네. 이사회에서 논의라도 되고 있으면 어쩔 뻔했나?”
“저도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알 수 있죠. 확실한 건 지난 10년여간 전입금 규모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네…….”
아미를 찌푸린 이태하 이사장이 돌연 한숨을 내쉬더니 미소를 짓는다.
“이런 것도 송현우 선생에게 배운 것인가.”
민우는 깜짝 놀랐다.
이사장의 입에서 서지훈 교수의 지도교수 이름이 나왔기 때문에. 타계한 송현우 교수와 이사장이 서로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평화주의자셨죠. 오히려 이런 모습을 질책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사장님.”
서지훈 교수가 분위기를 잡았다. 이태하 이사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게.”
“이사장님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대학을 대학다운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단순히 돈을 버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