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대학교 총동문회 (1)
“하하하하! 그럼요. 당연하고 말고요. 제가 지금까지 열심히 해오지 않았습니까. 연임을 할 수 있다면야 더 열심히 해야겠지요. 그럼요. 교수님은 물론 다른 분들도 제가 솔찬히 챙겨 보겠습니다!”
수화기를 들은 백성웅 총장은 연신 미소를 짓는다. 마치 총선을 앞둔 정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 제가 조만간 찾아뵙고 식사라도 대접하지요. 예. 그럼요. 같이 나와 주시면 더 좋지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백성웅 총장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순간 그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람 좋게 웃었던 그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지독한 피로와 짜증이 올라와 있었다.
“속물 같은 새끼들. 똥개처럼 뭐 하나 떨어질 거 없나 전전긍긍하는군!”
마음 같아서는 품 안에 있는 담배를 꺼내 줄줄이 피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총장실이다.
귀빈들이 왔을 때 담배 냄새라도 난다면 곤욕을 치를 것이다. 백성웅 총장은 끓어오르는 화를 누그러뜨리며 심호흡을 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인터폰을 눌렀다.
“시원한 거 아무거나 좀 가져와 봐!”
― 네. 총장님.
그런데 그때 다시 인터폰이 울렸다. 백성웅 총장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왜?”
― 교육개발실의 김명현 실장께서 왔습니다.
“음…… 들어오라고 해.”
곧 문이 열리고 김명현이 들어왔다.
백성웅 총장은 여전히 팔걸이에 손을 올린 채 거만히 앉아 있었다.
“바쁘신 중에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아닐세. 마침 차나 한잔하려고 했는데 딱 맞춰서 왔구만. 앉지.”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한 김명현이 맞은편에 앉았다. 곧 비서 직원이 차와 간식을 내왔다.
김명현은 이미 총장실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들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취향을 묻지 않아도 알아서 차를 준비할 수 있었다.
비서 직원이 나가고 나서야 백성웅 총장이 넌지시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최근 선거 동향을 좀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음.”
백성웅 총장이 무심한 척 찻잔을 들고 입을 축였다. 하지만 그의 귀는 그 어떤 때보다도 더욱 예민해져 있었다.
김명현이 조용히 보고를 시작했다.
“최근 서지훈 교수의 행보가 심상치 않습니다. 교양학부 교수들이 그쪽으로 붙은 거야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 같고, 예체대 교수들까지 포섭했습니다.”
“그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좀 더 새로운 정보가 없나?”
“있습니다. 최근 서지훈 교수가 누군가와 함께 김종필 학장을 만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더군요.”
그제야 백성웅 총장이 김명현과 시선을 마주쳤다.
“누군가와 함께?”
“예.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군요. 아부다비의 왕족이자 아랍에미리트 연방평의회 의장의 아들입니다. 아부다비석유투자회사의 회장이기도 하지요.”
백성웅 총장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왜?”
“믿을 만한 소스에 의하면, 김종필 학장에게 거액의 연구 투자를 제안했다고 하더군요.”
쾅!
백성웅 총장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하마터면 잔이 떨어져 깨질 뻔했지만,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반면 김명현은 평온했다. 마치 물결도 없는 호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백성웅 총장은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트집을 잡진 않았다.
아직 그의 이용 가치는 매우 높았으니까.
“거액이라면 얼마나 투자한다는 게야?”
“듣기론 120억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는군요.”
“120억…….”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백성웅 총장은 그 큰돈이 명인대로 들어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선명히 떠오르는 게 없다.
120억 원은 명인대 공대 설립 이후 역대 최고 금액의 투자다.
“거기에 일회성 투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아부다비 쪽에 명인대 연구진을 위한 연구소 조성도 들어가 있고, 기타 다양한 옵션이 추가된 것 같더군요.”
“그 모든 것을 김종필이와 논의했다고?”
“맞습니다.”
“앞뒤 분간을 못 하는 종자들이군! 연구 투자를 왜 일개 교수와 논의해? 내가 이렇게 버젓이 눈 뜨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김명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백성웅 총장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공대 쪽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교수들의 비즈니스적 역량도 중요하니까 말이죠. 연구 유치를 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입니다.”
“하지만 경우가 다르잖나? 김종필이가 직접 나서서 그 왕족을 데려온 것도 아닌데 말이지.”
“모두 서지훈 교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없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겁니다. 어쩌면 박민우 교수를 잘 이용해서 총장께서 투자 유치를 했을 수도 있지요.”
“눈엣가시 같은 놈!”
백성웅 총장은 굳이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맞은편에 있는 김명현을 진정한 파트너로 생각했다면 꽁꽁 잘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그는 김명현을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 집도하고 버릴 날카로운 일회용 메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치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김명현이 돌연 미소를 짓는다.
“왜 그렇게 웃나? 남은 열통이 터지는데 말이지.”
“악재이면서도 한편으론 호재이기 때문이지요.”
“뭬야?”
화가 나서 목소리가 높아진 게 아니다. 백성웅 총장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원래 모든 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서운 법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이제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죠. 이공계 교수들을 포섭했으니…… 이제 상경대와 의대 정도가 남았군요. 이 둘을 공략하는 데 집중할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굳이 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겠죠.”
“자세히 말해 봐.”
김명현은 여유롭게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찻물을 들이켰다. 그는 사람을 애타게 만들 줄 아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서지훈 교수 측의 전략은 뻔합니다. 학생 표가 분할되고 교직원 표를 확보하기 어려워졌으니 교수 표를 얻으려는 심산이지요.”
“그렇지.”
“학생, 교직원, 교수를 동일 비율로 놓고 본다면, 지금 우리는 반반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반을 더 채워 2대 1로 승부를 마무리해야겠지요.”
김명현이 넌지시 조언했다.
그것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백성웅 총장은 어리석지 않았다. 좋은 계획이 머릿속에 착실히 들어서기 시작했다.
“물론 총장 후보 경연에서 1위를 차지한다고 해도 총장 선임 권한은 이사회에 있습니다. 마지막에 순위가 뒤바뀔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학내 분위기상 지금 선두 싸움은 백성웅 총장과 서지훈 교수가 벌이고 있다. 둘 중 하나가 총장이 된다는 것은 대부분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막판 변수도 존재한다.
김명현의 말처럼 이사회에서 가장 많은 표를 차지한 총장 후보를 반려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총장 후보가 공정하게 선거를 치러 최종 후보 3인을 뽑는다. 그중 한 명이 명인대학교 총장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사회를 보험으로 생각할 순 없지. 어떻게든 우리가 가장 많은 표를 얻어서 선두로 우뚝 서야 해.”
현 이사장인 이태하는 태도가 불분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눈에 차지 않으면 미련 없이 내친다는 것이다.
그 능력이 출중하든 아니든 말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만약 총장님이 2위로 내려앉고, 1위를 차지한 서지훈 교수가 총장 임명에 부결된다면 학내 분위기가 정말 좋지 않게 돌아가겠죠. 이사회도 부담을 느낄 거고요.”
그때, 백성웅 총장의 머릿속으로 그럴듯한 계획이 떠올랐다.
“기왕 좋은 총장으로 오해를 받고 있으니…… 계속 가면을 써볼까?”
“오더만 내려 주시면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좋아. 바로 시행하게.”
백성웅 총장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 앞에서 김명현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 * *
정장을 잘 갖춰 입은 민우가 연구실로 들어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논문 작업을 하고 있던 차민재가 살짝 놀랐다.
“선생님. 오늘 어디 가십니까?”
“오늘 총동문회 있잖아.”
“아, 맞다!”
민우는 피식 웃으며 차민재가 앉은 자리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어깨를 꾹꾹 주물러 주었다.
“요즘 아주 빡글하느라 내 스케줄도 잊고 있었나 보구만. 논문은 잘돼?”
“선생님께서 봐주신 대로 해보니 막힌 곳은 뚫렸어요. 방학 전에 제출해야 하니 좀 벅차긴 하…… 으아악! 아파요!”
민재가 버둥거렸다. 민우가 일부러 손에 힘을 많이 준 것이다.
낄낄거리며 웃은 민우가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기분 되게 좋아 보이시네요.”
“그렇게 보여?”
“예.”
“그 안목으로 계속 써 봐. 좋은 논문이 나올 거다.”
민우는 짐만 내려놓고 바로 서지훈 교수의 연구실에 들렀다. 마침 서지훈 교수는 설예라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근사한 옷을 입은 이수빈의 모습도 보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잘 차려입은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오늘 저녁, 명인대 리셉션홀에서 총동문회 정기총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어머, 박 선생. 어쩐 일이야?”
설예라 교수가 손을 흔들었다. 민우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거 같네요.”
“그러게. 여기만 들락거리지 말고 내 연구실에 좀 놀러 오고 그러지.”
민우는 두 손을 내밀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선생이 질투할 거예요. 설 선생님은 자기 거라고 하던데요?”
“어머, 그랬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와서 앉기나 해요.”
민우가 자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오갔던 정보를 그들에게 공유해 주었다.
“일단 의대 학장님은 내일모레 뵙기로 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약속이 잡혔군.”
“정호순 병원장님이 다리를 놔주신 거 같아요.”
민우는 이소윤에게 자리를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단다.
이미 강유찬 학장이 민우와 서지훈 교수를 의식하고 있었고, 먼저 그들과 만나겠다고 말을 했다고 전했다. 아무래도 정호순 병원장이 언질을 준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턱을 어루만졌다.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왜요?”
“예전에 네가 그러지 않았나? 일이 너무 잘 풀린다면 어딘가 문제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고.”
그 말에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총장에 앉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뭐 그런 건 아닌데요. 막상 해보니 그리 어렵진 않더라고요. 연주와 자얀이 도와준 게 크긴 해도 이 이상의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아! 물론 제가 정치판에 뛰어든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오해하진 마세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전에 서지훈 교수가 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높은 자리에 앉지 못하면 바꾸지 못하는 게 많다는 말을.
그 기색을 눈치챈 서지훈 교수가 피식 웃었다.
“사람이 변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냐. 이유 있는 변화는 환영받을 일이지. 지레 겁먹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옙.”
“그럼 다들 모였으니 오늘 밤 계획을 좀 세워볼까? 총동문회에 참석하는 나으리들을 어떻게 구워삶을지 말이야.”
서지훈 교수의 눈매가 예리해졌다.